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가면(5)
* * *
사인을 해준 뒤, 나랑 이연아는 워프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마수왕에게 가기 전에 내단을 섭취하실 건가요?”
“예, 아무래도 능력 향상이 급하니까.”
이연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흥흥거리며 웃고 있었을 뿐.
“그거 아세요? 이번에 마수왕 토벌에 어마어마한 전력이 투입되고 있다는 걸요?”
“그래요?”
“예, 나태와는 다르게 지금은 훤히 보이잖아요. 마수왕이라는 적과 그를 따르는 수만 단위의 마수들이. 지금쯤 바티칸도 난리가 나서 파견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삼대 길드로 알려진 여명과 창천이 참여한다고 하네요.”
“창천이라면, 한종우의 아빠가 있는 그 길드요?”
“예, 광성자요. 최상격의 일각 중 하나인 그 남자랑 여명을 이끄는 천추도 참가한다네요. 중국에서도 어마어마한 인력을 끌고 온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에서도요?”
“네, 무림맹하고 삼천(三?)이 합세한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은 다른 나라와는 좀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보통은 길드 단위를 꾸리지만, 중국은 길드 단위를 꾸리는 것도 모자라서 정, 사, 마로 구분하며 그들 무리에 따라 맹을 만들었다.
무림맹은 정파고, 삼천은 사파, 마인들은 마교를 만들었다.
‘정작 천마는 한국에 있는 실정이지만.’
어찌됐든, 꽤 재밌는 나라다.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네, 그러죠.”
나는 이연하에게 그렇게 말하며 그란데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중국 쪽으로 향할게]
마수왕을 잡으려고 중국쪽으로 이동하겠다고.
마수왕이 출전 중이니 아마 요정족도 이것저것 바쁠 거다. 용족이나 공허족이랑 협의를 할 테고, 요정군단을 정비할 테니 문자는 좀 늦게 올 거기 때문에 미리 보내놨다.
우웅.
……바로 왔네.
[그란데힐 : 중국쪽으로 향하시는 겁니까? 요정 군단을 지원하겠습니다. 위치를 말해주십시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바로 문자가 왔다.
[괜찮아, 문제없어]
[그란데힐 : 어째섭니까?]
[지금 이연아랑 같이 있거든]
[그란데힐 : ……또 꼬신겁니까?]
어처구니없어하는 느낌이 문장 너머로 전달되었다. 이건 좀 억울한데.
나는 아직 이연아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아니, 이연아가 승하랑 채린이 어머니잖아]
[그란데힐 : 알겠습니다. 우선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란데힐은 끝까지 나를 믿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그란데힐에게 어떤 이미지일까.
[그란데힐 : 윤승하 님이랑 윤채린 님도 출발하셨습니다. 혹시 몰라서 김시연님도 출전시켰습니다. 아마 중국에 마수왕 쪽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
그럼 빠르게 내단을 얻고 시작해야겠다. 기린의 주검은 내단이 가장 좋은 물건이지만, 뼈나 기린의 비닐 등 버릴 것도 없다.
“저같이 이쁜 여성이랑 같이 있으면서, 다른 여성이랑 문자 하는 건 매너가 아니에요~.”
“……이거 업무와 관련된 내용인데.”
“시우 씨는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시네. 그런걸 꼬리를 치는 거라고 해요.”
그란데힐은 이미 내 여자인데. 오히려 꼬리치는 건 이연아가 아닌가.
“아무튼 빨리 출발해요, 더 있다가는 마수왕이 활개칠 테니까.”
흥흥거리며 이연아가 나를 끌고 갔다.
***
커다란 원형의 탁자가 있는, 회의실로 보이는 장소.
얼떨결에 김은정을 따라다니다가 같이 오게 된 이지아는 그곳을 둘러보았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었다.
TV 같은 곳에서 방송하거나 아이들이 동경하는 영웅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떠들 때, 항상 나오는 얼굴들이었다.
창천의 길드장 광성자, 상격에 들어서자마자 마수 천마리를 격살한 검후(??)남다윤, 여명 길드장인 천추 등등.
뿐이랴, 미국에서 온 가장 유명한 영웅 더 원부터 시작해서 바티칸에서 온 겸손하는 자, 일본에서 온 검성.
그리고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온 봉관의 무녀와 용족이 보낸 전투조직 패룡단.
이 자리에 있는 인원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나라 하나를 지도상에서 지우는 것도 가능한 전력이었다.
“저희의 작전은 간단합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마수들을 유인, 섬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회의실에 상석, 협회장의 옆에 서 있는 안경을 쓴 올백 머리의 남자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마수왕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지만, 마수들은 그보다 더 위험합니다. 개체별로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들이 시민에게 피해를 끼치면 천문학적인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수의 수는?”
“저희가 면밀히 관찰한 결과 상격에 해당하는 마수가 최소 100체 이상 있습니다. 그 아래인 중격은 5,000체 이상 있고요.”
“터무니없는 수치로군.”
여명의 길드장이 천추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중국측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중국측도 지금 최대한 전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헌터들에게는 화력지원을 요청하고 중격에 달하는 영웅들로 타격대를 꾸렸습니다. 그 숫자는 거의 천만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다른 건 몰라도 인원은 어마어마하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나. 영웅들의 숫자와 공허족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영웅은 중격의 영웅 500명을 파견했습니다. 상격의 영웅도 두 명을 제외한 전원을 파견했고요. 공허족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미 중국에 있는 무기 공장을 제외한 전 공장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사골병(死?兵)들이 빠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마수들은 처리할 수 있겠군.”
“……그럼 마수왕을 타격하는 조는 어떻게 꾸리지?”
그 말을 직후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모두 실력에 자신이 있으며, 각자 자기 위치에 자부심을 품고 있고, 각 나라의 얼굴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자들이지만, 마수왕은 또 다른 문제였다.
죽는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도 있지만, 명예를 위해서, 자기가 가진 사명감 때문에 죽음도 불사를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수왕과 대적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으로 마수왕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 희생을 마다치 않을 인물들이다.
하지만 마수왕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죽음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주는 이다.
그와 동급이라 일컬어지던 나태는 일본에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일본은 그 상처 때문에 향후 2년간은 회복에 집중해야 할 정도로. 최상격 몇 명이 달라붙는다고 해서 그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곳에 없다.
“최상격 영웅을 커트라인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나태를 죽인 진짜는 모습을 안 드러낸 건가?”
올백머리 남자의 말에 미국에서 온 영웅 더 원이 물었다.
“김은정 님 말씀입니까?”
“오, 친구.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물은 게 아니야. 김은정, 그 친구가 정말 강하다는 걸 알고, 그녀가 가진 고유 능력은 정말 흉악하다는 것을 알지만……그녀가 홀로 마왕을 타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 또한 마찬가지다. 김은정의 강함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겠지만……마왕은 또 다른 문제야.”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이연아 님이 마수왕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연아……그 ‘귀환자’말인가?”
“네.”
“그 여자라면 맡길 수 있겠군…….”
“현 상황에서 가장 강한 전력 중 하나이니.”
여명의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찬성입니다. 혹시 전력이 부족하면 말해주십시오.”
“요정족과 용족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우리 종족은 이미 왕을 제외한 대부분 인원들을 모집하고 있다.”
“요정족은 이미 군단의 형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요정족의 말에 용족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정족은 지금까지 그들을 스스로 ‘군단’이라 칭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요정들을 통솔하는 진짜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패룡단의 인원은 무심코 요정족을 바라봤다. 요정족의 여왕인 티타니아의 오른팔인 그란데힐. 무심한 회색빛의 눈 안에 숨겨진 힘을.
‘더 강해졌어?’
요정족은 기실, 용족이나 공허족에 비하면 한 끗발 떨어진다. 그들은 강한 종족이기는 하지만, 공허족과 용족은 강대하고 무시무시한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정족이 강대한 육체를 타고나는 ‘수인족’이나 태어나자마자 이능을 각성하는 ‘사이오닉’ 과는 다르게 삼대 종족으로 이름을 떨치는 것은 전적으로 여왕인 티타니아 덕분이다.
그리고 요정족이 가지는 잠재성도 한몫했다. 요정족은 요정왕이 탄생하기만 하면, 전력 자체가 말도 안 되게 뛰어오르기 때문이다.
……혹시,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패룡단의 인원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요정족을 향해서 념(?)으로 말을 전했다.
예, 예상하신 대로라면 아마 맞을 겁니다.
진짜인가? 아니, 진짜군. 그대가 이토록 빨리 강해진 건 요정왕이 탄생했다는 증거이니까.
네, 그리고 혹시 마인의 귀에 들어갈 수 있으니 조심해 주십시오.
알겠다, 주의하지.
그리고 혹시 모르지만, 용왕 님께서 직접 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준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왕께서?……그렇군. 근데 그가 마수왕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란데힐의 확답에, 패룡단의 인원은 환하게 웃었다. 그들의 왕은 강하다.
인간의 형태라면 세계수와 동화한 티타니아를 제외하곤 적수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그리고 그녀가 신룡의 형태로 돌아간다면, 그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진정한 마왕이라 불리는 이와 오만한 용, 그리고 무신을 제외한다면 단신으로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대적은 없다고 믿기 때문에.
***
히어로 아카데미 내부.
산 위에서 한 명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핏물이 넘실거리는 듯한 눈동자와 머리카락. 혈마는 조용히 머리를 뒤로 쓸었다.
“확실히 경계가 허술해졌다.”
혈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혁월 님께서도 참 무심하군. 자신의 동료를 미끼로 내몰면서 시간을 벌고, 다른 ‘거악’을 깨우려고 하다니.
지직거리는 기이한 목소리. 이미 한 번 죽었음에도 억지로 생을 연명하기 위해 역천의 술법을 가한 탓이었다.
“그것보다 검마, 새로운 육체는 괜찮은가?”
생각보다는 괜찮다. 다만, 역량이 너무 떨어졌어. 이대로라면 중격도 아슬아슬하게 감당할지도 모르겠군.
검마는 손을 잠깐 들며 말했다.
“그래도, 조만간 괜찮아지겠지. 역천의 술법은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지만, 그대라면 충분히 지불할만한 했다. 그것보다는 회귀자의 동료들이 문제지. 그들이 참가할 가능성이 있는가?”
……없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마왕과의 결전에서 힘이 쇠락한 지 오래. 그리고 그들 중 3명은 이미 우리 쪽에 넘어왔고, 나머지는 전부 생사가 불분명하다. 있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겠지.
검마는 확신했다.
맹에 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이기에.
“그것보다는 서두르지. 여왕이나 그 남자가 오기 전에.”
흐흐혈마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날의 치욕은 정말 치욕적이었지만, 그 덕분에 혈마의 능력은 성장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나름 이시우와 맞부딪쳐도 괜찮을 정도로.
그래, 서두르지. 어서 빨리 정숙한 처녀를 깨울 준비를 하자.
검마가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