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화 〉 고속 등반(2)
* * *
탑의 세계는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탑을 지배하려는 마에 대적하는 세력은 크게 세 군데다.
제국, 마법왕국, 요정족이나 이종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등.
제국이라 불릴 만한 곳은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고급 병기인 기사나 마법사만이 대부분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제국의 기사나 마법사를 제외하면 제국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식량은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다.
요정족이 자랑하는 자연 마법에는 식량을 단숨에 보급할 수 있는 마법들이 여러가지 있으니까.
마법왕국도 사정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왕국이라고 해봤자, 그 수는 고작 1,000여 명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최고 전력은 나랑 엇비슷하지.’
현재 제약당한 상태에서도 마법왕국의 최고 마법사랑 해볼 만하다. 마도황제를 발동한 상태라는 가정이 붙기는 하지만.
이걸 왜 지금 말하느냐면.
“다들 훈련을 할 때는 실전처럼 하도록! 지금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 피 한방울이 될 수 있다!”
“거기, 한남훈! 집중력이 떨어진다! 자세는 올곧게!”
“유리코! 당장 일어나라! 그렇게 쓰러지면 마물들의 먹이가 될 뿐이다!”
등반을 너무 빠르게 해서 그렇다.
마인과의 조우 이후, 이시우 일행은 빠르게 4층까지 클리어했고, 이제 곧 마의 부대와 전면전이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능력치가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은 저렇게 훈련을 하고 있다.
“팔자 좋네요.”
이연아가 지친 얼굴로 이시우 옆에 앉으며 말했다.
“마법사나 신관은 자기 몸만 지키면 되니까.”
“도대체 어떤 마법사나 신관이 중상급 마인이랑 일대일로 무투로만 싸워서 이길 수 있어요?”
어처구니 없어 하는 이연아. 이시우는 피식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좀 대단하거든.”
“…….”
이연아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너도 자기 실력의 어느 정도는 숨기는 게 좋아. 항상 적이 마인이라는 법은 없거든.”
의미심장한 말. 그러나 이연아는 말없이 긍정했다.
피해망상일수도 있지만, 가끔씩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자신을 훑어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근데 제가 말 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말할 수 있잖아요.”
“저들이 그걸 믿어 줄까.”
이연아는 이시우의 말에 긍정했다.
이시우의 마법실력은 그의 무예를 제외하더라도 무조건 넣어야 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 마도왕국의 마도왕녀라 불리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패배시켰으니까.
‘그것도 전력이 아닌 것 같던데.’
도대체 무슨 실력을 저렇게 숨기는 걸까. 실력뿐만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한둘이 아니다.
요정족의 족장은 이시우를 볼 때마다 극진한 존칭을 한다. 제국의 황제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들이, 유독 이시우에게만은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인다.
꽉 막힌 기사단장이 그가 이렇게 편히 쉬는 것을 내버려 두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기사단장은 다만 이시우라는 남자가 잔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만 할 뿐.
“왕이시여.”
어느새 다가온 요정족의 족장이 공손한 자세로 이시우에게 왔다.
“뭐지?”
“그게……튜토리얼 구간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뭐?”
얼굴이 굳어졌다. 이연아의 말에 따르면 30명이라는 인원은 죽기는 했지만, 추가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레귤러인가.’
혹은 이연아도 모르는, 어떤 존재인가.
확인해봐야 했다. 이시우는 몸을 일으켰다.
“튜토리얼 회장에는 못 들어가지?”
“예, 그곳은 여신이 안배한 장소이기에, 저희가 뚫을 수 없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이시우의 망막에 홀로그램이 비춰졌다.
[튜토리얼 수련관으로 입장할 수 있는 찬스! 수련관 입장권이 단돈 500p만 내면 살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일주일 동안 모든 능력이 향상하는 성장 포션까지 추가 찬스!]
라는 싸구려 광고가.
이시우는 잠깐 생각했다. 수련의 탑의 여신이라는 존재는, 유독 수상쩍다. 유독 자신에게만 호의를 보인다든가 했다. 샤오메이나 아야네는 안 그런데.
‘샤오메이나 아야네는 제약 해제 비약도 없었으니까.’
빛의 신께서는 유독 용사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엘도르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곳의 여신은 빛의 신과 연관이 있는 존재이거나, 빛의 신일지도 모른다.
“일단 갔다 와볼게.”
500p를 지급한다고 생각하니, 허공에서 티켓 한 장이 나타났다. 이시우는 그것을 찢었다. 빛이 점멸했다.
***
거대한 운동장이 있고, 낡은 고성이 있는 장소.
나는 튜토리얼로 돌아왔다. 경비병들만 있는 공간.
“이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용사님.”
“손님을 맞이하려고요.”
“아, 그분 때문에.”
경비병이 환한 표정으로 나를 안내했다.
동시에.
나는 눈으로 안쪽을 훑었다. 굉장히 익숙한 마력의 파장이 눈에 보였다.
평소라면 숨기고 있어서, 눈 앞에 보여야 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보이지 말아야 했을 얼굴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길쭉한 다리를 자랑하며, 책상에 걸터앉은 이연아가 보였다.
“어머.”
입모양으로 놀란 척을 하며.
눈은 재밌다는 듯이 반달로 휘어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리고 한순간에.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그녀는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느냐는 표정이네요.”
“……어떻게 왔지?”
“음, 이제 막 남편이 될 사람이 걱정돼서. 라기보다는 다른 여자에게 손을 뻗지 않을까 해서요. 원래 연인이 잘나면 애인은 안절부절못하거든요. 막 이래~.”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이연아가 말했다.
“헉, 혹시 저를 먹고 버리실 생각이었나요?”
이연아가 눈을 싱글거리면서 몸을 뒤로 살짝 뺐다.
“아니, 설마.”
이연아를 먹고 버리기에는 너무 무섭다. 무력 하나만으로 삼왕과 동급인 이연아인데.
계산적으로 따지면 이연아는 반드시 품고 가야 하는 존재이고, 감정적으로 따져도 솔직히 말해서 그녀와 헤어지긴 싫었다.
슬쩍하고 이연아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연아가 내 팔짱을 끼며 머리를 어깨에 기대었다.
“아직 작은 연아 안 건드렸죠?”
“……어떻게 건드려.”
“흐음.”
이연아의 눈이 나를 직시했다. 마치 내 의중을 들여다보겠다는 듯이.
“딱히 뭐라 하려는 건 아니에요. 할거면 확실하게 해요.”
툭던지듯이 이연아가 말했다.
“그것보다 엄청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그것에 관해 이야기 할까요?”
“어떤거?”
나는 이연아를 쳐다봤다. 이연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려는 듯, 내 귀에 입을 가져갔다.
“저희 간단하게 내기하실래요?”
“내기?”
“사실……저 그쪽이 탑에 있는 동안 엄청 쌓였는데, 그걸 좀 풀고 싶은데.”
얼굴을 바라보니, 어느새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이연아가 말했다.
“어차피 탑 등반 하실 거잖아요. 어차피 여기 탑에서 마왕이라 불리는 허접쓰레기 말고는 질투의 뱀이 문제죠? 질투의 뱀은 제가 상대할 테니까, 시우 씨가 원하는 애들 제가 다 잡아주는 거 어때요?”
“내기는 어떤 걸로?”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로 해요.”
이연아의 눈이 휘어졌다.
나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서 참았다. 억지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연아를 바라봤다.
▼
이름 : 이시우
근력 : 24(48)
민첩 : 24(48)
체력 : 20(48)
마력 : 30(48)
비록 지금은 능력치를 제약당해서, 체력이 20밖에 안되지만, 이연아를 쓰러트리는 데에는 체력 15면 충분하다.
이연아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첫 경험에서 내가 심하게 대했으니, 자기도 여기에서 복수하겠다고.
‘…는 너무 심한 생각인가.’
나는 이연아를 바라봤다.
작은 연아와는 다르게 큰 연아는 감정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일 테지.
뭐,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성쪽의 일이라면 굉장히 자신 있으니까.
“좋아.”
“승낙하신 거죠?”
이연아는 다만 웃고 있었다.
***
엘도르의 하루는 간단하다.
오전 3시. 일어나서 목욕하여, 신체를 깨끗이 하고는, 여신에게 기도를 드릴 준비를 한다. 그 과정에서 용사, 이시우의 사진을 여신상 옆에 둔다.
그리고 기도.
4시부터 시작된 기도는 6시에 끝난다. 그러나 오늘의 기도는 조금 달랐다.
여신상이 성스러운 빛을 내뿜으면서 신전을 빛으로 채웠다.
나의 딸이여. 수련의 탑으로 향하세요.
아름다운 미성이 엘도르의 머릿속에 박혔다.
여신의 신탁이다.
비록, 성벽이 조금 이상하지만. 그것을 자기 딸에게 언급할 정도로 조금, 아니, 매우 이상했지만.
엘도르라는 인물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엘도르는 바로 신전을 나와서, 자신의 물건을 챙겼다. 빛으로 벼린 성검과 갑옷. 그리고 이시우의 사진을 품속에 넣었다.
절제의 검이라 불리는 무장을 완성하고, 엘도르는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