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이시우(4)
* * *
조금 모잘라. 하나, 여기서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면 너는.
혁월이 무언가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혁월의 상태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에서는 무언가 시꺼먼 게 나오고 있었다.
‘보이드.’
공허(Void).
칠색을 극한으로 단련해야 겨우 쓸 수 있는 궁극의 이능.
파괴력 하나만을 따진다면 모든 고유 능력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기 그지없는 고유 능력이다.
……어떻게 저것을 쓴 거지? 나는 심장이 뽑힌 채 죽어있는 이시우를 바라봤다.
‘지식 열람.’
지식 열람으로 봐도 이시우의 상태창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볼 수 없는 건가.
되돌리고 싶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보다도 간절한 목소리로. 목소리가 퍼져 나가면서, 한 장면이 유리조각처럼 비산한다.
직후,
무언가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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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시우
근력 : 43
민첩 : 44
체력 : 43
마력 : 49
고유능력 : 천상천하 유아독존(Ex)
특성 : 지식 열람(S+), 천수(S+), 천의 가면(S+), 하늘을 굽어보는 눈(S), 불가해한 감각(S), 오버로드(S), 태극지체(S), 변강쇠(A+), 성검의 주인(A), 견습 신관(B), ■■(E)
마력이 급격하게 올랐다. 그리고 특성 아래에 자리 잡은 하나의 특성. 나는 손을 폈다. 몸속에서 어떤 힘이 자라난 것을 깨달았다.
문득 지식열람으로 저 특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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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어떤 시간 선에서 실패한 남자가 남긴 파편. 아직은 미약한 파편의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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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야?”
이지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 아, 미안해. 우리 지아가 너무 예뻐서 순간 넋을 놨네.”
“진짜?”
이지아가 환하게 웃었다.
아마 눈치가 빠른 이지아라면 내가 딴생각을 했단 것을 눈치를 챘겠지만 내 칭찬에 마냥 좋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어디 갈까?”
“움…와플 먹으러 갈래?”
그렇게 말하면서 이지아가 내 팔에 달라붙었다. 헤헤웃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가슴 부분이 팔을 감쌌다.
“와플? 그럴까. 근데 배고프지 않아? 차라리 지금 밥 먹을래?”
“밥?”
“응, 요 근처에 파스타 맛있게 하는데 알고 있거든. 거기 갈까?”
“그럴까? 아, 그러고 보니 괜찮아? 마수왕 토벌전에서 얼굴 좀 많이 팔렸던데.”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이지아랑 오랜만에 데이트 기간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고 싶지 않고.
“……음, 호텔 잡고 거기서 놀까?”
“그럼 우리 호텔로 갈까? 아니면…….”
이지아가 말하다가 망설였다. 아무래도 내 집에 오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그럼 집에 갈까?”
“집, 집에? 지, 진짜로?”
이지아가 눈에 띄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저런 반응은 처음인데. 그러고 보니 집에 누군가를 데려간 적은 없었다.
‘……언젠간 말하기는 해야 했는데.’
다만 기회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껄끄러웠다. 나름의 자랑이라고 생각하던 아들의 여자가 열 명이 넘는다.
그들 중 태반은 배경만으로도 부모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지아만해도 그렇다. 이지아는 마도명가의 자식으로 지금은 이지아의 부모님 때문에 많이 몰락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마도 명가를 거론할 때, 나오는 게 이지아의 집안이다.
‘괜찮겠지?’
혹시나, 여자들이 부모님에게 압박할까 봐, 부모님에게 압박이 가해질까 봐 그동안 소개를 꺼려왔다. 중간부터는 아예 기회를 놓쳤고.
저번 기말고사 실기에서 최면 사건을 기점으로 여자들 기강은 나름 잡아놨으니 지금은 별문제 없지만.
‘여자들 사이에서 서열이 정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과 이 세계에서 첫 번째 여자라고 할 수 있는 이지아다. 잠깐 갈등하는 사이에 이지아가 나를 슬쩍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혹시 시우 급해? 급한 대로 입으로 빼줄까?”
나는 당황했다.
내가 성욕이 강한 건 맞는데, 장소나 시간에 따라 구분을 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내 몸은 정직하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아의 눈이 요사하게 휘었다.
“그럼 마마가 우리 시우 정액 빼줄까? 근처에 공중 화장실 있나?”
“공중 화장실?”
“응, 청결이야 마법으로 해결할 겸, 혹시 다른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시선도 해결하고……그리고 남자들은 남자 화장실에서 몰래 빼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할래?”
이지아가 저렇게 말하니까 혹했다.
“호, 혹시 시, 시우는 그런 쪽이 취, 취향이야?”
“……무슨 취향?”
“그, 남자들 중에 자기 여자가 당하는 게 취향인…….”
이지아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끔찍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내 여자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취향은 없다.
안되겠다.
오랜만에 기강을 잡아야겠네. 천수를 활성화하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목표는 이지아가 입은 드레스 안쪽.
“오늘 울고불고 애원해도 안 멈출 거야.”
“네엣♥”
이지아가 두려움과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리는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으로 들어가서 으슥한 곳으로.
“사람이 별로 없네?”
“움. 지그문 시미드도 바위훌련 기가니라.”
이지아가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근데 뭐 해?”
“하리니가 가리쳐 주우거 여습하고 이써서.”
“하린이가?”
이지아가 물을 한번 꿀꺽삼키고는 말했다.
“근데 여기 화장실 가는 길이 아닌데.”
“……생각해보니까 화장실은 좀 더러워서 좀 그렇다. 공원 안쪽으로 가자.”
“그럴까? 사실 나도 그 생각 했었어.”
내 말에 이지아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공원 안쪽으로 향했다.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장소.
나는 거기서 마법을 썼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인식 장애마법부터 시작해서, 헤카테의 축복으로 그림자로 우리 모습을 숨기고, 혹시 몰라 알람 마법까지.
“시우는 굉장히 익숙하구나.”
“…….”
이지아가 조금 불만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냥, 승하랑 좀 이런저런 걸 해서.”
“이런 저런 거?”
이지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 개 목걸이로 알몸 산책이라던가.”
“아, 알몸사, 산책?”
이지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 눈치를 보고 슬쩍 말했다.
“나도, 시우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 수 있는데.”
“나도 사실 알몸 산책은 취향이 아니야.”
“그래? 그럼 어떤 건데?”
나는 꽤 보편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가끔 여자들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하거나, 거만하게 앉아서 여자들에게 펠라를 받는다거나 봉사 받는다거나 하는, 그런 거.
“그래서 그란데힐을 좋아하는 거야?”
이지아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닌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란데힐은 내게 너무 헌신했다. 받은 것도 많고. 뒤치다꺼리도 자주 해주고.
“그런 이야기는 말고.”
나는 이지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다른 여자와 있을 때는 다른 여자에 관한 이야기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내가 정한 규칙을 어기기는 싫다.
“하자.”
“응♥”
***
그 시각 다른 곳에서.
“드디어 부활했구나.”
어둑한 공간. 한 여자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미를 형상화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딘가 요정여왕과 닮아 있었다. 다만 그녀의 금발과 푸른 눈동자와는 다르게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은발과 붉은 눈동자였다.
몽마의 여왕.
몽마는 지독히 못생긴 종족이다. 요정족이 마에 타락해서 그들이 가진 선천적인 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왕은 다르다. 그들의 여왕인, 한 때 요정여왕이 될 가능성을 지녔던 여성은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에.
“내 봉인을 풀 때 귀찮게 한 존재가 있다고?”
“예, 마수왕을 잡는데, 크나큰 공을 세운 놈입니다. 일 년도 안돼서 민간인보다 조금 강한 수준에서 최상격에 곧 입문할 놈이지요.”
검마가 말했다.
“그래? 재밌네. 어디 한번 말해봐. 그놈에 대한걸.”
검마는 지금껏 이시우가 지나온 궤적을 읊었다. 정숙한 처녀는 검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흐음호오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즐거워했다.
“그래, 네놈들이 원하는 것은 그놈을 치워달라는 것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좋다. 청을 들어주지. 몽마의 여왕이라는 칭호답게, 그놈을 내 시중으로 삼아주마.”
“시중 말씀이십니까?”
검마가 당황한 채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 방벽이 꽤 뛰어납니다.”
“걱정 마라. 내 능력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니까.”
몽마의 여왕은 눈웃음을 지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꿈속에서 잠자고 있는 그 존재가 허락한 능력이 아니라면, 이 몸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포섭할 수 있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검마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외계(外?). 일찍이 대적불가의 존재와 영원을 꿈꾸었던 자가 쫓아낸 외계의 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몽마의 여왕은 그들을 떠올렸다.
일찍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갖추었었던 시대가 있었다.
능히 마왕이라고 불리며, 컬렉터 따위에게 졌던 마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던 그때.
감히 대항조차도 할 수 없었던 그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쫓아내기라도 했던 두 명의 존재도.
“무얼, 걱정할 필요 없다. 그것은 그 두 존재가 허락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는 힘.”
어딘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것보다 그 소년이 흥미롭군. 그 소년은 강해질 것이다. 그것도 계속해서. 고작 1년 만에 마수왕을 잡았다? 비록, 그가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1년만의 성장치로 그 정도에 도달했다. 그런 놈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그 오만한 용조차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몽마의 여왕은 웃었다.
“만약,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검마는 호기심에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 모르겠군. 아마 내 이지를 잡아 삼킨 채 노예가 될지도?”
그렇게 답하면서 몽마의 여왕은 생각했다.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고.
"무엇보다 고작 인간이다. 요정족도, 아닌 열등하기 그지없는 인간족이지. 요정왕 정도라면 나와 나름 싸워볼 만 하겠지만."
요정왕도 없다.
몽마의 여왕은 기쁘게 웃으면서 떠날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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