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아를 만나기 직전.
나는 여신이 준 힘의 잔재를 이용했다.
이것으로 특성의 랭크를 올릴 수 있었다. 지식열람이나 천수, 천의 가면은 올릴 수 없다.
‘그렇다면 Ex-등급으로 오를 특성을 고르는 게 맞겠지.’
오버로드, 태극지체, 색즉시공.
눈이나 감각도 나쁘지 않다. 마에 대적할 때 온갖 능력치를 올려주는 신의 대행자도 괜찮다.
그러나.
이것으로 올릴 특성은 이미 정해 두었다.
태극지체·극(S+).
이걸 혼원체(Ex-)로 올려야 한다.
근처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방 안에서 조용히 힘을 가다듬었다.
카각. 빠직. 두둑.
육체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뼈가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감각.
어마어마한 고통이 몰아치지만 나는 평정한 정신으로 버텼다.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육체파들은 고통에 내성이 있으며, 평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여자들을 조금 의심하고 있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성 기능이 약하다.
어느정도냐하면 섹스할 때에 3번 이상 하는 것으로도 절륜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래서 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일부로 나에게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 성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게 여자들을 미치게 할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다.
쾌락이 무섭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나를 미치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물음표가 붙는다.
뼈가 조립되고.
몸 안에 있는 기운들이 반발하고 조화를 이룬다.
흑색과 백색.
그것들이 천천히 뒤섞이면서 회색의 기운으로 화한다.
태극지체는 파괴와 조화의 힘을 다뤘다.
그리고 이 회색의 기운은 한 단계 진화하면서 다른 색의 힘을 발휘한다.
손을 폈다.
천수가 극대화하면서 내 몸에 있는 힘에 대한 숙련도를 올렸다.
손 위에서 회색의 기운이 어린 구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 힘을 여명의 검날에 올렸다.
‘생각만큼의 효율은 나오지 않는 건가…….’
여명이 생각만큼 강화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힘의 근원이 다른 기운에 있기 때문일 터.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된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시간이 되었어.’
아포리아.
세계 최강의 생명체와 만날 시간이 가까워졌다.
***
회담의 장소는 나름 한적한 시골이었다.
만약에.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포리아가 회담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싸운다면 좀 끔찍할 것 같은데.’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여파 때문에 문제지.
나라고 무작정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내가 온다고 하니, 삼왕도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보다 멀리에서 요정족이나 용족, 공허족들도 있고.
“왔군.”
아포리아의 모습은 처음과 비슷했다.
적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온갖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드레스.
“회담 장소로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장소다. 굳이 이곳으로 해야 했나?”
“이쪽도 나름 도심지인데.”
“흥.”
“그리고 나는 나름 유명인이거든.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나는 방해받고 싶지 않아.”
나는 아포리아의 반응을 살폈다.
아포리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홍조가 있는 새빨간 볼. 묘하게 만족스러워 하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어라.’
이건 마치 사랑에 빠진 여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처음에 아포리아를 만났을 때.
아포리아가 기억을 떠올린듯한, 혹은 기억을 엿본듯한 움직임에서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진짜 가능성이 올라가는데.’
“회담 장소는 정해 뒀나?”
“응, 요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데.”
“그것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아포리아가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나야 상관은 없다. 호텔 한 채를 통째로 빌린 돈이 아깝지도 않고.
‘내 돈도 아닌데.’
임나연 회사의 계열사 중 하나가 가지고 있는 호텔이라 별 상관은 없다.
아포리아가 익숙한 걸음으로 걸었다.
여기저기서 시야가 집중된다. 아포리아의 화려한 옷차림인 것도 있지만.
-야, 저 사람 이시우 아니야?
-뭔 개소리야. 이시우가 이런 촌구석에 왜 있……미친, 진짜네.
여기저기서 사진이 찍히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아포리아는 당당하게 걷다가, 이내 인파를 향해 짜증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미미한 마력이 이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 근처에 미미한 장막 같은 것이 생겨났다.
“좋네.”
“이 회담은 너와 나의 동맹에 관한 이야기겠지?”
“응.”
“그렇다면 다른 여자들을 네 눈에 담지 마라. 나는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솟으니까.”
“…….”
어처구니 없는 말에 나는 멍하니 아포리아를 바라봤다.
이건 벌써 공략이 끝난 상태가 아닌가.
‘기억을 자각한 사례인가?’
뭐, 무엇이 되었든 간 이건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었다.
***
“여기서 회담을 하자고……?”
“그렇다.”
은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포리아가 나를 바라봤다.
나름 괜찮아 보이는 가게였다.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공간은 넓었다.
중앙에는 우리 둘이 앉을만한 고풍스러운 탁자와 의자가 있지만, 어디 레스토랑 같은 데를 급하게 손본 구조였다.
사람은 없었다.
아포리아가 미리 손을 쓴 모양인지, 종업원으로 보이는 마인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혈마가 담담하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쟤도 있었군.’
종업원으로 보이는 마인을 보다가 멈칫했다.
이전에 나는 바티칸에 있었을 때에, 검마와 혈마를 마주했었다.
아슬아슬하게 검마를 죽이고, 혈마는 도주했지만, 그 둘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검마는 살아났다는 정수기의 말을 들었었는데…….
‘아포리아한테 잡혀서 종업원 신세라니.’
저건 저것대로 불쌍한데.
“그대가 좋아할법한 메뉴로 구성했다. 무엇이든지 말만 하도록.”
천의 감정으로 검마를 살폈다. 칙칙한 감정이 뿜어졌으나, 이내 아포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말끔하게 사라졌다.
“…….”
나는 메뉴판을 봤다.
그리고 정색했다.
[민트초코 우유]
[민트초코 라떼]
[민트초코 빙수]
[민트초코 아이스 크림]
여기까지는 실로 훌륭한 가게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있는 메뉴들이 문제였다.
[민트초코 치킨]
[민트초코 피자(Hot)]
“…….”
정말로 끔찍했다.
내가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건 어디까지나 디저트로서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거였다.
이런 괴식은 정말로 끔찍하다.
“민트초코 우유로 하나 주문하지.”
나는 메뉴 하나를 주문하고 아포리아를 바라봤다.
아포리아는 나를 바라보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럼 진짜 본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아포리아가 턱을 괴었다.
“이시우. 마왕과 대적하는 것은 포기해라.”
아포리아는 담담하게 말을 했다.
“마왕과 대적하는걸?”
“그렇다. 마왕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회귀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아껴 두었던 걸 모조리 포기했다. 그가 지닌 불변성, 초월, 신성등을 말이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초월경.
그 위에 있는 단계는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그 경지에 이르면 신과 같은 전능한 힘을 얻는다고만 나와 있다.
불변성, 초월, 신성.
그것은 신의 경지에 발을 들이는 데 필요한 것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마왕이 왜?’
마왕이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이유가 있나?
모르겠다.
‘혹시 내 능력과 관련이 있나?’
지식열람.
천의 가면.
천수.
감각이 나에게 속삭였다. 내 능력과 관련해서 마왕이 그런 수를 썼다고.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왕은 회귀자다.
한 시간축에 고정되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러나 시간축을 지나온 그가 지닌 힘은 그대로다.
‘모르겠다.’
고민해봤지만, 마왕이 그것들을 포기해서 힘을 얻은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해야할 것은 정해져 있다.
마왕을 막는 것.
“나에게 협력할 수는 없나?”
“마왕은 모든것을 포기했다. 아마 이 세계 자체를 부수려는 속셈이겠지. 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가.”
아포리아가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아마 이 정보를 주는 것도 연민 때문에 비롯된 거겠지.
“마왕은 강하다. 단독으로 따지면 현재 나보다 2~3배는 더 강하지.”
“능력치 만으로만?”
“그렇다. 그리고……일시적으로 그가 가진 공명의 능력이 한 단계는 상향되지.”
Ex등급의 공명이라.
물론 불안정할 거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억지로 올린 힘.
그래도 온전한 Ex등급이었다.
‘진짜로 골치 아프네.’
“그럼 너는 마왕의 편에 붙는 건가?”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네가 필요해.”
“…….”
내 말에 아포리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가, 내가 필요한가?”
“물론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아포리아. 네가 필요해.”
멍하니. 아포리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한가지 약속을 해라. 그것을 지켜주면, 내가 그대에 곁에 있을 테니.”
“무엇인데.”
“그건…….”
***
아포리아의 조건을 들었다.
그 조건은 나조차도 꽤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뭐, 상관은 없나.’
가게에서 나서기 전에, 혈마를 제압하고 검마를 죽였다.
“나를 어쩔 셈이지?”
“일단은 인질?”
소교주는 일단 잡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묶어놓고 그란데힐에게 연락했다.
-소교주를 잡으신 겁니까?
“응. 일단 인질로 가치……는 거의 없겠군.”
마왕과 교섭으로 쓰기에는 마왕은 모든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따르는 마족이 많은 것도 아니다.
트리키한 주술을 익히는 것이 장점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그럼 이제 가도록 하지.”
아포리아가 움직였다. 나는 아포리아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주택 하나가 보였다. 꽤 아담한 집이었다.
‘이거…….’
주택을 보고는 당황했다.
그 주택은 내가 전생에서 저런 집에 살고 싶네. 라고 생각했던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아포리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아포리아를 따라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하자고?”
아포리아가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했던 것의 마무리.
내 생각에는 그건 싸움이었다. 여긴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상한가?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아니.”
나도 찝찝하던 참이었다.
이곳에 오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포리아에게 돌진했다.
용의 반려.
특성을 발동했다.
그리고.
“잠깐! 너, 너무 격렬한게 아닌가?”
“어?”
***
나는 망가진 침대를 바라봤다.
침대에 쓰러져 있는 아포리아를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헤어지기 직전에 했던 것에 마무리라길래 전투인 줄 알았지.
누가 섹스일 줄 알았냐고.
그래도 한가지 소득은 있었다.
‘최강의 생물은 역시 최강의 생물이었다.’
아무튼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