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이시우(10)
* * *
후룩.
티타니아는 우아하게 홍차를 마셨다. 그녀는 힐끔눈으로 앞을 보았다.
보랏빛의 눈동자를 가진, 장난기 가득한 미소의 소녀와 불과 같은 성정을 지닌 붉은색의 여인이 있었다.
공허의 왕, 에니스.
용왕, 하메르.
“그래서 진짜로 왕이 된 거야?”
하메르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에 티타니아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물론이지요. 맹약을 깼다고 판단되어서 저희가 개입할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요정왕은…….”
하메르가 말끝을 흐렸다. 서로 동맹을 구축할 만큼 신뢰를 쌓은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물론 동맹이니만큼 서로에게 어느정도 숨기는 것이 있을 거다. 그러나 하메르와 에니스는 알고 있다.
요정왕은 지금 탄생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됐을까.’
에니스는 그게 궁금했다. 공허족. 공허에서 자란 일족은 지식을 탐한다.
세계수가 정순한 곳에서 100년의 정기를 모아 선정한다. 그게 바로 요정왕. 그러나 세계수는 근래에 마왕에게 당한 상처로 스스로를 치유할 힘이 없었다.
‘무슨 정순한 힘을 얻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것도 주기적으로.
“사실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가 그를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한 껏 여유롭게 말하는 티타니아.
그런 티타니아를 보며 하메르와 에니스가 눈을 찌푸렸다.
물론 경사적인 일이다. 이시우가 요정왕이 되면서, 요정족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당장 티타니아만해도 세계수가 마왕에게 당한 상처를 많이 회복해서 전성기의 무력을 갖춰가고 있으니까.
다만, 그녀들은 티타니아의 저 여유로운 미소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것도 굉장히.
“그럼 티타니아는 당연히 부부끼리 하는 관계도 원만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에니스가 말했다. 에니스는 이런 대답을 원했다.
‘무, 물론이죠. 제, 제, 제 남편이란 제 관계는 원만하다고요.’라거나 혹은 ‘히끅무, 물론이죠.’라면서 당황하는 얼굴을.
그러나 티타니아의 반응은 에니스의 예상을 웃돌았다.
“예, 관계는 원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어두운 얼굴로 티타니아가 말했다.
“다만, 저번에 관계를 처음 맺었을 때 말이죠. 그 때 이후로 그가 저를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얼마나 쥐어짠 거야?! 이시우는 인간족이라고! 요정왕을 복상사로 죽일려고 한 거야?”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티타니아의 심상찮은 말에 에니스는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얼마 하지 않았습니다.”
“흥, 어차피 수컷이란 1~2번 찍 싸면 끝이잖아.”
“아니던데.”
하메르의 말에 티타니아는 자연스러운 척을 하며 말했다. 묘하게 발끈한 목소리.
“비록 나흘째의 일이지만, 제 부군은 50번 이상 되던데.”
“……뭐?”
어처구니없는 숫자에 에니스는 되물었다.
“흥, 실로 주책이 없다. 수컷이 그리 강했더라면 우리 용족은 이미 개체가 천 마리를 훌쩍 넘겼을 테니까.”
“맞아맞아~마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마나를 받아들인 수컷은 대부분 강해지는데, 정력만은 강해지지 않잖아? 회귀자인 그 놈도 정력은 고강했지만, 결국 다섯이 한계였지.”
에니스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그란데힐의 홍차를 타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향기가 맡아졌다. 티타니아의 홍차에서.
신하가 자신의 왕을 각별하게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에니스도 평소라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향기는 뭔가 이상했다. 마치 사람을 홀리는 듯한 이 향기는 대체……?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네만.”
하메르가 조용히 티타니아의 홍차에 눈을 돌리며 말했다.
“홍차에 무엇을 넣은 거지?”
“홍차에?”
티타니아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흠칫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회복을 위해서 이시우의 정액을 아주 조금 넣었다고는.
“그건…….”
입을 열려는 찰나.
그녀의 앞에서 잎사귀가 생겨났다.
요정왕이 보내는 신호였다.
모든 요정족들을 모집하는.
“부군에게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이만.”
티타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잎사귀를 잡았다.
***
정숙한 처녀는 싸움에 약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숙한 처녀는 싸움을 잘하지 못한다.
그녀는 거악에 이름에 걸맞은 힘과 마력,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근력.
마수왕만큼은 아니나, 그녀는 어지간한 존재들은 악력을 쥐는 것으로도 터트릴 수 있다.
민첩은 어떤가? 이시우도 뇌혼을 발동시키지 않는 한,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력은 비교할 것도 없다. 그저 마력을 방사하는 것으로도 그녀는 대부분의 존재와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권능.
고유 능력을 끊임없이 키우면서 그녀는 환상에 절대적인 지배 한다.
마수왕이 수만의 달하는 마수를 일시 분란하게 지휘하거나, 나태가 손짓 한 번으로 일본의 현 하나를 완전히 지구상에서 지워버린 것처럼.
‘정숙한 처녀의 능력은 환상…….’
정숙한 처녀의 환상은 상격인 이들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주제에 범위는 또 더럽게 넓다. 작정하고 환상을 뿌린다면 서울시를 혼자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까다롭지.’
정숙의 처녀가 보여주는 환상은 중독적이라서 사람들이 스스로 빠져나기 힘들다.
권력을 탐하는 이에게 자신이 권력의 정점이 되는 환상을 보여주고, 색을 밝히는 이에게는 자신이 본 가장 매력적인 이성들이 나오는 환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숙의 처녀가 정기를 먹고, 25세가 넘는 모습을 유지하는 순간.
그녀의 기량은 절정에 달한다.
정숙한 처녀의 환상은 현실을 침식한다.
그 상태에서는 환상이 물리력을 띄게 되지만.
‘유아독존에는 소용이 없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아독존의 소유자에게는 그녀의 환상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숙한 처녀는 다른 거악과는 다르게.
‘나 혼자서도 해볼 만 해.’
이시우가 갖춘 모든 능력은 정숙한 처녀의 능력을 카운터 친다.
꿈꾸는 요정의 화원.
이곳은 일종의 결계 같은 장소이다. 세계수가 존재하며 모든 사특한 힘을 멸한다.
그렇기에 정숙한 처녀가 가진 마기도 이곳에서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어, 어떻게 요정족의 왕이? 그건 다시 생겨날 수 없을 텐데…….”
멍하니 중얼거리는 정숙한 처녀. 이시우는 조용히 샛별의 영광을 움켜쥐었다.
웅웅.
샛별의 영광이 별의 마력을 뿜어낸다. 사특한 것을 멸하는 힘.
그러나 검이 아쉬웠다. 아카데미에서 지급하는 평범한 검.
우웅!
공간이 일그러진다. 동시에 수많은 요정족들이 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요정왕 님! 요정왕 님의 2등 신하 카니에가 도착했습니다!”
“2등은 뭐야? 그란데힐 때문에 2등이라 하는 거야?”
“어처구니없군. 저렇게 경거망동한 어투로 왕의 신하를 자처하다니.”
이시우의 뒤로, 요정족들이 도열했다.
그 숫자는 무려 기백. 하나하나가 내뿜는 마나는 반절 이상이 중격 이상.
요정족이 자랑하는 무력대, 십삼 월을 주축으로 그들을 보좌하기 위한 요정족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지금 사계四? 구축을 위한 십이월 전원 참석했습니다.”
“왕의 친위대인 십삼월 전원 도착.”
세계수의 나뭇잎이 새겨진 로브를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 수는 약 15명. 그러나 숫자가 적다고 해서 방심할 수 없다.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를 모집해서 ‘거악’을 상대하기 만들어진 집단이다.
내 옆에서 기다란 금발을 흩날리며 명정한 푸른색의 눈을 가진 요정이 섰다.
날카로운 귀. 흔히 말하는 하이 엘프에 속하는 십삼 월의 단장.
“왕이시여, 명령을.”
그녀가 내가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시끄러운 위선자 새끼들이……!”
정숙한 처녀는 으르렁거리면서 마기를 방출했다. 심연과도 같이 진득한 마기가 그녀의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겁을 먹는 요정족은 없었다.
오히려 요정족들은 이시우 주변으로 뭉쳤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라도 왕을 지키겠다는 모습.
이시우는 조용히 손을 들고는 명했다.
“나서지 마라.”
“네?”
이시우는 생각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열 두 살. 그리고 대부분의 능력을 봉인된 거악.
그러나 능력이 대부분 봉인되었다 하더라도 거악은 거악이다.
요정족들이 그녀의 환상에 먹히는 순간 전력을 잃을 수 있다는 거다.
“놈은 나 혼자 친다.”
우웅─!
검은색의 왕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시우의 머릿속으로 수 없이 많은 화면이 재생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화면에 집중했다.
‘역시.’
한 화면에 보이는 것이 있다. 천마 윤채린 대신해서 천마의 복장을 하고 있던 이시우가.
아마도.
저 세계에는 윤채린이 없었겠지. 그래서 천마트리를 탄 것일 거다.
이시우가 그 화면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정숙한 처녀가 몸을 움직였다. 요정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도 전.
정숙한 처녀의 머리는 땅에 닿아 있었다.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