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오후였다.
햇빛은 따스했고, 기온은 적당했다. 적당한 바람이 불고 있는 한때였다.
그곳에서 이시우는 쇠사슬에 칭칭 묶여있는 채로 있었다.
“너는.”
그곳에서 아포리아는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여러가지가 담겨 있었다. 증오. 자신에 대한 혐오. 후회. 그리고 애정이 담겨 있었다.
“여전하구나. 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겠다는 신념도.”
“신념같이 거창한 것은 아닌데.”
이시우가 아포리아의 말에 멀겋게 웃었다.
“그렇다면 왜 넘어오지 않는 거지? 네놈들이 믿는 용족은 내 손에 멸망했다.”
아포리아가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굉장히 익숙한 뿔이 보였다. 하메르의 뿔.
어딘가 맛이 간듯한 눈으로, 아포리아가 나에게 말했다.
“요정족은 모조리 마수왕의 먹이가 되었지. 공허족? 그놈들도 벌레의 먹이가 된 지 오래다.”
아포리아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13익의 날개를 믿는가? 그들의 절반은 인류를 배신했고, 나머지는 죽음에 이르렀다.”
아포리아가 천천히 호흡했다.
“자, 이제 네놈이 그토록 믿던, 인간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근데 너는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승리.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패가 우리 쪽에 있는데 굳이 그쪽으로 넘어갈 이유는 없잖아?”
“핫. 헛소리군.”
"마왕이 왜 움직이고 있지 않은 이유를 가르쳐 줄까?"
“뭐지?”
“윤승하. 걔가 너희 다 합치고 마왕이 손을 써도 다 이길 놈이거든.”
“하. 고작…고작 그놈을 믿는다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아포리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네가 그토록 믿던 놈의 목을 가져오지. 그때가 된다면, 네놈도 포기할테니까."
"그렇다고 반려가 될 생각은 별로 없는데."
"너는 내꺼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메르가 아닌, 내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집착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나는 아포리아까지 공략한 건가. 나는 슬쩍 지식열람으로 이시우를 살폈다.
▼
이름 : 이시우
근력 : 31
민첩 : 65
체력 : 37
마력 : 40
고유능력 : 용의 반려(A+)
특성 : 발경·극(S), 엑셀(S), 축지(S), 여의신(A+), 신풍(A) 외 5개.
가히 극단적인 능력치. 그러나 특성을 보자마자 이해했다.
극단적인 속도로 상대에게 접근해서 한 방에 끝낸다. 나와 같은 단기 결전이었다.
내 쪽이 더 밸런스가 잡혀있고, 강한데다가, 뒤도 있다는 것만 빼면.
‘완전 하위호환이기는 한데.’
저정도만해도 거악들을 쓰러트릴 수 있을 텐데, 왜 진 거지?
초반부터 아포리아를 만난다는 극단적인 선택지가 없다면 저렇게 될 일은 없을 텐데.
나는 나를 안다. 저 정도면 아마 1학년이 끝나고 2학년 1학기 즈음일 거다. 난이도는 모르겠다.
창을 보다가 고유 능력에 눈이 갔다. A+등급으로 되어 있는, 용의 반려가.
……저거 용왕 하메르랑 이어져도 B+가 최고일 텐데.
시선이 획-하고 뒤바뀐다.
아포리아는 마치 원영신같이 혼으로 화한 존재에게 죽어가고 있었다.
정신.
세계의 의지.
세계 그 자체.
여러가지 수식어가 많지만, 확실한 것은 정신 상태의 윤승하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네가, 옳았구나.”
그것으로 아포리아의 장면이 끝났다.
***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시간은 짧았다. 유아독존이 보여주는 다른 차원의 세계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멈춰진 시간이 다시금 흘러간다. 그러나 아포리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뭐가 되었든 기회다.
나는 유아독존에서 용의 반려를 꺼냈다. 용의 반려는 아포리아가 지정한 힘.
원영신이 풀렸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는 바로 도약했다. 여명을 움켜쥐었다.
통로를 활짝 열었다. 공허가 와락 하고 솟아올랐다.
내가 도약하자 아포리아가 반응했다. 권능에 가까운 힘을 주먹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을 나에게 휘두르지 않았다. 이를 물고는 뒤로 물러났다.
“비염.”
회색의 불꽃이 타올랐다.
허무의 신염. 시공간을 무시하고 필중하는 불꽃이 아포리아를 태웠다. 그럼에도 공격은 없다.
용의 반려.
그것의 효과는 간단했다.
자신이 지정한 반려와 능력을 공유한다. 대신, 용은 반려를 공격할 수 없다.
내가 말하기에 뭣하지만, 용은 좀 흉포한 성격이다.
아직 관계를 맺은 용은 하메르 밖에 잘 모르지만, 의외로 당하는 것을 엄청 좋아하지만, 용은 대체로 흉폭하고, 반려를 거칠게 다룬다.
임신하기 힘든 용의 성격상, 아이의 존재는 필요했다.
종족적으로 용의 반려 효과가 진화하면서 용은 반려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용에게는 보통 상관 없는 일이다. 용은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다.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 나이만 먹어도 어지간한 상격은 때려눕힐 수 있을 정도가 되니까.
‘용의 반려의 등급이 높아서 다행이다.’
아포리아의 등급이 높아서, 이런 상황이 오게 된 것일 터.
시간은 주지 않는다. 상대는 묵시록의 붉은 용. 최강의 생명체다.
아포리아라면 제약을 풀고 나를 공격할 수 있을지도…….
공격을 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비염도 무언가 이상을 느꼈는지 공격을 멈췄다.
아포리아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눈이었다.
천의 가면으로 감정을 살폈다. 당혹스러움과 절망.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이 보였다.
용의 반려의 효과로 저런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설마, 저 저녀석. 내 기억을 읽은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그런 능력이 없다. 지식열람으로 한번 훑어봐도 그럴 기미가 보이는 특성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유아독존의 기억을 계승했거나, 엿봤다는 건데.
‘……용의 반려에 그런 능력이 있었나.’
고작 A+등급이 그런 능력이 있다고?
이건 나중에 하메르에게 물어봐야겠다.
아포리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우선 지금은 물러나지.”
“왜 그러지? 설마 도망치는 건가?”
도발적인 어조로 물었다. 도발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로 재수 없는 미소도 지었다.
“…….”
아포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포리아의 몸이 붉은빛의 섬광으로 화했다.
붉은색의 용으로 화한 아포리아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진짜로 도망친 건가?”
-……진짜로? 계, 계약자랑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헛소리를 하는 비염을 무시하며 나는 주저앉았다.
“뭐, 그래도 인명피해는 별로 없나.”
주변을 훑었다.
충격파의 여파로 무너진 건물들은 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아포리아가 깽판을 칠 수 있었지만,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니까.
나는 숨을 고르며 땅에 누웠다.
***
그 뒤로.
나는 영국에서 어마어마한 대접을 받았다. 영국 왕실에서 최고 손님으로 대접받으며 푹 쉰 다음, 기력을 회복할 겸, 영국에서 요리를 대접받았다.
-으악! 이, 이건 도대체 무슨 음식이야! 어떻게 민트초코를 빙수에다 얹을 생각을 하는 거지?
“……훌륭한 음식이군요.”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 영국에서 최고로 선정된 민트초코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소식에, 저희 요리사가 좋아했습니다.”
맛있는 디저트도 대접 받았다. 다만, 요리는 확실히 별로였다.
역시 최악의 요리로 악명높은 영국다웠다. 영국은 디저트의 나라로 바꾸는 게 맞았다.
“……진짜 취향 독특하네.”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윤채린이 말했다.
“그래? 나는 민트초코 좋아하는데.”
“수작 부리지 마라, 윤승하. 너 저번에 민트초코 먹다가 헛구역질한 거 내 머릿속에 있다.”
“헛소리는 너고.”
윤승하와 윤채린이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협회의 최고직인 김은정이 나에게 왔다.
“그래서 꼬맹이, 적은 놓친 건가?”
“네.”
김은정의 물음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꼬맹이, 너를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영국이란 나라가 멸망해도, 너 하나는 빼낼 생각으로 내가 왔으니까.”
김은정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사실 상대가 저한테 겁을 좀 먹었거든요.”
“그래. 그랬겠지.”
김은정이 포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아들이 허세를 부리고 그것을 믿어주는 엄마와 같은 말투였다.
……뭔가 기분이 묘한데.
“그럼 왕실과 일은 끝이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럴까?”
윤채린의 말에 나는 반색했다. 솔직히 말해서 민트초코는 맛있기는 한데 여기가 퍽 부담스러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과연 인류의 희망다우신 힘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저희 공주님을 뵈신 적이 있습니까? 영국이 자랑하는 공주님인데.
나랑 공주님을 이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주의 나이가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13살은 좀, 좀 많이 아니다. 최소한 7년 후라면 모를까.
‘그리고 애들이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슬쩍 윤승하와 윤채린의 눈치를 봤다.
“응, 왜? 헉, 설마 하고 싶은 거야? 은정 언니 보낼까?”
윤승하가 잠깐 당황스러워하다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최상격인 김은정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김은정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얼굴이 시뻘게졌다.
“큼, 큼. 미, 미, 미안하게 돼, 됐군. 그, 그러고 보니 너, 너희는 연인 사이였, 였지? 내가 당장 자리를……아니, 그, 그래도 여, 여기는 위험할 수 있으니, 안전한 하, 한국에서…….”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내 이미지가 점점 나락으로 가고 있었다.
윤승하와 윤채린을 슬쩍 보니 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더 늘릴 생각도 없기는 한데.’
지금도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갔는지 알아?”
“다른 애들? 애들은 다 아카데미에서 수업받고 있지. 뭐, 상격 이상인 애들은 수업에 어느 정도 빠지면서 자기 일 병행해도 괜찮아서 나랑 승하가 왔어.”
“수아는?”
“……수아는 마탑에 박혀 있더라.”
윤채린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수아랑 한판 뜨다가 거의 질뻔해서 저래. 신경 쓰지 마.”
“뭐? 채린이가?”
“야, 질뻔하기는 무슨! 내가 걔 너무 압도적으로 이기면, 우울해할까 봐, 손대중 해준 거거든?”
윤채린의 말에 윤승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그래. 그런 걸로 하자.”
“그른그으느르그흤드(그런거 아니라고 했다.).”
윤채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시우는 학교에 올 거야?”
“나?”
나는 잠깐 고민했다. 당장 이연아와 삼왕이 한 번에 덤비는 최강의 생명체와 1:1이 성립 가능한 내가 아카데미라.
“……내가 가면 다른 애들이 너무 불쌍해지지 않아?”
“그건 그래.”
“그래서 아카데미 측에서도 시우,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졸업할 수 있어. 근데 졸업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응, 왜?”
“학창시절에 데이트하면서 여러 군데 다니는 게 더 재밌잖아.”
“…….”
윤채린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윤채린이 히히-하고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