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성물(5)
* * *
어디서 잘못된 거지.
남궁검령은 생각했다.
주변을 심연으로 물들이는 수라의 마검.
어둠이 겹겹이 휘몰아치는 멸망의 해일. 그것을 보며 남궁검령은 승리를 확신했다.
이시우는 강하다.
그의 고유 능력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검 하나로도 그는 능히 상격들 사이에서도 그와 견줄 상대는 한 줌이다.
거기에 특성을 모방하는 힘, 고유능력을 모방하는 힘에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돌리는 힘.
이시우가 가진 힘은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능력을 모방하고, 변수를 창출하는 데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능력치는 또한 어떤가? 어떠한 특성인지는 모르지만, 상격중에서도 육체적 능력치가 높은 자신을 신체 능력만으로 압도했다.
남궁검령은 확신했다.
지금 이시우라는 존재가 가장 나약했을 때라는 것을.
지금이 아니라면 안된다. 이시우는 이 싸움을 발판으로 조금이나마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몸을 회복할 즈음 도전하면,
‘승리를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남궁검령은 무리하게 수라마검의 힘을 썼다.
이것으로 왼쪽 팔이 수라에 잠식되었다. 이 장애를 극복하려면 3년은 족히 필요할 터.
남궁검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은 마치 달이나 별 따위가 없는 밤과도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마로 물든 세상. 수라의 힘이 현현한 지옥도(???).
화륵.
그곳에서 불꽃이 담담하게 피어올랐다.
불꽃과 벼락이 결합한다. 이시우의 담담한 얼굴이 보였다.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창을 그저 그었다.
화아악!
마치 동이 트기 시작하는 태양처럼, 태양을 마주하는 밤처럼, 자연스럽게.
어둠이 가라앉는다.
태양으로 벼린 벼락이 질주한다. 어둠을 가르고 자신에게.
‘아.’
남궁검령은 직감했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엘도르는 생각했다.
‘이것은 마치…….’
일찍이 어둠의 시대에서 빛의 신이 자신들을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그 구결이 구현된듯한 광경.
한 없이 황홀한 광경이었다.
***
나는 절제의 검을 바라봤다.
절제의 검은 문자 그대로 검이라는 뜻이다.
바티칸을 상징하는 무력이나 가장 날카로운 검 따위가 아니라,
‘일종의 성검이지.’
일종의 검령같은 존재다.
엘도르는,
신이 빛으로 짜아서 만든 검이다.
본체는 성검이지만 그런 주제에 상격에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절제의 검인 엘도르의 정체다.
고유 능력, 영광의 검.
그녀가 진정 용사라고 인정한 존재가 사용한다면 그녀는 가장 뛰어난 빛의 성검으로 변한다.
바티칸에서 온갖 성물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물을 꼽자면 그건 엘도르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는, 초월경까지 쓸 수 있는 무기.
‘각이다.’
보통 각이 아니었다.
성검각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건 엘도르에게 진짜 성검의 용사라고 증언을 받을 수 있는 각이라고.
“……대단하시네요.”
황홀한 표정을 짓는 엘도르가 보였다.
어둠속을 가르는 무위의 검을 보고, 무언가를 연상시킨듯했다. 내가 하기는 했지만, 어둠을 가르는 검은 꽤 멋있긴 했으니까.
그리고 엘도르는 바티칸의 인물이니만큼 무언가를 따로 연상시켰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나를 용사라고 인식한 것 같다.
“크흐.”
낮게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숨은 붙어있는 검마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꾸물거리는 핏덩이도.
“혈마!”
엘도르가 기함하며 검을 뻗었다. 섬광처럼, 혈마를 향해 뛰었다.
그보다 빠르게 혈마가 검은색의 구슬을 던졌다. 구슬이 허공에서 터지며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공간계열 아티팩트인가.’
“너, 정말 상상 이상으로 강해졌네. 설마 검마까지 이런 몰골로 만들다니. 검을 다루는 솜씨도 굉장히 훌륭하고.”
진하게 웃는 혈마가 보였다. 이번 싸움에서 손해를 많이 본 것처럼 보이지만 혈마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다.
그녀가 가진 고유 능력때문이다.
아타락시아.
사용자가 영감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용자의 성장을 가속하는 능력.
‘근데 내가 냅두겠냐고.’
혈마는 여기서 죽여야 한다.
아타락시아를 가진 혈마의 성장 속도는 나도 예측하기 힘들다. 거기다가
그란데힐의 고유능력을 모방한 공간장악의 가면을 쓴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꽉.
“……!”
그러자 공간이 일그러진다.
동시에 내 앞에 허공이 먹물이 그려지듯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남궁검령과 혈마의 등이 보였다.
“이런……!”
낭패어린 혈마의 표정이 보였다.
어검.
기린검이 섬광처럼 쏘아졌다. 보랏빛의 뇌광이 남궁검령의 단전 부근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커헉!”
그리고 엘도르가 섬광같이 혈마에게 달려든다. 혈마의 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흐흐흐!
음산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허공으로 날아간 혈마의 팔이 핏물로 화하더니 다시 혈마의 팔쪽으로 붙었다. 핏물이 다시 새하얀 팔이 되었다.
창백한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본래라면 수 십 번 정도 사지가 절단되어도 멀쩡할 테지만, 엘도르가 가진 힘의 성질이 혈마가 가진 주술에 상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내 번개도.’
번개는 사특한 힘을 멸한다.
바티칸에서 사용하는 성력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효용은 있을 거다.
“포기하고 잡히지? 지금 순순히 잡히면 목숨은 살 수 있을 텐데.”
“그 말을 믿으라고? 네 눈에 살기가 가득한데? 당장에라도 잡히면 목을 날릴 것처럼.”
내 말에 혈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죽어야지.
“그리고……너 아직 공간 계열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구나.”
혈마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나는 장막에서 뇌단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었다.
까득.
번개가 치솟는다. 자파의 내단도 그렇지만, 뇌단도 슬슬 효율이 엄청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콰득.
도약한다. 뇌혼을 발동한다.
‘단번에 끝내야 돼.’
싸움이 길어지면서 마나의 소모가 너무 격렬했다. 그리고 혈마는 장기전으로 가면 정말 답이 없이 강해진다.
우웅?!
공간장악으로 틀어막은 공간을 혈마가 억지로 열기 시작한다.
어검으로 기린검을 조종한다. 샛별의 영광을 내질렀다.
“하압!”
엘도르가 기합을 내지르며 성검을 휘둘렀다. 번쩍하고 섬광이 튀어 나가 검마의 목을 그대로 베어냈다.
서걱.
검마가 눈을 부릅뜬 채로 목이 날아갔다. 과연 빌런들에게 목 수집가라고 불릴 만큼 깔끔한 솜씨다.
“죽어.”
엘도르가 서늘한 목소리로 검을 휘둘렀다. 혈마가 눈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동시에 검을 날렸다.
혈마가 요사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색의 구슬 두 개를 던졌다. 쩌적! 두 개의 구슬이 엘도르를 막았다.
“오늘은 손해가 크네.”
혈마의 몸이 반쯤 공간에 접혀 들었다.
‘팔 하나라도.’
그녀가 가진 재생의 능력을 이용하면 회복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릴 거다.
화악!
혈마의 몸 대부분이 공간으로 이동했을 때, 엘도르가 빛을 뿜으며 검으로 화했다. 영광의 검. 그것이 혈마를 향해 쏘아졌다.
어검.
검으로 화한 엘도르에게 추진력을 더했다. 그리고 서걱하는 소리가 들리며 혈마의 팔이 날아갔다.
이마를 찡그린 채 혈마가 입으로 말했다.
다음에 보자.
그리고 혈마가 공간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혈마를 놓치고 난 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근처에 마인들을 이 잡듯이 잡았다.
“쯧.”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유아독존이 쿨타임인 탓에 기분이 멋대로 움직였다.
‘컨디션도 안 좋고.’
유아독존에 너무 익숙해졌다.
상격에 오른다고 컨디션에 영향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격만되어도 자신의 컨디션에 매우 신경을 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유아독존이 항상 내 몸을 최상의 상태로 고정해주며 정신방벽을 세워줬기 때문이다.
“여기가 끝입니다, 용사님.”
자책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엘도르가 말했다.
“그럼 슬슬 바티칸으로 갈까요?”
“네, 용사님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혈마를 놓친 것은 아쉽지만……그래도 검마를 잡으셨으니, 제가 증언을 해드린다면 겸손하는 자 님에게 성물을 받을 수 있으신데, 혹시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엘도르의 말에 나는 물끄러미 엘도르를 바라봤다.
바티칸에서 나는 성물들은 귀한 것들이 많지만 나는 별로 끌리지가 않았다.
우선 뇌속성을 가진 나는 성력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마를 물리치는 데에 특화되어있다. 무기를 받자니 바티칸에 있는 남은 무기는 별로 없다. 다들 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탐나는 건 하나가 있지.’
영광의 검.
엘도르.
그러나 그걸 당장에 말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상격 정도면 걸어 다니는 전략 병기 같은 취급을 받는다. 홀로 도시를 멸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안 물어보시나요?”
“어떤 거요?”
“제가 검으로 변했던 거요.”
엘도르가 나를 보며 물었다.
“뭐, 그런 능력 정도면 괜찮으니까요. 소문에 의하면 신화의 짐승이 되는 능력이나, 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검정도는 양호하죠.”
“……사실 저는 성검이에요.”
그 뒤로 엘도르가 자신의 사연을 설명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빛의 신이 빛으로 자신을 만들고, 인격이 부여되었다. 용사를 찾아, 그의 검이 되라는 말을 듣고 용사를 찾고 다녔다고.
“그렇군요.”
나는 담담한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검으로 삼아주실 수 있나요?”
“그래도 되나요? 바티칸에서는…….”
“괜찮아요. 그러한 조건이니까요. 그리고 바티칸은 빛의 신을 모시는 종자들이 모인 곳이에요. 빛의 사도이신 용사님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손을 보태면 보탰지,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황혼으로 물든 거리에서 엘도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웃는 엘도르를 보며.
***
“……그거 아시나요?”
엘도르가 나를 보며 홍조를 띄우며 물었다.
“성검을 제대로 사용하시려면 성검인 저와 동조를 높여야 해요.”
“동조요?”
“예.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친밀도 같은 걸 높여야 한다는 거죠.”
그런 말이나 설정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스킨쉽 같은 것도 좋고, 아, 아니면 키, 키키, 키스라던가.”
나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엘도르를 바라봤다.
홍조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엘도르.
저는 용사님이 마를 척결하겠다고 맹세한다면, 영원토록 당신의 검이 되겠나이다.
게임속에서 고아하게 말하던 엘도르가 떠올랐다.
“그, 그그그, 그리고 이건 빛의 신께서 하신 말씀인데.”
엘도르가 얼굴을 붉히면서.
“요, 용사님의 저, 저저정액을 바, 받으면 도, 도도동조율이 노, 높아진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설정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 그그, 그러니까. 오, 오늘 밤에 요, 용사님을 찾아뵈어도 되, 될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