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섬(5)
* * *
이지아를 끌어안으니 강한남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보니 불쌍……하지는 않네.
학기 초에 내가 당하던 게 워낙에 있어서.
“시, 시우, 넌 나, 나연이하고 사, 사귀는 거 아, 아니었어?”
강한남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항상 자신감에 차있던 모습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좀 새로웠다.
강한남의 추측도 일리가 있다.
한종우는 임나연을 거의 포기하는 분위기였고, 임나연은 최근에 날카로운 모습을 자주 보이지만, 내 옆에서는 순진한 척을 많이 하니까.
날카로워 보일 때, 내가 나서면 임나연은 거짓말처럼 순둥순둥하게 변했다.
“그건.”
“서, 설마 두, 둘이랑 사귀는 거야?”
내가 말하려고 하는데 강한남이 번뜩이며 말했다. 부러움과 질투를 한가득 담은 눈으로.
나는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저런 생각에 도달하는 거지.
순간 당황했지만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전생과 다르게 여자가 많은 건 흠이 별로 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여자들이 기본적으로 많아서, 일부다처제가 인정되고 있다.
다만 원래 의도는 일부다처제로 결혼할 여자를 많이 거둬들이라는 건데 상위의 남자들이 독식하는 사태가 벌어져서 이걸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는 토론이 몇 번 있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나는 강한남의 말을 부정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다.
“응, 나랑 나연이랑 시우랑 같이 사귀고 있어.”
이지아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냉큼 말했다.
“그래서 말하는 건데 한남아, 그만 집적대줄래?”
“……어?”
“솔직히 말해서 좀 불쾌해.”
이지아의 말에 강한남이 세상이 무너진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강한남을 슬쩍 봤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강한남도 괜찮은 편이다. 어떤 애들은 징그럽다고 하지만 근육질이 가득한 듬직한 체형의 호감형인 얼굴.
물론 내 기준이다.
내 눈은 거울을 볼 때마다 한없이 높아지는 편이라.
“다른 애들이랑 어디 가자고 하면, 은근슬쩍 끼어서 내 옆에 앉으려고 하지 마.”
“…….”
이지아가 속사포로 말하면서 강한남을 쏘아붙였다. 마치 지금까지 억눌린 게 폭발한 듯이.
“맨날 그러면서 뭐 불리하면 한종우한테 가서 일러바치고. 한종우가 무슨 네 엄마야? 요새 마마보이도 안 그래.”
강한남의 표정이 붉게 물들었다.
온갖 모욕을 받아서 화난 표정을 지으려다가 나를 힐끔 보고 다시 안색이 돌아왔다. 분노조절 잘하네.
“그리고 제발 다른 운동을 하면 좀 냄새제거제 같은 것 좀 뿌려. 땀 냄새 때문에 내 코가 마비될 것 같으니까.”
멸시어린 표정으로, 이지아가 말했다.
나는 이지아를 힐끔 바라봤다. 내가 운동하고 나면 땀 냄새 안 나냐고 물어봤을 때, 오히려 좋다면서 나를 껴안았는데.
하지만 나는 조용히 있었다.
이럴 때 저런 말을 하면 나중에 뭐라 계속 할 테니까.
“그, 그건…….”
“그리고 아야네가 그러더라. 네가 자꾸 찝쩍거려서 곤란하다고.”
“뭐, 뭣?!”
아야네는 단절이라는 고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마나를 무진장 부여하거나 단절에 대한 이해가 깊은 만큼, 개념이나 현상마저 절단하는 무시무시한 고유 능력.
“아, 아야네는 나,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아니야. 아야네도 시우를 좋아하면 좋아했지, 한남이 너는 싫다 하더라.”
“…….”
강한남은 이제 입을 쩍 벌리면서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변태같이 내 가슴 좀 그만 쳐다봐. 잘난 얼굴을 하면서 힐끔힐끔 보는 거 진짜 불쾌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이지아가 내 품으로 쏙 안겼다.
가슴을 내 가슴에 밀착하면서. 강한남은 이제 보기도 싫은 듯이.
“미안. 내가 너무 흉한 모습을 보였지?”
이지아가 내 품속에 안기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팔을 이지아의 허리에 둘렀다.
저쯤하면 오히려 불쌍하……지는 않네. 솔직히 말하자면 양호한 편이었다.
나는 이지아를 데리고 내 캠프쪽으로 향했다.
***
“후.”
윤채린은 손을 털었다. 모은 포인트는 꽤 많았다.
오늘은 눈에 보이는 학생들만 족치고 괴수들을 집중적으로 사냥했기 때문이다.
“열 마리인가.”
곰 형태의 괴수랑 멧돼지 형태의 괴수를 보면서, 윤채린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디선가 들은 바로는 곰은 정력에 좋다고 들었는데.
“잠깐 그러면 더 심각해지는 거 아냐?”
윤채린은 어제를 회상했다.
울며 불고 난리를 쳐도 이시우가 놓아주지 않았다.
최면 어플과 천마색공으로 단련된 자신이라면 이시우를 보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당한 것은 자신이었다.
한 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윤채린은 절정했다. 한두 번 절정한게 아니라 작게는 세 번에서 많게는 다섯 번 넘게.
윤채린은 그날 깨달았다.
사람이 너무 행복해도 괴로울 수 있다는 걸.
‘진지하게 말해서.’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다.
천마로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진지하게 이시우는 자신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게 뿌듯하면서도 이시우라는 남자를 결국에는 다른 여자랑 공유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하지만 싫은 감정보다는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약속도 받았고.
모두 똑같이 사랑해주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른 여자에게 시간을 쏟아 부은 만큼, 그만큼의 시간을 너에게 쏟아 부을게.
이시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진짜 개새끼다.
하지만 동시에 이시우의 눈빛이 떠올랐다. 개새끼 같은 발언이지만, 이시우가 해서인지 로맨틱한 발언이기도 했다.
‘후.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리고 성적인 쪽이 아니더라도, 이시우를 막기가 힘들다.
이시우의 매력이 올라가고 있다.
이시우를 볼 때마다, 여자들이 몽롱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전부터 이시우를 그런 눈으로 봤지만, 요즘 따라 그게 더 심해졌다.
이시우가 상격에 들어서면서, 그가 태양의 마나를 깨우쳤을 때,
이상하게 이시우를 바라보기만 해도 배 아래가 욱신거렸다.
배 아래.
더 정확히는 자궁 쪽이.
‘무슨 자궁 큥큥도 아니고.’
윤채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아래를 바라봤다. 잠깐, 아주 잠깐 이시우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벌써 팬티가 조금이지만 젖었다.
윤채린은 그 자리에서 도축을 시작했다.
이연아.
윤채린은 어머니 같은 존재에게 배운, 도축 방법으로 열심히 시체를 도축했다.
가죽을 손질하고, 고기는 부위별로 나눈다. 맛없고 질긴 부위는 버리고, 맛있는 부분만을 챙겼음에도 들기가 힘들었다.
“씁.”
고기를 모두 가죽 안에 둔 다음 그것을 보따리처럼 진 윤채린은 이시우가 설치해둔 텐트 쪽으로 움직이려다가 멈칫했다.
“진짜라니까? 내가 다 들었어.”
“에이, 설마.”
“근데 가능성 있지 않아? 임나연이 재계 1위 외동딸이기는 해도 이시우가 꿀리는 건 아니잖아.”
이시우.
그 이름이 들리자 윤채린은 멈칫했다. 땅에 몸을 바짝 붙이며 귀를 기울였다.
“와, 근데 그렇게 되면 이시우 양옆에 임나연하고 이지아가 있는 거야?”
“둘 중 하나랑만 사귀어도 행복할 것 같은데. 진짜 존나 부럽네. 아, 나도 이지아 가슴 만지고 싶다!”
학생들의 음담패설이 섞인 푸념.
윤채린은 사귀어도 라는 말에 주목했다. 뭐, 이시우가 다른 여자랑 사귄다고?
윤채린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사귈 수 있다. 애초에 그런 조건이었으니까.
근데 내가 모르는데 사귀고 있는 게 사방에 소문났다고?
콰득.
윤채린은 자신도 모르게 발밑에 있는 돌을 산산조각냈다.
“누, 누구냐!”
“젠장 또 정한서야?! 빨리 정비해!”
당황해하는 강한남과 그 패거리들이 보였다. 기습에 대비해서 재빠르게 장비를 갖추고 대형을 짰다. 나쁘지 않은 합이다.
윤채린은 몸을 일으켰다.
“……씨발, 좆됐네.”
허망해하는 학생의 표정. 윤채린은 주먹을 쥐었다.
우선 저놈들을 조지자.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시우 오늘 진짜 뒤졌다.’
***
한편, 숲이 우거진 곳에서 윤승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더 격렬해.’
윤승하는 섬에 들어서자마자, 얼마 안 가 임나연과 마주쳤다. 그녀는 임나연에게 별로 감정은 없다. 그저 이시우 옆에 붙어 다니는 여자 A. 그 정도의 위치에 서 있는게 임나연이니까.
원래대로라면 윤승하는 임나연과 싸우고 그녀를 이겼어야 했다. 하지만 윤승하가 임나연을 탈락시키기 전에, 갑작스럽게 은수아가 난입했다. 그 결과, 그녀는 지금 임나연과 은수아를 따돌리기 위해서 도망치고 있다.
“정령군주!”
오글거리는 별명을 부르며 은수아가 난폭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칠색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칠색.
일곱 빛깔 찬란한 빛이 윤승하를 노렸다. 윤승하는 이를 악물고 정령을 소환하며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내가 왜 그런 거에 정면으로 승부해야 하는데.
은수아의 말에 윤승하는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 검은 위험하다. 윤채린도 저 빛에 속수무책이고 이시우도 칠색을 소환한 은수아와 싸움을 꺼리니까.
윤승하는 임나연 일행과 은수아를 피해서 높은 산쪽으로 향했다.
쾅! 쾅!
뭔가가 터지는 소리. 윤승하는 눈을 찌푸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쫓았다. 그곳에서 윤채린이 흉신악살같은 표정을 지으며 한 학생을 쫓아가고 있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강한남한테 들었어!”
“아니, 씨발. 그게 진짜라고?”
“그렇다니까! 이시우랑 이지아, 임나연이 사귄다고 했다고!”
남학생이 외친 말에,
은수아와 윤승하는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이시우가 누구랑 사귄다고?
“닥쳐. 어디서 헛소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시우는 내꺼다. 이상한 헛소문 한 번 더 내면 네 다리 분질러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아니, 이미 내 다리 부쉈…….”
“닥쳐어─!”
윤채린이 남학생의 팔찌를 분질렀다. 남학생의 몸에 방어막이 생기며 몸이 어디론가 이동했다.
“후.”
머리를 쓸며 윤채린은 화를 식혔다. 화풀이를 강하게 했지만, 화가 식지 않았다.
눈을 돌리다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의 윤승하와 미간을 찌푸린 은수아가 보였다.
“뭐야, 한판 붙게? 안그래도 지금 웬 불여우 같은 것들 때문에 속에서 열불이 나는데, 붙을 거면 빨리 붙고.”
“……그것보다 아까 한 말이 신경 쓰이는데. 이시우가 네꺼라고?
네꺼.
윤승하가 적대적인 눈으로 윤채린을 보며 말했다.
윤채린은 살포시 웃었다.
“응. 몰랐어? 나랑 이시우 사귀고 있는데.”
“……뭔 개소리야. 내가, 내가 지금…….”
윤승하는 열에 뻗쳐서 말하다가 멈칫했다. 은수아가 옆에 있다. 황급히 은수아의 표정을 살피니 은수아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윤채린을 바라봤다.
“파, 파파가 너랑 사귄다고?”
“……파파?”
이상한 호칭에 윤채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파파? 아빠를 말하는 칭호가 아닌가. 이시우가 왜 은수아 파파지.
설마.
이상한 상상을 하던 윤채린은 상상을 멈출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이시우가 이지아랑 같이 텐트를 친 쪽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시우는 생각했다.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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