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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288화 (288/298)

“안녕.”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인사했다.

인사를 하자 윤채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그래, 안녕.”

나에게 인사했다.

“음.”

윤채린이 나를 봤다. 복잡한 감정이 피었다. 그리움, 반가움. 그리고 어색함.

천의 가면으로 감정하지 않아도 확연한 표정이었다.

윤채린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나를 대하기 굉장히 어려워했다. 마치 나에게 미움받을까 봐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뭐지.’

윤채린은 이런 성격이 아니다. 초반에는 말괄량이 이미지였다면, 후반에는 자애로운 성녀같은 이미지를 보여줬다.

뭐가 되었든, 어려워하는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시우들은 이 세계를 증오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 세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영향인가?’

이시우들은 이 세계를 싫어할만한 모종의 이유가 있을 테고, 이시우들은 그것을 적대감으로 나타냈다.

라는건가.

근데 도대체 뭘 해야 윤채린이 저런 반응을 보일까.

“보내줄까?”

윤채린은 태연한 척을 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내가 원래 있던 곳?”

현실세계.

그러나 나에게 좋은 곳은 아니다. 현실세계는 내게 별로였다. 가족도 여기에 있고, 연인도 여기에 있다.

돈이 많으면 아주 조금이나마 고민하는 척을 했는데, 돈도 여기가 더 많다.

명예나 무력도 그렇고. 거기다가 권력도 있다.

내가 권력에 욕심은 없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대부분의 것을 나는 이곳에서 이루었다.

굳이 돌아갈 메리트는 나에게 없다.

“내가 돌아가기를 원해?”

“……나는 네가 여기에 남기를 원하지.”

윤채린이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넌 원하지 않겠지? 그러니까 보내주는 거야. 승하는, 그걸 인정 못 하고 이 세계를 계속해서 만들어 반복하지만…….”

“그래?”

나는 윤채린은 바라봤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안보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애가 윤채린이란 것도 알겠다.

내 눈치를 보지만, 기본적으로 당당하다. 마치 자신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당당한 태도.

‘이런 애를 도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자신감을 잃게 만든 거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왕은 죽은 건가?”

“응. 나를 소환하는 의식을 자기 목숨과 맞바꿔서 치렀지만……나는 저 세계를 부수는 걸 원하지 않거든.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좀 지쳤어.”

“마왕은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야?”

“……승하랑 계약을 맺었어. 이 세계를 되돌릴 때, 너에게 적당한 시련을 내린다면, 언젠간 이 세계에서 탈출시켜주는 걸 도와주겠다고.”

윤채린이 여기까지 말하고는 의아한 어투로 말했다.

“근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승하는 그 계약을 중간에 스스로 파기했어.”

“스스로?”

“응. 뭐, 이런 계약은 파기한 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조지만, 그 정도의 손실쯤이야 지금의 승하에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윤채린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내리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현대의 풍경이 보였다.

“이곳으로 가면, 현실세계로 갈 수 있어.”

“이 육체 그대로?”

“응, 원래대로라면 안 되는 거지만……너는 이 세계에서 마왕을 물리쳤으니까, 내 권한으로 할게.”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윤채린의 태도가 너무 확고하다. 마치 내 선택에는 이것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남고 싶은데.”

“그래, 너는……뭐?”

윤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이곳에 남고 싶다고?”

“응. 이곳에 남고 싶은데.”

멍하니-나를 바라봤다.

“아니, 이시우가 맞는데? 아무리 외신이라도 나를 속이는 건 불가능한데. 당연히 환상도 아니고…….”

어이없어하는 윤채린.

표정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키스하려다가 멈췄다.

‘윤채린은 아니니까.’

내 눈앞에 있는 내가 아는 윤채린과는 다르다. 지난 1년 동안 사랑을 속삭이던 윤채린이 아니다.

“그럼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거야?”

“어? 네가 남는다고 하니, 당연히 그대로 놔야지.”

“다행이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안도했다.

만약에 윤채린이 진짜로 한번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하면 나로서는 막을 수단이 없었다.

지금의 윤채린은 정말 말도 안 되게 강하니까.

‘지금이라면 내가 한 트럭은 덤벼야 이길 수 있을까.’

밤의 일이라면 나 혼자서도 능히 저 윤채린을 감당할 수 있지만, 무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로 이곳에 남을 거야?”

“응. 가족도 여기에 있고, 무엇보다 결혼하기로 한 애들이 있어서.”

“가족? 가족이 어떻게……잠깐, 결혼?”

윤채린이 나를 봤다.

뭔가 황망한 눈이었다.

“응, 결혼.”

“상대는 누군데. 설마 또 이지아야?”

“지아도 있기는 해.”

“…잠깐, 들이라고? 지아도? 설마 복수의 여성과 결혼한다고?”

“……법으로도 인정해 주잖아. 문제 될 건 없지.”

윤채린은 이제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포기하기 싫고.”

“너 누구야!”

윤채린이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

잠시의 혼란이 있었던 뒤, 나는 윤채린에게 설명했다.

“그, 그러니까 나랑 네가 결혼한다고?”

“뭐, 그렇지?”

그리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문제는 산재해 있다.

겉으로는 이연아는 윤승하와 윤채린의 보호자다.

그녀가 낳은 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 문제는 탑을 해방하는 것으로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장모님까지 건드려서…….’

자기는 숨은 애인으로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튼 나는 윤채린을 바라봤다.

“진짜로 이 미친 계획이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계획이 뭔데.”

“음, 뭐 지금은 말해도 되려나.”

윤채린이 나를 보고는 말했다.

“생각보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야. 네가 이곳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일이지.”

“내가?”

“응.”

윤채린이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처음 떨어진 너는 엄청 혼란스러워했지. 이시우의 처음은……풉.”

갑자기 윤채린이 웃었다.

“음, 뭐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실수도 많이 했고, 크흠, 아무튼 엄청 귀여운 맛이 있었어.”

“나는 처음에 널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어. 애가 갑자기 헛소릴 하지 않나, 하필 윤승하가 아니라면서 사람 면전 앞에서 한숨을 쉬질 않나.”

과연, 그럴만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초기에 평온의 가면에 힘을 빌려서 어찌어찌 버텼을 뿐이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거기다가 가족도 있었고.

윤승하랑 윤채린이 동시에 있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케어를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아무튼 그래도 중반부부터 알아서 잘하더라. 어디서 뭘 자꾸 주워 먹고오는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강해지고. 약한 주제에 꾸역꾸역 날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하고. 그러다가 네가 어느새 나한테 꽤 소중한 사람이 됐고.”

윤채린은 거기까지 말한 뒤, 슬픈 눈으로 나를 봤다.

“그러다가 네가 죽었어.”

“……그런 건가.”

중간에 너무 많은 게 생략되었지만, 나는 윤채린의 말에 공감해줬다.

“그래서 나는 분노해서, 너무 많은 힘을 썼고, 그러다가 지구가 멸망해버렸어. 내가 손도 쓸 수 없을 만큼.”

“…….”

좀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 승하도 있었어. 그 덕분에 내가 부수고, 승하의 힘으로 지구의 시간을 다시 돌렸고, 나는 잠깐 반성할 겸, 너를 살리기 위해서 방법을 찾으려고 잠깐 떠났었지.”

그 다음의 윤채린의 말은 간단했다.

윤승하가 잠깐 유희를 떠나서 기억을 지우고 평범하게 생활했다가 나한테 반했고, 같이 마왕과 싸우다가 내가 윤승하 대신 죽어버리고, 윤승하가 각성했다고.

“그 후부터 미친듯이 반복했지. 내가 세계를 부수고, 승하가 세계를 다시 되살리고. 그렇게 하다가 너에게 집착했고, 너는 우리들을 음……좀 많이 싫어했어.”

“그래?”

“아니, 싫어한 정도가 아니었지. 어느 순간부터, 경멸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라.”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조심했던 건가.

윤채린이 쓰게 웃었다.

“그 때 정신이 확 들더라. 너는 기억을 온저히 가지고 있는 채, 있는데, 우리가 세계를…….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어.”

“대충 요약하자면, 나를 살리기 위했던 회귀가 내가 너희를 경멸할 정도로 싫어하게 된 계기가 된 거군.”

“……응.”

윤채린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진짜 적응 안 되네.

나는 잠깐 고민해봤다.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도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그 이시우랑은 나는 다르다.

나는 이 세계에 와서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현실세계에 가면 당장 걱정할게. 먹고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집 장만에 대출, 차.

설사 좋은 여자랑 결혼한다 해도 그 결혼 생활을 평온히 보낼 수 있다는 가정도 없다.

잠깐 상상해 봤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그럼 미안한 만큼, 잘 해주던가.”

“응?”

“나는 이 세계가 꽤 맘에 들거든. 아마 세계가 갑작스레 멸망하지 않는 한, 나는 이 세계에서 쭉 살아갈 거야.”

내 말에 윤채린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그러니까 갑자기 각성이니 뭐니 해서 굳이 이 세계를 부수지는 말고.”

“……응.”

윤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

“내가 보내줄게.”

윤채린이 아래를 힐끔 보자, 공간이 찢어지면서, 한 장면이 보였다. 어둠이 나를 삼키고 당황해 하는 여성진들이 보였다.

시간은 흐르지 않은 건가.

“뭐, 혹시 몰라서 세계의 시간을 잠깐 멈췄거든.”

“……그래?”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이었다.

“그럼 멈춘 김에 좀 더 멈춰줄 수 있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은데, 왜?”

“승하를 좀 보고 오려고.”

“그래, 보내줄게.”

윤채린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몸이 부유하는 감각을 느끼면서 내 몸은 어느새 우주로 이동했다.

“안녕.”

여상한 목소리. 어딘가 나른한듯하면서도, 그 안에는 짙은 흥분이 서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정면을 바라봤다.

윤승하가 본디 지니던 슬랜더한 스타일의 여성은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은발.

압도적인 볼륨을 자랑하는 가슴 크기.

그것을 보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윤승하의 최종형태라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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