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일정이나 일들을 미뤄놓고, 쉬는 데에 집중했다.
‘너무 열심히 달렸나.’
한 번의 싸움 이후 너무 연속적으로 거악들과 싸웠다.
오베론.
무신.
그리고 오만한 용.
연속적인 전투 때문에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떨어진 느낌이다.
집중력이라고 해야 되나. 번아웃은 아닌데 당분간은 놀고 싶었다.
유아독존의 힘으로 육체와 정신은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된다.
그럼에도 그랬다.
그래서 난 쉬기로 했다.
아직은 학생인 신분이라서, 집에서 마냥 쉬기에는 부모님 눈치가 보이니까 미리 사둔 집에 들어갔다.
일년동안 몇 번 들리지 못한 집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란데힐이 신경을 써준 것이겠지.
‘뭐하지.’
할게 없어서 컴퓨터를 켰다.
집을 꾸밀 때, 돈이 남아돌아서 샀던 500만 원 짜리 컴퓨터.
그런데 컴퓨터를 켜니 막상 할게 없었다.
국민 게임이 있었지만, 내 지인중에 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인이라고 해도, 원래 세계의 인간관계가 그대로 왔었지만, 많이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는데, 거리감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하긴, 내가 좀 높은 위치에 있기는 했다.
게임은 몇 판 하고 나서 그만뒀다. 높은 반사신경 때문에 싸우면 무조건 이기는데 한타가서 운영에 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게임도 재미가 별로 없었고, 기사 같은걸 찾아보는 것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냥 놀러 갈까.’
핸드폰을 열었다. 문자는 많이 와 있었다. 내 여자친구들에게도 왔고, 하메르나 에니스에게도 문자가 왔다.
여자친구들에게는 모두 답장을 해 줬다. 그런데 하메르와 에니스는 애매했다.
가만보면, 나에게 마음이 있는것 같기는 한데, 종족의 장으로서 무게라고 해야하나?
하메르와 에니스는 나와 거리를 어느정도 두려고 했다.
혹은, 티타니아와 무언가 합의를 봤다거나.
그러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놀기는 개뿔.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곧 마왕과의 결전이 일어날 것이다.
직감에 가깝지만, 거악들이 대부분 쓰러지고, 제대로된 인원이 없다. 조만간 마왕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테지.
훈련을 해야 한다. 아포리아를 죽이지 못했다.
다음에 아포리아가 같이 참전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가장 좋은 것은 팀이 되어 주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적이 될 확률이 높다.
극단적으로, 나와의 싸움을 피하고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막을 방법이 별로 없다.
이 세계는 게임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현실이 되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
신과 용족.
그 사이에서 태어난 신룡족은 용족들의 지고의 보물이었다.
그리고 아포리아는 신룡족으로, 태어나자마자 신명을 받았다.
멸망의 신명을.
용족은 세계의 수호자이다.
그런 수호자 중에서 멸망의 신명을 타고났다.
아포리아는 모든 용족들의 기대와 걱정 속에서 태어났다.
아포리아는 천재였다.
그녀는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쳤다. 검을 하루 배우면 검의 달인들을 검술로 무너트렸다.
하나의 마법을 배우면 그에 파생되는 열 개의 마법을 부렸다.
그런 그녀의 단점은 단 하나.
그녀는 감정이 무뎠다.
아포리아라는 존재는 다른 모든 이들을 하찮게 여겼다. 자신의 부모도, 일족의 장로도, 일족의 왕도.
그리고 신마저도.
감정다운 감정을 갖게 한 것은 자신의 동생인 하메르 밖에 없다.
아포리아는 그렇게 살아왔다.
무료한 삶이었다.
깔아놓은 길을 그대로 걷고, 장로들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는 척을 하면서.
수호자로서 지닌 책임과 막대한 업무. 쥐꼬리만 한 권리를 누리면서.
용족이 짊어진 짐을, 그들의 왕이 되어 평화라는 따분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따분한 일상속에서 그녀의 안에 있던 무언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재밌는 것을 보고 싶지 않나?
아포리아는 그 속삭임에 넘어갔다. 아니, 넘어가 주었다. 그 속삭임에 따르면 제법 재밌는 광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호자라는 것들이 승천을 위해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하메르가 그것 때문에 위험에 처한 것도.
그래서 아포리아는 모조리 쳐죽였다. 장로의 머리를 으깼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얼굴을 뭉개고, 부하들을 반으로 갈라 죽였다.
그리고 아포리아는 세상을 멸망시켰다. 다만, 하메르만은 죽일 수 없었다. 용족의 아주 일부만을 남긴 채, 아포리아는 그 세상을 떠났다.
“……오랜만에 꿈을 꿨군.”
아포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둥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아른거린다.
자기의 손에 죽어나간 하메르가.
그리고 자신이 감정을 갈구하던 이시우가.
‘그건 뭐였지.’
이시우와의 전초전.
그것이 있었던 뒤로 그의 머리 위에 검은색의 왕관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기세가 약간 바뀌었다.
그리고 이시우를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기억들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정신공격은 아니다.
정숙한 처녀의 환상조차도 아포리아에게 범접하기 힘들다.
아포리아가 머리를 한번 터는 것으로 그녀의 환상을 깨부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생의 자각 같은 느낌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온갖 감정이 솟구쳤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고 익숙한 감정.
기억을 자각한 아포리아는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것은 내 것이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위해서 사랑을 속삭여야 한다.
그래서 이 세계에 넘어오기 전에 지켰었던 하메르의 목숨을 손수 끊어버렸다.
그래서 이 세계에 남아있는 자신의 일족을 멸망시켰다.
평범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그것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전생이라고 봐도 무방한가.’
그 후에, 이시우가 자신을 노려봤을 때. 아포리아는 그것에 흥분했다.
싸움이나, 그런 것을 떠나서, 이시우라는 존재가 자신을 기억했다.
일그러졌다.
어딘가 나사가 뭉텅이로 빠졌다. 그럼에도 아포리아는 그런 자신을 긍정했다.
그리고. 아무리 일그러진 관심이라도, 이시우라는 존재에게 자신이 기억된다는 것.
아포리아는 그것이 좋았다.
‘이거 위험한데.’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다른 세계의 아포리아의 기억일 뿐이다.
나는 오롯이 나로서 존재한다. 나는 너에게 조종당하지 않겠다.
아포리아는 그것으로 감정을 털어냈다.
다만, 아포리아는 하메르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이시우에 관해서 알 필요가 있었다.
핸드폰으로 이시우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봤다.
[중국이 눈치를 보고, 일본이 전전긍긍하며, 미국이 구애하는 인류의 희망이라 불리는 남자.]
[중국이 마수왕에게 엄청난 피해를 당하였을 때, 중국 1위 길드 천류의 길드장은 말했다. “이시우가 중국을 살렸다.”]
과연. 하메르의 냄새가 날만 했다. 하메르가 택한 남자일만했다.
묘하게 치솟는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아포리아는 다음 기사를 찾아봤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만 10명에 가까운 남자. 이대로 괜찮을까?]
ㄴ존나 괜찮음. 제발 좀 더 늘려서 나도 데려가 주면 좋겠다. 밥도 잘 하고, 빨래도 잘 하고, 침대 위에서도 잘 할 자신 있는데ㅎㅎ
ㄴ윗댓 조심해라. 이시우 빠돌이 팬클럽 얼마나 무서운지 모름?
ㄴㄹㅇ존나 무서움. 이시우 욕 한번 했다고 신상 다 털어버리던데. 근데 솔직히 다른 남자랑 결혼할 바에 이시우 30번째 부인에 들어가고 싶기는 함
-ㄹㅇㅋㅋ
기사에는 이시우랑 결혼할 여자‘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빠직.
아포리아는 마음을 다스렸다. 자신은 오롯하다. 과거의 잔재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핸드폰이라는 물건이 조금 낡아서 부서진 것 뿐이었다.
그렇다.
자신은 화나지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을 떠올리지도 않았고.
그 때 은밀한 마력이 그녀의 주변을 겉돌았다.
공간이 갈라진다. 그곳에서 검은색의 구체가 나타났다.
마왕.
그가 즐겨 쓰는 통신 방법이었다.
-아포리아. 어떻게 되었지.
마왕은 아포리아를 은근슬쩍 떠밀었다. 영국에서 한번 놀아보라고. 심심했던 아포리아는 그 제안을 따랐다.
“꽤 흥미로운 놈이었다. 네가 경계할만해.”
-혹시 놈에게 이상한 변화가 있지 않았나?
“변화?”
-그래. 예를 들어 중간부터 갑자기 이상한 힘을 쓴다든지.
아포리아는 검은색의 왕관을 떠올렸다. 그 후 이시우가 발휘한 힘을.
이시우가 발휘한 힘을 사용하자, 아포리아는 이시우를 반려라고 느꼈다.
그것은 유전자에 각인된 일종의 본능 같은 힘이었다.
“느꼈다. 그건 무슨 힘이지?”
-…….
아포리아의 말에 마왕은 잠시 침묵했다. 아니, 아포리아는 마왕에게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허탈함과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검은색의 구체는 다시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크흐. 크흐흐흐…….
마왕은 웃었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렇게까지 이시우를 붙잡아 두고 싶었나? 어처구니가 없군.
마왕은 절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왕은 생각했다. 어차피, 이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반쯤 실패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멸망에 가깝게 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나?
마왕은 이시우의 시체를 가지고 있다. 혼은 이 세계를 탈출하고 껍데기라서 그 힘은 거의 반감이 되었지만.
‘어차피 그건 더 이상 못쓴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포기한다.
마왕은 의식을 준비했다. 그는 시간의 축을 걷는 존재.
혹시 모를 위헙을 위해서 준비해둔 것이 있다.
‘평행세계의 힘을 너 혼자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나?’
시간축을 걷는 힘.
그것으로 마왕은 비슷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아포리아와 부딪친 시점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마왕과 싸운다면 자신이 질 확률이 높았다.
더군다나 그는 이시우의 시체를 흡수해서 그 힘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미 지나간 시간 축에서 모든 마왕의 힘을 이끌어내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