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공허(2)
* * *
‘뭐지.’
이것저것 뒤섞여서 만들어진 힘을 살폈다.
이 힘은 특이했다.
공허처럼 우주를 담은듯한 모양새.
번개나 불꽃의 속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압도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손을 펼쳤다. 구체가 떠올랐다.
검은색을 띠는 보라색. 마치 우주를 담은 듯이 이것저것 속성이 피어나는 구체가 떠올랐다.
공허(Void).
이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힘을 자랑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힘을 자랑하는 만큼 이 힘을 쓰는 인원은 없다고 봐도 좋다.
모든 속성의 상위에 있는 힘.
불이나 물같은 사대원소,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그림자나 번개 등 특별한 원소. 그리고 가장 특별하다가 일컬어지는 공간과 시간까지.
나는 지식열람으로 확인해봤다. 그러나 별 지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공허족도 이 힘은 잘 모를 텐데.’
공허에서 태어났기에 공허족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 힘은 그들조차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주변을 둘러봤다. 세계수의 목각인형이 보였다.
공허의 구체가 목각인형으로 날아갔고.
후우우웅!
그대로 목각인형을 삼키고 그 뒤에 벽까지 삼켜버렸다.
‘무엇이든 파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파괴라고 보기에는 모호했다.
파괴와 관련된 속성이 있는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더 있는 느낌이었다.
공허는.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평행차원의 이시우의 목소리.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힘이다. 개념이나, 현상마저도. 어쩌면 아야네가 가진 단절은…….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동시에 조용했던 지식열람이 반응했다. 공허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부작용 따위들이 머릿속에 솟았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가.’
나는 손을 바라봤다.
세계수가 가진 생명의 마나. 그것 덕분에 어지간한 것에 상처도 안 날 육체가 반응이 있었다.
손쪽 부분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이 저렸다. 세계수의 내부이건만 회복이 더디다.
‘구체를 날린 게 일월천뢰검보다 부담이 더 크다고?’
어처구니가 없지만, 파괴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생각보다 다루기가 까다롭다.
‘훈련이 필요한데.’
교류회 전까지 끝마칠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힘들 것 같았다.
그때 훈련장 밖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와.”
문을 열자 십삼월의 단주인, 금발의 엘프가 들어왔다.
“왕이시여. 손님들이 방문했습니다.”
“손님? 누군데.”
“공허족의 왕, 에니스와 용왕, 하메르 입니다.”
“그 둘이 왜?”
의아했지만, 반색했다. 공허의 왕, 에니스라면 뭐라도 알고 있을 테니까.
“일족의 배신자를 치기 위한 계획을 짜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오베론 때문인가…….”
거악을 조지기 위한 회의라. 내가 끼지 않을 수가 없다.
“단장, 회의실로 간다.”
“넵, 알겠습니다.”
십삼월의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와 회의실로 향하니, 묘한 인물들이 있었다. 둘 다 키는 2m가 넘어가는 묘령의 여인들.
공허족과 패룡단
그들은 우리가 다가가자 조용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께서 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열어라.”
여인이 문을 열자 시선들이 꽂혔다.
“요정왕인가? 뭐, 요정왕이라면 환영이지.”
“뭐야~ 요정왕이잖…….”
보랏빛의 눈동자가 생글거리다가, 경악으로 가득 찼다.
역시 공허족이라 한눈에 알아보는 건가.
“……너, 너, 뭐야!”
“수련을 하다 보니까 얻게 되었습니다.”
“수, 수련으로 공허를 얻을 수 있다고?”
어처구니없어하는 눈빛.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차분하게 나를 살폈다.
“세계수안에 있다면…그것도 요정왕의 신분이라면 위장할 수 없으니……너는 요정왕이 맞군.”
“근데 무슨 말이죠? 부군이 공허를 얻었다는 건?”
혼란스러워하는 세 사람을 보며 나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후우우웅!
주변의 모든것을 빨아들이며, 검은빛을 띠는 보라색의 구체가 손 위에 떠올랐다.
“……이건 공허가 맞네. 공허와는 좀 다른 성질을 띠고 있기는 한데, 그 근본은 공허에 있군.”
에니스가 말했다.
“어떻게 얻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게. 하지만 이거라면 거악 하나쯤은 확실히 죽일 수 있겠군.”
“공허가 그렇게 강한가?”
“…공허는 모든 것들의 연결점을 끊어버리는 힘이야. 그것이 생명이든 현상이든, 마법이든 말이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힘인가.”
“설마. 공허를 얕보지 마. 그 이상이야. 우리도 공허족이라 했지만, 공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 일족 전체가 1만 년 이상의 세월을 연구했지만…….”
흥미로운 눈으로 에니스가 나를 봤다.
“요정왕은 정말 흥미롭네. 그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낚아챌 걸 그랬나.”
“……부군은 요정왕이다.”
티타니아가 내 옆으로 와서 나를 보호하듯이 섰다.
“요정왕이 꼭 요정왕이라는 법도 없잖아~공허족의 왕으로도 괜찮은데. 어때? 네가 원하면 수억의 중국인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도 있어.”
“용왕은 어떤가? 그대가 원한다면 용혈을 구해줄 수도 있는데.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에니스와 하메르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유혹했다. 티타니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우, 우리도 요정족은! 우리도 해줄 수 있는 게 많다. 만에 달하는 종족이 우리의 왕이 되면 봉사를 해줄 수 있다!”
……나는 이미 요정왕인데.
나는 우선 당황하는 티타니아를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 내가 설마 이런 유혹에 넘어가겠어?”
“그대는 무조건 넘어간다.”
“…….”
티타니아가 확고하게 말했다.
나에 대한 인식.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무튼, 우리 요정왕이 원하는 건, 공허를 다루는 힘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족의 비기라는 것은 알지만, 우리 일족이 사례하겠다.”
“사례는 좀 끌리지만……요정왕이 거악을 치는데 큰 전력이니 필요 없어.”
에니스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다만, 공허는 우리에게도 미지의 존재야. 우리 존재가 공허족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나조차도 공허를 제대로 다루기에는 힘들거든.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 둘이 박혀서 수련해봐야 할 것 같은데.”
“……왜 하필 공허의 지역인가?”
“알잖아? 우리는 공허의 일족인걸.”
싱글싱글거리며 에니스가 웃었다.
“……허튼짓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음, 허튼짓을 하고 싶기는 한데, 그럼 우리 삼동맹이 위험해지니까, 내가 좀 참아볼게.”
에니스가 내 팔을 잡고는 히죽웃으며 티타니아를 봤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
일주일이 지나고 난 뒤, 나는 가볍게 몸을 점검했다.
에니스에게 가서 상담한 보람이 있었다.
‘생각보다 성취가 컸다.’
“자기~준비 다 됐어?”
“……그렇게 부르면 티타니아가 싫어할걸.”
“뭐, 어때.”
에니스가 키득거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와 에니스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에니스는 공허의 힘을 탐구하는 데에 대부분 힘을 할애했고, 나는 수련만 미친 듯이 했으니까.
“근데 생각이랑 정말 다르네. 난 언제 덮쳐질 줄 알았는데.”
“…….”
“뭐, 그럼 워프 게이트로 가 볼까.”
나와 에니스.
그리고 에니스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우리는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워프 게이트에는 낯선 인물들이,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 원.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현상조작이라는 이능을 가진 이가 우리를 반겼다.
“환영합니다. 인류 최후의 보루인 삼왕의 일각.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어린 영웅.”
더 원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헤에, 네가 마중을 나올 줄 몰랐는데.”
“네, 저 남자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미안하지만, 저 남자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
“하하, 이거 차여버렸군요. 하지만 저도 여자친구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더 원이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훑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어린 영웅은 뭔가요.”
“음? 제가 한국어를 잘못 배웠나요?”
더 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통역사로 보이는 이가 더 원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 말을 조금 잘못 했군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것 같네요. 이시우씨는 그 사이에 더 강해지셨으니까.”
“네, 자그마한 성취가 있었습니다.”
“그게 자그마한 성취면 대부분의 영웅들이나 마인들은 혀를 깨물고 죽어야 될걸.”
에니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동양은 겸손이 미덕이라고 배웠지만, 그것이 너무 심하면 남을 기만하는 법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마세요. 그럼 슬슬 미국으로 가볼까요?”
“네, 가죠.”
“아, 이시우 씨. 가게 되면 너무 놀라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놀라다뇨?”
“음, 교류회를 열면서 이시우 씨가 미국에 온다는 소식이 바깥으로 퍼졌거든요. 당신의 굉장히 많은 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팬……이요?”
팬이 그렇게 많나.
“네, 협회에서 찍은 괴수 토벌전에서 이시우 씨가 활약한 게 퍼져서요. 그리고 마스크가 좋잖아요?”
“그리고 저기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불리는 애가 불을 지폈지. 인류의 미래가 그곳에 있었다. 였나?”
“하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워프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순간 귀가 먹을듯한 소음이 주변을 강타했다.
고막을 뒤흔드는 함성과 사방에서 퍼지는 비명.
“우와,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인기 많아서 좋겠다.”
“이거 다 에니스의 인기야.”
“두 분 다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 군요. 그보다 손 한 번 흔들어주실 수 있나요? 여기까지 당신을 보러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찢을듯한 함성이 점점 더 커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