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가면
* * *
그란데힐의 도움을 받아, 바깥으로 겨우겨우 나온 나는 던전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란데힐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천수로 내 상태를 면밀하게 확인했다.
‘전투력이 평소보다 엄청 떨어졌군.’
평소의 전력을 100%라고 친다면 지금 낼 수 있는 효율은 70%도 안 된다.
일월천뢰검은 딱 한 번 정도나 쓸 수 있고, 태양의 돌이나 달의 돌을 이용해서 사용하는 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이연아의 말대로 무위의 검을 약식으로 조정하는 법을 알아서 다행이긴 한데.’
약식으로 만든 무위의 검을 다섯 번.
지금은 그 정도가 한계다.
‘파괴력이 십 분의 일로 낮아진 게 흠이지만.’
효율은 별로 높다고 할 수 있지는 않다.
일월천뢰검 자체가 마나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으며, 사용자의 몸에 부하를 걸어서 극단적인 파괴력을 내는 검식이라.
‘유아독존도 없다.’
중간부터, 티타니아의 마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유아독존을 쓴 게 내 패착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조금은, 조금은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득은 있다.
“김시연은 어때?”
“김시연님 말씀이십니까?”
김시연.
풍랑, 펜리르의 힘을 다루는 그녀가 필요했다.
“김시연님의 성장세는 꽤 가파릅니다. 이제 2년 정도만 보면 자연스럽게 상격에 오르실 정도로 성장하셨습니다.”
2년.
굉장히 빠른 시간이다. 그런데 느린 시간이기도 하다.
분노하는 마수는 당장 닥쳐온 현실이기에.
신살의 힘이 필요하다. 존재부정이라는 힘을 머금고 있는 그녀의 힘은 높은 격을 지닌 존재에게는 특히나 치명적이다.
그러나 중격인 김시연을 당장 분노하는 마수 레이드에 투입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수 살해자를 얻는 건가.’
마수 살해자는 마수가 득실거리는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이다.
상격에 해당하는 검은 가면의 마수를 잡으면, ‘마수 살해자’라는 아이템이 나온다.
마수 살해자는 문자 그대로 마수를 살해하는 데에 있어 특화된 무기다.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지만, 횟수가 정해져 있는 소모품이 유일한 단점.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무작위로 나오는 아이템이 하나 떠올랐다. 문자 그대로 ‘일정 확률’로 나오는 아이템인데 보통은 곁가지 정도의 불과하다.
그런데 아주 가끔 굉장히 희귀한 아이템 하나가 나온다.
마수 살해자가 나오는 던전도 그렇다. 풍유환이라 불리는 아이템. 요즘 승하가 가슴을 많이 신경 쓰던데 나오면 승하 줘야겠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뻐근한 목을 꺾으면서 말했다.
“김시연은 훈련장에 있어?”
“훈련장에 있습니다.”
훈련장이라.
나도 내 몸을 한번 점검을 해봐야 하는데.
“일단 알았어.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같은 거 일어난 건 있어?”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 난 일단 훈련장에 가 있을게.”
“얻으신 겁니까?”
그란데힐이 물었다. 앞뒤 다 짜른 말. 그러나 나는 그것이 티타니아의 고유능력인 동화를 모방했느냐는 물음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온갖 능력이 존재하기에 혹시 몰라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럼 난 점검하러 훈련장 좀 갔다 올게.”
“교수 전용 훈련장은 어떠십니까? 그곳은 요정족들이 보안에 신경 쓰는 곳이라 굉장히 안전합니다.”
“그래?”
그란데힐의 의견이 솔깃했다.
내가 쓰는 전용 훈련장은 좋은 기구들이 많지만, 조금 불안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회에서 들여온 물건들이라 정말 만약에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기능이 있다면, 내 정보가 세어간다는 뜻이니까.
‘그런 일은 거의 없기는 한데.’
만일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럼 요정족들에게 미리 얘기해 놓겠습니다.”
“응. 저번에 누구였지? 나 요정왕이 되었을 때, 날 보좌하던 애.”
“카니에 말씀이십니까?”
“걔한테 말해 부탁해도 되나?”
“예, 그리고 혹시 모르니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 놓으라고 할까요?”
“……은총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예, 요정족에게 있어서 요정왕의 씨앗을 받는 것은 영광입니다. 이시우 님에게 별로 와 닿지 않으시겠지만, 인간들의 언어에 따르면 로또 1등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나중에.”
“예, 알겠습니다.”
그란데힐을 돌려보내고, 나는 교수동으로 향했다.
김시연을 바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우선 티타니아의 능력을 체험해 보고 싶었다.
“뵈,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검은색 단발이 인상적인 요정이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사실은 카니에가 나에게 그나마 덜 귀찮게 해서 선택한 말이었다. 그란데힐은 업무 때문에 워낙 바빠서.
“응, 안은 어때?”
“넵! 마도기기는 물론 아티팩트, 혹시 모를 현대 과학 물품까지 전부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로 말하는 카니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깔끔했다. 그리고 넓었다. 바닥도 뭔가 삐까번쩍거리는 게 특별한 광물로 바닥을 구성한 것 같았다.
나는 느긋하게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가면창을 열었다.
[동화를 모방한 가면 Lv. 2]
고유 능력, 동화.
어떻게 쓰는지는 알고 있다. 삼신기의 힘으로 일시적으로 초월경에 올라서 세계수와 동화를 했으니까.
나는 가면을 썼다. 무엇인가 얼굴 위에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요정왕의 장막 내에 있는 아공간에서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꺼냈다. 영약으로도 쓸 수 있지만, 무기나 방어구 등의 들어가서 재료로 쓸 수 있는 아이템이기에 아껴놨던 것.
아직 동화의 레벨이 낮아서 세계수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뭇가지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웅웅!
세계수의 나뭇가지의 동화 능력을 사용했다. 그러자 세계수의 나뭇가지에서 생명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좋은 징조는 아니다.
이 나뭇가지가 영약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생명의 마나가 넘쳐 흘렀기 때문이다. 무기나 방어구 등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도 생명의 마나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천수로 면밀하게 살폈다.
‘생명의 마나가 급속하게 빠져나가지만, 이 정도면 금방 다시 채울 수 있겠는데.’
나가는 마나는 생각보다 적었다.
우웅!
생명의 마나가 점점 방출되기 시작하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마치 내 몸이 된듯한 느낌이 되었다.
손 이외의 기묘한 감각이 하나 생긴 기분.
나는 그것을 온 감각을 동원해서 살폈다.
‘생각보다 괜찮다.’
동화.
문자 그대로 어떤 사물과 사용자가 동화되어 사물의 능력을 쓸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다.
티타니아는 요정족의 대표인 요정여왕이라서, 그리고 티타니아 자체가 세계수와의 파장이 가장 잘 맞아서 그녀는 세계수와 동화할 수 있었다.
‘나도 무슨 조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도 된다.’
그때였다.
손등.
일전에 비염과 계약을 하면서 맺은 징표가 붉은빛을 띄기 시작했다.
화르륵!
허공에서 불꽃이 피었다. 그리고 동시에 번개도. 불꽃과 번개가 뒤섞인 것이 서서히 인간의 형체를 갖추었다.
후, 드디어 이몸 등장!
비염이 등장했다.
계약자의 정령인 이몸이 새롭게 왔는데, 반응이 뭐야.
“아냐, 기뻐서 그래, 기뻐서.”
계약자는 다 좋은데 반응이 너무 담담한 게 흠이네.
비염이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근데 계약자, 그거 뭐야? 좀 많이 좋아 보인다.
“세계수의 나뭇가지. 이건 내 물건이라 줄 수 없어.”
내 말에 비염이 탐욕을 거뒀다.
“근데 비염, 너 얼마나 강해진 거야?”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
비염이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폈다. 번개하고 불꽃이 일렁였다.
내가 계약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번에 번개 속성이 추가되었기는 했는데. 정확한 건 잘 모르겠어.
흠, 그렇게 되면 결국 던전에서 확인해야 되는 건가.
근처에 시험할만한 사람도 없다. 정 안되면 문밖에 있는 카니에에게 시험해봐야 하나.
나는 몸을 일으켰다.
***
밖으로 나가니 묘한 광경이 있었다.
김시연과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강한남이 보였다.
‘강한남은 애매한데.’
강한남은 속된말로 요즘 꽤 물이 올랐다.
이제 중격에 올라온 한종우를 따라다니면서, 계속해서 윤채린하고 윤승하하고 부딪치기 때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들의 기준.
나는 다시 김시연하고 강한남을 바라봤다.
김시연은 인상이 별로였고, 강한남이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걸로 보아서는 강한남이 억지로 따라다니는 것 같다.
‘이지아 다음에 김시연…….’
“누나, 저 누나 정말 좋…….”
“……앗, 시우야!”
김시연이 강한남의 말을 끊으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강한남이 나를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서, 설마 기, 김시연 누, 누나도 시우 여자였어?”
“……누나도?”
김시연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야, 강한남.”
“어, 어, 왜?”
“한종우 어딨어?”
“조, 종우? 종우한테 화풀이하려고?”
“아니, 그냥 시험 좀 해볼 게 있어서.”
계약자, 아무리 그래도 내가 급이 있지. 이런 학생들하고 붙어봐야돼?
비염이 항의했다.
아니, 근데 한종우 정도면 진짜 좋은 상대인데.
계약자, 나는 그런 애들보다 저 사람이랑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비염이 김시연을 가리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