〈 6화 〉시작의 이야기
내 기억력은 정상인의 10배에 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 다른 세계로 떠나면서 대부분 잊혀진다.
하지만 날 이렇게 만든 창세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 혼 속에 깃든 능력에 내 삶도 녹아들었으니까.
그리고 이 삶들은 날 괴롭힌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인 동시에 한 세계의 기억이기도 하기에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세계에서 나는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게 그 세상에서 필요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또 어떤 세계에서는 환생자로서 순수한 소년을 연기하며 부모의 등을 찌르고, 입양된 여동생을 범했다. 그게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빙의자였기에 과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었다. 나에게 몸을 내준 자를 향해 죄책감과 미안함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그게 빙의자였고, 내가 쓸 몸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
"안녕, 내 이름은 이윤정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익숙한 기억이다. 그리고 익숙한 현상이고. 이것은 나의 과거. 내 삶 중 하나다. 곧 눈 앞의 이윤정이 외쳤다. 그녀는 내가 아닌 과거의 날 보고 있겠지.
"난 세계 최고의 히어로가 될 거야! 지켜보라고!"
활기차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웃었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이 꿈은 그저 뒤죽박죽으로 섞인 내 기억대로 흘러갈 뿐이니깐.
기억 속의 나는 그녀를 향해 번개의 창을 꺼냈다. 이윤정은 그런 나를 향해 두 주먹을 쥐었다. 곧, 번개의 창과 두 주먹이 격돌했다.
콰앙-!
피와 살로 이루어진 그녀의 연약한 주먹이 내 창을 막아냈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굉음과 함께 번갯불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손은 강철을 찌른 듯 덜덜 떨린다. 본인이 지닌 능력에 의해 강해진 그녀의 신체는 그 어떤 광물보다 단단했다.
그녀는 창의 번개를 꿋꿋하게 받아들이며 서서히 앞으로 다가왔다.
쩌적-! 쩌저적-!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번개가 모여 만들어진 창의 앞 부분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녀의 주먹은 번개의 창을 부수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 그녀를 비웃으며 활을 꺼내 들었다.
출렁!
두 손에 생겨난 물이 요동치며 순식간에 활의 형태를 이뤘다. 나는 시위를 당겨 3개의 번개 화살을 만들어 그것을 하늘을 향해 쏘아 보냈다.
피슝! 피슝! 피슝!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저것은 분명 오발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선 오발이 아니다.
휘리릭!
화살은 하늘에서 궤도를 바꾸어 낙뢰처럼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릉! 콰과광!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번개의 화살이 내리꽂혀 윤정이가 있던 부근을 박살냈다.
하지만 그녀는 멀쩡했고, 날 향해 악의를 들어냈다. 그래, 그래야지. 그녀라면…. 세상를 구해야 하는 회귀자 주인공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이다.
곧 우리는 다시 부딪혔다. 철저하게 빈틈을 노리는 화살과 활에서 순간 단검으로 변화해 내리쳐지는 공세에 윤정이는 그저 강하게 주먹을 휘둘러 맞받아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억 속의 나는 살포시 웃었다. 저때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었지? 이제는 희미해지고 빛바랬으나 분명 존경과 경외, 그리고 사랑이었을 것이다.
나는 회귀자였으나 정의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던 그녀를 분명 사랑하고 있었다.
"…하, 사랑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내 말에 호응하듯 기억 속의 내가 윤정이의 공격으로 팔을 잃었다. 역시 주인공이랄까, 그녀는 그 짧은 순간 더 강해져 나를 몰아붙였다.
이 기억은 내가 처음으로 악역을 자처하여 주인공을 키운 기억. 그리고 주인공의 손으로 죽임을 당한 기억이다. 시간이 지나도 이 기억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 허무한 감정과 함께 전투는 이어졌다.
팔이 날아가는 순간부터 페이스가 흩어지기 시작한 나는 주인공을 이길 수 없었다. 애초에 주인공을 이길 생각이 없었기에 반격은 점점 약해졌다.
발차기에 팔이 날아가고, 손날 치기에 다리가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윤정이의 손이 내 가슴을 꿰뚫었다. 치명상, 난 저 상처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내 죽음을 끝으로 난 두 눈을 감았다. 거참, 역시 궁금하단 말이지. 내 심장을 꿰고 내가 뒤지기 직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더는 보이지 않는 기억 속에서 두 눈을 감았다. 내가 꾼 이 꿈은 내 영혼 속 능력에 새겨진 나의 삶. 과도하게 능력을 쓸 때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데…. 이유는 나도 모른다.
이번에는 새로운 몸을 고치는 과정에서 능력을 과도하게 써서 이런 거겠지. 그리 생각하는 사이 빛이 보였다.
곧 깨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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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개꿈…."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지? 창문을 바라보니 아직 날이 어둡다. 오늘도 잠버릇에 따라 일어난 건가.
오늘은 적성검사를 하는 날이라 푹 자려고 했는데 공쳤다. 나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의 잠버릇! 빨리 고쳐야 하는데!"
탑에서 신나게 구른 내 몸은 언제 어디에서 자든 아침 3시쯤에 자동으로 일어난다. 푹 자고 싶지만, 수없이 많은 수라장은 거친 내 영혼이 이를 거부하는 기분이다. 아마 이대로 다시 누워도 잠은 안 오겠지.
"그래! 이왕 일어난 거 나가서 몸이나 풀자."
입고 있던 잠옷을 벗고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었다. 이 세계에도 다양한 옷이 존재하지만, 몸을 움직일 때는 역시 갑옷이 최고야. 몸에 착 감기는 착용감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그리고 춥다. 한기가 몰아치니 침대로 다시 틀어박히고 싶어졌다. 최대한 이 충동을 참았다.
"어디 보자 쓸만한 게 어디 없나."
봉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살펴봤는데, 없다. 어쩔 수 없지.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 임시로 만들자. 나는 어둠 속에서 양 손을 모으고 영혼 속 권능을 발동했다.
파지직!
양손에서 번갯불이 반짝이며 한 자루의 창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번개의 권능. 번개를 만들어내며 다룬다. 이 과정에 마력은 소모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개사기 권능이지만 실은 이것도 신의 진짜 권능에 비하면 구데기에 불과하다.
2번째 세계. 악신과의 전장에서 신들은 고기 방패로 인간을 모집하고자 양산형 싸구려 권능을 대량으로 뿌렸었다.
내가 쓰는 건 양산형 싸구려까지는 아니지만 진짜 권능의 조각을 제우스 신의 축복에 대충 버무려서 만든 권능. 그 위력도 힘도 진짜 번개의 권능에 비하면 약하다.
"뭐, 그래도 인간 입장에서는 강력한 권능이고, 신을 상대할 때도 쓸 수 있는 거라 애용하지만."
번개로 만든 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왼손을 앞으로, 오른손을 뒤로하여 양손으로 잡고 손은 허리 위치에 놓는다. 그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며 일점을 향해 창을 찌른다.
"흡!"
파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창을 내 머리 위치의 허공을 향해 찔렀다. 단 한 번에 모든 힘을 담은 찌르기는 위협적이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연계한다. 그 상태에서 창을 아래로 내리쳤다가 다시 올리고 몸을 돌려 창을 휘두른다.
다른 무기도 어느 정도 다루는 나지만 창술만큼은 끊임없이 노력해 극에 다다랐다 자부한다. 나는 더욱더 거세게 창을 휘둘렀다. 창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번개의 궤적이 그려진다.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창을 휘둘렀다.
창술을 가다듬어 몸에 적응시키며 창술을 천천히 흩었다. 도중에 마력을 불어넣어 창의 크기와 번개의 위력을 올려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번개의 창을 없앤다. 이번에는 양손에 푸른 물로 이루어진 단검 두 자루를 꺼냈다. 이 물의 권능도 번개의 권능처럼 포세이돈의 축복에 권능 조각을 버무린 거. 덕분에 어디서든 소금물을 얻을 수 있고, 무기로 만들어서 쓰기도 수월하다.
나는 양손에 단검을 쥔 채 재빠르게 휘둘렀다.
후웅! 후웅!
허공을 가르는 물의 단검. 이번에 만들어낸 물의 단검은 번개의 창처럼 대충 뭉친 게 아니라 고도로 압축하여 날카롭게 고정한 것. 일종의 수압 커터 같은 것이며 마력을 주입할 시 크기가 커지며 더 날카롭게 변한다.
이걸로 악신, 아지다하카의 머리를 베기도 했다. 그땐 여러 권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거라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몬스터나 갑옷은 한번에 베어내리라.
"좋아. 이것도 잘됐고, 마지막은 활인가."
물로 만든 단검 두 개를 합쳐 활을 만들어냈다. 원소의 권능으로 완벽하게 장악하여 다룰 수 있는 원소는 한정적. 원소의 힘을 가성비 좋게 쓰는 법은 역시 활이다. 화살로 정제한 원소를 쏘아낸다.
권능으로 만든 화살이기에 장악을 포기하지 않으면 화살의 궤도를 조정할 수도 있다. 정작 난 활을 잘못 다뤄서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그냥 활을 싫어하기도 하고."
난 물로 이루어진 활을 만져보다 그냥 활을 없앴다. 슬슬 해도 뜨고 있고, 여기는 도시이기에 화살을 쏠 수는 없지. 몸풀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그렇게 궁술 연습은 이번에도 뒤로 미뤄졌다.
활을 없앤 후 내 방으로 돌아가 가면을 쓰고 다시 나왔다. 어서 샤워실로 가서 씻어야지. 내 몸은 땀범벅이었다.
근데 복도에서 눈꼴사나운 광경이 보였다. 에반과 아리스가 웃으면서 방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는 옷이 흐트러져 있어 가슴살이 보일랑 말랑하고, 둘 사이로 후끈한 기운이 보였다.
저 둘 아침부터 했네, 했어. 연인이니깐 당연히 밤새 했겠지. 아침에도 참지 못하고 한판 했을 테고.
유진이라면 여기서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저렇게 사이좋은 연인 관계에서 아리스를 따먹으면 어떤 반응일지 기대된다. 그리 생각하며 그녀의 뒤를 보니 유벨이 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보였다.
유벨은 에반을 좋아한다. 근데 에반은 유독 유벨을 여자가 아니라 여동생처럼 취급한다. 유벨이 빈약해서 그런 건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유벨을 보고 있으려니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반을 향하던 따뜻한 시선이 나를 향하다 단번에 차가워진다. 역시 어제 한 번으로는 인상을 개선하기 힘들었겠지.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그녀도 아름답지만 아리스와 비교하면 몸매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취향이 그쪽인 남자라면 상관 없지, 하지만 에반은 명백히 거유파. 유벨은 에반의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유벨에게 동정을 느꼈다. 그렇기에 시선을 받아주다가 적당한 때에 몸을 돌렸다. 일단 씻어야겠다. 몸을 씻기 위해 여관의 정해진 샤워실에 들어갔다.
샤워실엔 우물과 물이 가득 든 나무 바가지가 있다. 고급 여관에는 개인실에 샤워실이 있다던데. 아쉬운 대로 여기라도 써야지.
깨끗하게 몸을 씻고 다 함께 신전으로 갔다. 적성검사는 신전에서 주관하며 신의 축복을 통해 상대의 재능을 알 수 있는 의식. 그만큼 경건하게 준비해야 한단다.
참고로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이나 대륙 내에서 최고로 치는 신은 창세신. 당연히 창세신교가 대륙 최고의 교단으로 적성검사를 주도하고 있다.
"그나저나 창세신인가, 역시나 여기에도 있네."
창세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와 밀젚한 관계가 있는 존재다. 내가 세계를 넘나드게 된 이유가 창세신 때문이니깐. 창세신은 신들의 신인 존재로 판타지 세계라면 어떤 세계에서든 숭배받고 있었다.
덕분에 그쪽 세계의 신들은 내가 창세신의 축복을 쓸 때마다 창세신의 사자라 불리며 엄청나게 지원받았는데. 그 대가로 내 자유도 극히 제한당했지만.
일단 던전을 탐험하려면 들키지 않도록 창세신의 축복을 쓰는 건 최대한 자제해야겠지.
"응? 창세신님이 왜?"
"아니, 별거 아니야."
내 말을 들었는지 에반이 질문한다. 근데 알려줄 수 없단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에반도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이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반은 자신에게 재능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그리고 만약 에반이 적합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 주인공 일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