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인은 기분이 좋게 일어났다. 옆에 있는 백작가의 여식이 조용히 자고 있었다.
‘아쉽네.’
외모로 제국에 이름 높은 백작가의 여식이라, 어디 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웠다.
최근에 신혈을 개화한 아야네나 이연아, 유리코, 샤오메이 같은 여자들보다는 급이 딸리니까.
‘채아도 가슴이 좀 작기는 해도 예쁘니까.’
다만, 이채아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조만간 미안하다고 사과하겠지.’
윤승인과 이채아는 그런 관계였다.
처음에는 윤승인이 이채아에게 매달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관계는 역전되었다.
윤승인은 하녀가 입혀주는 옷을 입으면서 한 남자를 떠올렸다.
이시우.
그 남자는 처음 봤을 때 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
남자가 봐도 압도적인 외모와 비율. 그리고 절로 압도되는 완벽에 가까운 마법 실력.
이채아의 사촌인 이연아도 처음에 그 남자를 경계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남자를 적대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일본인인 유리코라 불리는 여성이 그 남자를 숭배하는 것도 그 기점이었다.
-이시우……요? 그만두는게 좋을걸요.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말했던 이연아. 그러나 그 말에는 희미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짜증나.’
항상 자신이나 이채아를 보면 잘 해주려는 모습이 떠오른다.
분명 평판에 신경쓰는 놈일 거다. 그러다가 기회가 있으면 여자에게 강압적으로 하며, 여자들을 덮치는, 그런 놈일거다.
윤승인은 밖으로 나와서 복도를 거닐었다. 검은 머리를 살랑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는 이연아가 보였다.
그런데 자세가 묘했다.
저 자세는 윤승인에게도 꽤 익숙한 자세이기도 했다. 어딘가 아프거나 부상을 입은 자세. 그러나 최근에 전투는 없었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자신이 신경쓰는 남자가 있는 방 근처기도 했다.
‘씨발.’
내심 노리고 있었다.
이채아의 사촌이라서 건드리지는 못했지만, 만약 이채아와 헤어진다면, 건드렸을 거다.
속으로 욕을 한 다음 지나치다가 절룩거리는 이채아가 보였다.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와이셔츠 하나만 달랑 입고, 넥타이만을 맨 모습.
이채아의 연둣빛 눈이 마주쳤다.
“어?”
이채아가 드물게 당황했다.
윤승인이 기대한 감정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면서, 다시 자신을 받아달라고 했을 이채아가 아니었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느낌.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이채아의 아래에 하얀색의 액체가 떨어졌다.
밤꽃의 냄세.
“너…….”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무슨 소란이지.
이채아가 잠깐만 기다리면 맛있는 걸 내오겠다고 와이셔츠만 위에만 대충 입은 다음 밖으로 나간 뒤에 고함이 들렸다.
“아, 윤승인이 봤나 보네요.”
“그래? 그럼 내가 가야겠네.”
“아뇨, 제가 갈게요. 시우 오빠는 여기서 얌전히 저랑 채아 언니가 오는걸 기다리면 되요.”
이연아가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나시티 위에 겉옷을 챙겨입고, 짧은 핫팬츠를 입었다.
-야! 너 설마 그 새끼랑 잤냐?
-잤다, 왜! 너는 다른 애들이랑 자는데 난 안돼냐?!
밖은 소란스러웠다.
“그냥 내가…….”
“아뇨, 제가 갈게요. 그편이 윤승인을 더 골탕먹일 수 있어서요.”
이연아가 서늘하게 웃으며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침대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저질렀군.’
정말로 이제와서지만, 장모님이랑 했다. 장모님이라고 하기엔 신체나 정신의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아무튼.
저질렀다.
이걸로 윤승하, 윤채린, 이채아 모녀를 다 먹어버렸다.
거기다가 사촌 동생인 이연아까지.
자괴감이 몰려오는데 금기를 범했다는 쾌감도 있었다.
쾌감 쪽이 더 강력했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얼추 밖의 상황이 진정된 것 처럼 보였다.
나는 팬티 하나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꼴사나운 모습으로 엎어진 윤승인이 보였고, 그 위에 머리에 발을 올린 이연아가 보였다.
‘진짜 맺힌게 많았나.’
어쩌면 내가 이연아에 내숭에 속은 걸지도 모른다. 항상 나한테 예뻐 보이고 착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으니까.
당장 협회에서도 마인을 보면 거침없는 손 속을 보였으니까.
“어머, 오셨어요? ……근데 팬티 바람으로 나오셔도 돼요?”
“나름 자랑스러운 몸인데, 왜.”
나는 힐끔 윤승인을 바라봤다. 천의 감정으로 읽지 않아도,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열등감, 증오, 자괴감, 얕은 후회. 그리고 적의와 살의.
빡!
이연아가 자비없이 윤승인의 머리 위에 올린 발에 힘을 줬다.
“어딜 눈을 부릅떠요, 우리 자기한테.”
“너……!”
“아,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채아 언니한테 손 좀 떼주고요, 혹시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왕한테 가시진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채아 언니 전 남친을 죽이는 건 좀 그렇잖아요.”
으득.
이빨을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뭘 잘했다고, 이를 깨물어요.”
팍!
이연아가 머리에 올린 발에 힘을 줬다. 얼굴이 바닥 절반가량 들어갔다.
……아프겠네.
***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여러 가지 많은게 바뀌었다.
“용사, 윤승인은 부상 때문에 당분간 요양을 하기로 했다. 당분간 귀하들끼리 공략을 해야 할 것이다.”
공략에 윤승인이 빠졌다던가.
“헤에, 그래서 윤승인이 그렇게 된 거네요~.”
“쿠즈(쓰레기).”
“원래 인간은 그렇습니다. 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적대하면 그 끝은 파멸뿐이죠.”
“그런 애는 빨리 잊고, 저희랑 공략이나 해요.”
“소데스. 천천히 저희끼리 오붓하게 공략해요.”
“그런데 왜 신……이시우 님만 있으면, 아야네 님은 멍청해 보이게 일본어와 한글을 섞는 것입니까?”
“……이것도 하나의 매력이에요, 이시우씨만 모르는 바보.”
“칭찬 감사합니다.”
샤오메이와 아야네, 유리코가 같이 공략하자고 하거나.
그래서 같이 싸우기로 했다.
“그냥 마왕만 빠르게 잡을까?”
“네, 뭐 여기서 얻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아, 시우 오빠한테 어울리는 특성 몇 개 골랐는데 써보실래요?”
“응? 나중에 추천해줘.”
이연아와 담소를 나누고 10층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제국하고 마물들은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쪽으로 향했다.
‘대충 1만여 마리인가.’
더럽게 많다. 대부분이 하급 마물로 분류되고, 가끔씩 중급 마물들이 존재하며, 한줌의 상급 마물들이 있다.
원영신. 육신이 영혼으로 화한다.
세계를 열었다. 무신을 꺼냈다.
-……나를 왜 꺼낸 거지?
“조언 할 거 있으면 해봐.”
무신이 가진 천무는 굉장히 특별한 힘이다. 천무. 문자 그대로 무武로 하늘에 다다르는 힘.
Ex-급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 힘은 무신이 가진 힘의 원동력이다.
“……진짜 혁월이네요. 그리고 이 힘은…….”
“회귀자의 힘이지.”
“대단하네요. 이게 천의 가면 본래의 힘……?”
이연아가 경악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공허를 활짝 열었다.
은하를 개방한다.
한 순간에 무시무시한 양의 공허가 여명을 타고 흘렀다. 천수를 극대화 했다. 검에 한 점 집중된 공허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천수로 극대화된 기교가 검에 더해진다. 한 갈래로 갈라지는 참격이 백여개의 참격으로 화한다.
일검.
백여개의 참격이 한번에 일만 마리의 마물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야네와 샤오메이, 이채아랑 작은 연아가 보였다. 잠깐 당황하다가도 이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유리코도.
‘쟤는 진짜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이것으로 마왕으로 향하는 길은 열렸다.
“그 힘, 무슨 힘이죠? 꽤 위험해 보이는데.”
“공허. 공격력 하나는 굉장해서 주의해서 쓰고 있지.”
-……그 힘 한번 더 휘둘러 볼 수 있나?
무신이 조용히 나를 보며 말했다.
무신의 눈을 바라봤다. 공허로 이루어진 사람 형태의 모습이었지만, 무신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 집약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알겠군. 그저 단순하게 연결을 끊어버리는 게 아니야. 이봐, 너. 쌍검을 다루지?
“어.”
-그렇다면 이천일류나 검선무……화령삼검을 조금 개조하고 무극진천로의 순간 가속을 가져와도 나쁘지 않겠군.
무신이 중얼거리면서 공허를 세심하게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좀 나빴다. 시커먼 남정네가 날 봐서 그런가.
‘요즘 너무 여자애들이랑 붙어 있어서 그런가.’
나는 비염을 불렀다.
“남아 있는 마물 처리 좀 부탁해.”
-오케이.
그리고 마왕성으로 향했다. 마왕성은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마왕성의 문.
그곳에 한 존재가 있었다.
40대 중년인으로 보이는 망토를 휘감은 남성이.
“……어라. 저거 마왕인데.”
이연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항복하러 왔나요.”
“마왕이라고 해봤자, 고작 피조물. 이해는 갑니다.”
유리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쟤는 진짜 두렵다. 나중에 이시우 교 같은 것을 만들 것 같아서.
“설마. 마왕은 저번 탑에서 초월경이 2명이나 있었는데, 나름 용감하게 싸웠다고.”
이연아가 어처구니없이 중얼거렸지만, 천의 감정으로 보이는 마왕의 감정은 공포였다.
내가 다가가자 마왕이 굉장히 공손한 태도로 엎드렸다.
“거짓의 위를 가진 일곱 번째 심복이 가장 위대한 주인님을 뵙습니다.”
“……진짜 항복하러 왔다고?”
이연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위대한 업적! 마의 심복을 굴복시켰습니다!]
[하늘 위에 있는 여신이 당황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늘 위에 있는 여신이 왜 다 죽었냐고 물어봅니다.]
하늘 위에 있는 여신?
나는 의아해했다. 다 죽었다고?
“뭐, 그런 거지. 일개 마족이 고작 주인에게 대들다니, 말이 안 되잖아?”
어느새. 20세에 가까워진 정수기가 내 쪽으로 오며 말했다. 이빨로 뱀 비스름한 것을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서.
“……그거 설마 질투의 뱀입니까?”
“응. 저번에 주인이 깽판 친 것 때문인지 다급하게 뭘 하려 하다가, 나한테 기습받고 잡아버렸지 뭐야. 아, 주인이 막타 칠래? 마기는 내가 다 빨아먹었지만, 포인트는 얻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하십시오, 용사님. 아니면 저를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거악은 마기가 없어도, 그 내부에 있는 힘으로도 성검에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껄?”
정수기가 키득거리면서 엘도르의 말에 반박했다.
“지금 마왕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해. 성검이 원래대로라면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상태에선 도움도 안 되지.”
“……그 정도야?”
“응. 진지하게 지금 주인이랑 최강의 생명체 아포리아, 거기에 초월경 몇몇을 더해야 겨우 승산이 생길껄.”
오독오독.
정수기가 질투의 뱀을 씹어먹으며 나를 봤다.
“아, 근데 주인 어떻게 꼬신 거야?”
“누굴 또 꼬셨어요?”
이연아가 눈을 아주 잠깐 나를 향해서 흘겼다.
누구지? 설마 삼왕을 말하는 건가. 삼왕은 내가 꼬셨다기보다는 상황 자체가 묘했다.
“아주 제대로 꼬셨던데? 아포리아가 이 잡듯이 네 행방을 쫓더라. 그러다가 나랑 오붓하게 있다고 하니까 살기가 넘실거리던데. 나름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표정은 또 처음 봤어.”
“…….”
이건 오해다.
아포리아는 진짜 오해다. 나는 아포리아를 꼬실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죽이려고 했지.
“뭐, 덕분에 좀만 더 살살 꾀면 이쪽으로 넘어올 것 같은데. 꾀어봐?”
“……한번 말만 해봐.”
내 말에 이연아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마왕도 나중에 꼬시는 게 아니에요?”
“마왕은 남자야. 뭐, 마왕을 진짜로 꾀어서 마왕 자신이 스스로 여자가 되면 또 모를까.”
정수기는 다만 키득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궁금한게 하나 있다.
“뭐야, 무신. 살아 있었네?”
-너, 그 때 이시우의 사도가 되었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가 되었지? 나는 계약 같은 걸 하지 않았는데.
“무얼. 간단한 이야기지. 나는 이시우에게 이설화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정식으로 사도가 되었지.”
“……그걸로 사도가 될 수 있어?”
“응. 나는 마왕에게 가망이 없다고 느꼈으니까. 그래서 내가 굳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잖아.”
정수기가 무신을 비웃으며 말했다.
“지금 네 꼴을 보니 그 때 바로 지어달라 하길 잘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