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이시우(11)
* * *
뭔 소리지.
순간 머리가 굳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항복하겠다는 건가.
저 정숙한 처녀가?
“무슨 허튼수작을.”
노기어린 목소리.
티타니아가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정숙한 처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내 팔에 슬쩍 팔짱을 끼면서 우아하게 걸었다.
“네놈들 거악이 쓸 하찮은 수단조차도 되지 못한다. 네놈들이 인간에게 몸을 의탁한다? 세 살배기 어린애도 믿지 않을 말이지.”
“목줄! 목줄을 씌우던가! 네놈들이 잘하는 짓이잖아!”
“……처음 듣는 말이다.”
티타니아가 나를 힐끔잠깐 보고는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맹약이라던가 마기나 마나를 담보로 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격을 갖추면, 빠져나갈 구석이 생긴다.
티타니아나 거악쯤 된다면 시간만 있다면 바로 탈출할 수 있다.
“곤란하군. 포로로서 들어오면 포로의 대우를 해주고 싶어도, 거악이지 않은가? 말살해야 한다.”
“살고 싶어요!”
“하지만 거악이다. 일단 죽이고 시작하자. 부군?”
나는 정숙한 처녀를 보았다.
그녀를 살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기 보다는 정숙한 처녀의 행동이 걸렸다.
나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내 머리 위에 있는 왕관─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두려워하는 모양세.
“……너, 이거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
정숙한 처녀가 입을 다물었다.
“이걸 알려주면 살려줄 생각도 있다.”
“……진짜인가?”
아니, 거짓말.
“……부군, 거악 정도쯤 되면, 힘이 제약되어 있다고 해도 진실과 거짓은 구분할 수 있다.”
“그런가.”
……그런 건가.
아쉬워졌다.
나는 잠깐 정숙한 처녀를 봤다.
살려달라고 한 이유. 그것보다는 나는 무언가 더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다른 기능이 있는 건가.’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도 나는 굉장히 만족스럽다.
온갖 정신능력에 면역이며, 급할 때는 여벌의 목숨 하나가 있는 셈인데다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면 평행세계에 있는 다른 ‘나’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지아를 봤을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스친, 광경이 떠올랐다. 아마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도 그런 장면을 보일 수도 있다.
“다, 다른 거악들과는 모, 모를 거야! 영원한…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지?”
영원한?
“그 말은 영원을 꿈꾸는 자가 이 왕관을 쓴다는 거야?”
“아니. 그 존재는 그런 걸 쓰지 않아. 영원을 꿈꾸는 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그 존재가 쓸 수 있다고 해도, 그는 거부할 거야.”
정숙한 처녀가 두려움의 떠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정숙한 처녀를 바라봤다. 정숙한 처녀의 말이 거짓이라도 그녀는 너무 나한테 술술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영원의 꿈.”
“영원의 꿈?”
“내, 내 힘의 근원이 되는……악! 악! 더 이상 말 안 해! 더 듣고 싶으면 살려줘!”
정숙한 처녀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티타니아를 잠시 보니 티타니아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건 이용할 수 있겠다는 능구렁이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태의 반응도 이상했었지.’
나한테서 냄새가 짙게 난다고 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꿈과 관련이 있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정숙한 처녀의 힘의 근간인 영원한 꿈.
‘설마.’
가면의 마수가 말했던 사도냐는 소리가 머리를 스쳤다.
“봉인에서 어떻게 풀려났지?”
“……빨간 머리하고 해골이 풀어줬어.”
빨간머리면 혈마일테고. 해골이라면 아마도 혈마가 대가를 지불하고 검마를 되살린 것이겠지.
“지금 남아 있는 거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오만한 용이에 대해서는 몰라. 걔는 워낙에 폐쇄적이거든. 무신은 지금 자신의 힘을 어떤곳에 집결시키고 있어. 질투의 뱀은 모종의 이유로 보이지 않고, 전대 요정왕…폭식은 무신하고 같이 무언갈 하고 있는 것 같아.”
“혹시 질투의 뱀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에 연락이 끊긴 지 어딘지 알아?”
“……거악들은 보통 서로에게 관심이 없지만…마지막이 알레스카 쪽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
질투의 뱀.
레비아탄은 역시 그 ‘탑’에 있는게 틀림없다.
마수왕보다 더 큰 그놈이 어떻게 들어갔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탑은 하나의 세계와 연결되는 곳이니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탑에 들어가 봐야 되나.’
나는 잠깐 망설여졌다.
이연아의 행동으로 유추해보면 이연아가 귀환하기 전에 그 탑에서 한 세계를 끝장내버린 게 분명하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그 탑에서 내가 과거로 향했고, 거기에 질투의 뱀도 있다라.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그래도 나름 해볼 만할지도 모른다. 탑에 들어가는 순간 초월적인 힘으로 모든 능력이 리셋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유아독존이 있으니까. 차라리 빠르게 들어가서 레비아탄을 죽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데.
‘우선.’
나는 아쉬운 눈으로 정숙의 처녀를 봤다.
‘아쉽네.’
정숙한 처녀 정도면 괜찮은 상대일 줄 알았는데.
그래도. 미묘한 껄끄러움은 있었다. 어쨌든 간에 외견은 12살짜리 소녀이기에.
“일단은…….”
정숙한 처녀를 처리해야 된다. 그러나 죽이기에는 아깝다. 만약 사고를 친다면 어마어마한 사고를 치겠지만, 내가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안되면 죽이고.
나는 티타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티타니아도 나를 바라봤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티타니아, 잘 부탁해.”
그리고 티타니아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제, 제가요?”
“……여기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게 티타니아니까.”
“…….”
티타니아가 조금 고민했다. 어쩔 수 없다. 비장의 무기를 쓸 수밖에.
나는 무릎을 조금 굽히고는 티타니아와 눈을 마주쳤다. 아주 조금 낮게. 그리고 살짝 젖은 눈망울로 티타니아를 봤다.
“……누나, 부탁할게요. 누나밖에 없어요.”
“물론이지!”
쉽네.
***
임가를 표현하는 문장은 단 한 줄로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재계 1위.
저것은 절대 범상치가 않다. 현재의 통일 한국이 가진 국력은 정말 어마 무시 하니까.
공허족이 만든 ‘억’ 단위에 달하는 스켈레톤 노동자 집단을 위시한 중국.
다민족국가로, 용종뿐만 아니라 여러개의 종족과 융화되었으며, 수상할 정도로 마정석같은 천연마나자원이 넘쳐나는 미국.
그리고 던전과 몬스터, 탑이 쏟아지면서 멸망한 북한을 흡수한, 수상할정도로 ‘영웅’을 많이 배출하며 외국으로 파견 형태를 보내는 통일 한국.
한국은 영웅이 많이 나타난다.
이게 내 나라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많다.
최상격 중에서도 최강이라 칭해지는 멸망의 번개, 김은정이 있으며, 현재 회귀자와 13명의 동료를 제외하면 초월경에 든 유일한 인간인 이연아를 보유하고 있다.
마수왕 토벌전에 참전한 광성자나 천추는 물론이며 후방을 맡은 무색도 10위권 안에 들어간다.
덕분에 현재 한국의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문자 그대로 일본이 벌벌 떨고, 중국이 눈치를 보며 미국이 구애하는 한국에서 재계 1위.
‘좀 두려운데.’
가장 먼저 임나연의 부모님을 뵙기로 했다.
고개를 돌려서 한 건물을 바라봤다. 총 20층에 달하는 건물. 층단위로 높이만 10m가 넘으며 바깥에서는 볼 수 없는 유리에다가 안쪽에는 온갖 편의시설이 넘친다.
속된말로 돈을 건물에 발랐다는 느낌을 주는 건물.
나는 내가 들고 온 가방을 떠올렸다. 마수왕의 시체에서 빼 온 이빨과 손톱. 약간의 가죽을 넣은 가방.
혼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악하지만, 그래도 값이 비싸서 이거라도 가져왔다.
“시우야!”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나연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이제는 완연하게 바뀐 밝은 푸른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보였다.
시스루 드레스에 목에 찬 검은색의 초커. 순백의 치마.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했다. 임나연의 뒤에서 중후한 모습의 중년인과 집사복을 입은 최유나가 보였다.
“자네가 이시우 군인가.”
중후한 목소리였다.
“이분은?”
“아, 우리 아빠셔.”
“안녕하세요, 이시우입니다.”
“그래, 딸에게 많이 들었네. 그리고 협회나 스카우트들에게도 많이 들었지. 나는 임진석이라 하네.”
임진석은 조용히 나를 위아래로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괜찮다는 건가?
“그런데 시우야 그거 뭐야?”
“이건…….”
뭐라고 해야 될까. 혼수 선물? 그냥 선물로 가져오기에는 너무 비싸고, 혼수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악한데.
“음. 여기서 이야기 하는 건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온갖 시선이 꽂혔다. 대충 느껴지는 시선은 쟤는 뭔데 임나연이랑 임나연의 아버지랑 같이 있는 걸까하는 시선.
“마스크나 선글라스는 안 답답하나?”
“예. 거기다가 제가 요즘 좀 많이 유명해져서.”
“흠. 그럴수도 있지.”
그렇게 잡담을 하며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엘레베이터에 들어서자 최유나가 20층을 눌렀다.
띵순식간에 엘레베이터가 20층에 도착했고,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온갖 미술품이나 마력이 서린 물건들이 전시된 복도를 지나서 안쪽으로 드러섰다.
회의실.
로 보이는 곳은 굉장히 거대했다. 100m 넓이의 중앙에는 거대한 탁자가 있었는데, 임진석이 그곳에 앉았다.
“편히 앉게.”
나는 반대쪽에 앉았다. 임나연이 내 옆에 앉았고, 뒤에 최유나가 서 있었다.
“자네가 내 딸하고 교제 중이라는 말을 들었네.”
갑자기 분위기가 조금 서늘해졌다. 임진석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아, 먼저 이것 먼저 받아주십시오.”
“흐음, 그렇군.”
내 선물 가방에 임진석이 잠깐 가방을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관심없다는 눈으로.
“근데 선물 뭘로 가져왔어?”
“마수왕의 가죽하고, 이빨 조금 가져왔어.”
“……자네, 내 딸을 울리지 않을 자신이 있나?”
“네, 나연이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겠습니다.”
“음……좋네. 서로 좋다는 걸 어쩔 수 없지. 그럼 약혼식은 언제 잡을 텐가.”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