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상승(3)
* * *
얼굴을 붉힌 채, 딸꾹질을 하는 티타니아를 내버려 두고, 나는 그란데힐을 일으켰다.
그란데힐의 눈은 혼란스러웠다.
놀란 감정과 이것저것 뒤섞인 감정들이 있지만 가장 강한 감정은 감동의 감정이다.
“데힐.”
“네, 폐하.”
“말 편하게 해.”
“……네.”
내가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자 여기저기서 요정족들이 수군거렸다.
역시 왕의 처음을 가져간 반려라던가. 아닌데, 왕님은 처음에 임나연이라는 여자애랑 해서 라던가.
“…….”
내 여자관계가 난잡하다고 소문난 이유의 근원을 어딘지 알 것 같았다.
“크흠.”
헛기침을 하니 요정족들이 수군거리는 걸 멈추고 나에게 집중했다.
하나같이 눈빛이 초롱초롱한것이 부담스러웠다.
평소대로라면 흥미 없다는 듯이 있거나, 내 얼굴만 바라보기 바빴던 놈들인데.
“그런데 어떻게 요정왕이 되신 겁니까…?”
나도 모른다. 아무래도 하늘을 굽어보는 눈이랑 불가해한 감각을 얻을 때, 뭔가 작동하고 그게 영약이랑 시너지를 낸 게 아닌가 싶다.
지식 열람으로 내 상태를 훑었다. 다행히 종족은 바뀌지 않았다.
요정왕이 된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 추론에 불과하다.
천외일문으로 초월경에 들어서 일시적으로 세계수와 동화했고, 요정왕의 시험을 보는 곳에서 불가해한 감각과 하늘을 굽어보는 눈을 얻어서.
‘추론으로는 답을 얻기 힘들다.’
나는 티타니아가 가진 고유능력 동화를 떠올렸다.
티타니아의 동화를 얻어서, 세계수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나는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온갖 남자들을 봐도 관심이 없는 티타니아는 공략이 까다롭다.
그래도 나는 요정왕이니까, 할만하지 않을까.
힐끔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획하고 돌렸다.
‘……어라?’
근데 왜 이미 공략이 돼 있는 것 같지?
***
백화점 안.
사나에는 기분이 좋았다.
마켓에서 이시우 옆에서 이시우와 대화했다. 그 직후, 이시우에게 누나라고까지 불렸다.
“이게 그 그린라이트란게 아닐까?”
“…….”
아키가 아주 잠깐 사나에를 한심하게 바라본 다음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이시우 님에게 주실 선물은 고르셨습니까?”
“시우 님은 매운 걸 좋아하시니까, 매, 매운 건 어때?”
“…….”
아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굳이 따라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나에는 절에서 태어나 절에서 생활했다. 문제는 사회생활이나 그런 것을 애니나 만화로 배웠다는 점과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신분이 문제였다. 절에는 엄격한 사람이 없어, 사나에를 감싸기 급급했다.
그 결과 사나에는 심각할 정도로 순수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기호입니다. 차라리 옷 같은 걸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옷? 그러고 보니 시우 님은 패션 감각이 없으셨지.”
아키는 당황한 눈빛으로 사나에를 바라봤다. 옷의 끝판왕이 얼굴과 비율이다. 이시우는 아키가 지금까지 본 남자 중에서 가장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이시우가 검은색을 좋아해서 검은색 위주로 입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챙겨 입는다. 어디 잡지를 보고 따로 챙겨입나 싶을 정도로.
패션 감각이 없는 건 사나에다. 남방 같은 건 대부분 체크무늬라던가. 아니, 체크무늬도 아키가 겨우겨우 챙겨줘서 그나마 괜찮아 진 거다.
빨간 드레스에 딸기처럼 하얀 점이 찍혀있는 옷이라던가, 시골에서 입을 것 같은 붉은색 겉옷에 보라색 드레스를 입는다던가.
사나에가 비율과 큰 가슴, 얼굴이 좋아서 그나마, 그나마 괜찮은 것일 뿐이다.
“이건 어때?”
주변의 옷가게에서 둘러보고 사나에가 상의와 바지를 가져왔다.
아키는 어두운 눈으로 사나에가 가져온 의상을 바라보았다. 적색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그리고 셔츠 위에 걸쳐 입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 점이 찍힌 겉옷.
이건 완전 삐끼차림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이상한 드라마에 빠지긴 했다.
쓰레기 남자가 삐끼 옷차림으로 달콤한 말로 여주를 유혹하고, 여자를 막 대하는 나쁜 남자가 주인공이었나.
“저, 사나에님?”
“으응? 왜?”
“이런 말씀을 하긴 뭐하지만, 이시우 님은 나쁜 남자와는 가장 거리가 멉니다.”
“그, 그렇지?”
“네. 아카데미에서도 평판이 좋으시니까요. 몇몇 시기 어린 질투로 여자들이 많다고 소문을 내지만, 꾸준히 훈련하시는 걸 보면 헛소문에 가깝습니다.”
“그지? 역시 시우 님이 그럴 리가 없지?”
“다만, 한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이시우 님은 인기가 많습니다.”
“당연하지. 이시우 님인데. 아키 너도 봤잖아~.”
사나에가 마치 제 자랑을 하듯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시우 님을 노리는 여성이 많습니다. 저번에 일본에 왔을 때, 그 여성들이나, 다른 여성들이.”
“……어?”
“사나에님은 이시우 님을 좋아하시지요?”
“다, 당연하지.”
“팬심이긴 하시지만, 그래도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시지요?”
“내, 내가 이, 이시우 니, 님이랑?”
“만약 저 옷을 주신다면, 이시우 님이라면 입어주실 겁니다. 사나에 님의 성의가 있으니까요.”
“그, 그렇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이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이다. 거기다가 상격이면서 나에게 이런 옷을 선물해주는 의미가 뭘까?”
“…….”
“어쩌면 갑질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 그럼 어쩌지?”
“일단……옷을 말하기는 했지만, 이시우 님이 지금 수련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어떤 게 필요할까요?”
“……모르겠는데.”
“……."
"서, 선물은 내가 가장 받고 싶어 하는 걸 주, 주면 되지 않을까?"
"어떤 겁니까."
"이시우 님이 노래하는 영상에 사진을 찍어서 그걸로 커스텀해서 만든 배게?"
"……."
"……여, 역시 좀 그렇지?"
아키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
금요일.
나는 밤새도록 내 상태에 대해서 점검했다. 마력은 문제없었다. 달이 떠오르는 밤에 내 마력은 끊임없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일월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각인이었다.
우선, 마력 회복이 빨랐다. 체감상으로 느끼자면 거의 5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0시 가 되면 그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아직 실험해 보지 않았지만, 12시가 된 시간이라면 일의 힘도 가장 극대화 될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섹스 후의 효능도 알아봐야 하는데.’
어제는 못 했다. 개인적인 점검을 하기도 했고, 주변의 요정들이 너무 몰려와서.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요정족들의 장로와 교감, 대장로 등이 나를 왕으로 깍듯하게 대했으니까.
너무 깍듯하게 대해서 큰일 날 뻔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아예 부대 세 개를 개편하고 나를 상시 호위하려고 한다던가, 그란데힐이 내 반려라는 이유로 무장을 더 챙겨서 주려고 한다던가.
물론 나는 거절했다.
내 행적을 요정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부대 몇 개를 개편해서 내 호위로 둔다면, 마인들이 나를 노릴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꾸는 요정의 화원도 있고.’
꿈꾸는 요정의 화원.
요정왕의 장막에 내장된 스킬이다. 일시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해서 세계수를 소환한다. 여기까지 티타니아의 동화와는 다를 바 없지만, 세계수의 능력은 제대로 쓰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뒤엎는 장점이 있다. 세계수의 영역 내에 있는 모든 요정을 소환하는 능력이 그 요체다.
이건 비장의 한 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마인들에게 새로운 요정왕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니까.
나는 조용히 손을 폈다. 파직! 번개가 끓어오른다. 동시에 불꽃이 피었다. 일월을 각성한 뒤로, 이렇다. 밤에 번개를 사용하면 번개에 냉기가 깃들고, 아침에 사용하면 불꽃이 깃든다.
“비염.”
나는 비염을 불러봤지만, 비염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잠을 자는 건가.
할 일이 많다. 비염을 강화해야 하고, 검강을 다루는 법도 익혀야 한다. 그리고 일월로 내 여자들도 강화해야 되고, 선 성향의 동료들을 모집하고 강화해야 한다.
요정족들도 강화하며, 가면으로 능력도 얻어야 한다. 현재 가장 탐나는 건 김은정의 뇌광.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학생의 신분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슬슬 염두에 둬야 겠다.’
자퇴.
학교에서 더 얻을 것은 없다. 이미 히어로 아카데미의 오너인 여왕과 비교되는 권력을 얻었으니까.
만약에.
내가 처음에 천의 가면과 지식 열람, 천수를 고르지 않고 다른 루트를 골랐다면, 한 학기가 끝나고 아카데미를 떠날 채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지금에서야 확신한다. 잠재력 자체는 이쪽이 높다. 그리고 나는 내가 세워둔 계획보다는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몇 가지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전부 좋은 쪽으로 흘렀다.
‘자퇴를 한다면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지.’
협회.
협회로 가면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김은정이 내 뒷배가 되어줄 것이다. 내 팀을 꾸리고 협회의 권력으로 한국의 어두운 부분을 도려낼 수 있다.
길드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협회에 비하면 좋아질게 없다.
돈이나 영약 같은 것은 지원받을 수 있지만, 돈은 꽤 있는 데다가, 영약은 요정족의 보물고를 털면 되니까.
나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 당장 급할 건 없으니까.
“…….”
눈앞에 강한자 교수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음. 좋은 아침이구나.”
강한자 교수가 나를 가늠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거다. 천수로 인한 내 마력 수발은 어지간한 상격들 조차도 한 수 접어준다.
아마 김은정 정도나 그 위의 격을 가진 상대나 내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겠지.
다만, 완전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 눈동자가 변해서 무언가 얻었으리라 확신하고 있을 거다.
내가 상격에 들어선 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무단으로 수업에 빠져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깨달음이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시우, 너는 내가 본 학생 중에서 가장 성실하고 성취가 빠른 학생이니까. 교수들을 통해 자기가 얻은 성취를 보여주면 출석 일수는 다 보장될 거다. 시험이나 실기는 당연히 안 되고.”
그사이에 시험을 봤나.
상관없기는 하다. 나는 이론에서 항상 만점을 받아서, 시험 한두 개 빠져도 점수에는 큰 변동이 없으니.
그리고 이제 와서 성적에 연연하기도 좀 그렇다. 내가 얻을 게 없어서.
“네, 괜찮습니다.”
적당히 안부 인사를 묻고 강한자를 뒤로 했다. 좀 더 걷자니 윤채린이 나타났다.
“야! 이시우!”
윤채린이 나를 보자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뭐냐. 왜 이리 강해졌어.”
윤채린이 가진 용사의 혈통. 그리고 초감각 때문인가. 윤채린은 강한자와 다르게 나를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아공간에서 꽃 하나를 꺼냈다. 별빛 백합. 별빛을 머금은 것처럼 잎이 반짝거려서 지어진 요정족의 약초다.
하지만 이뻐서 내가 하나 가져왔다.
“여기 선물. 오다가 주웠어.”
“…흐음.”
묘한 눈으로 나를 잠시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번만 봐준다.”
그리고는 살짝 걸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오늘 일정 비워놔라. 누나가 우리 시우 겁나게 따먹어 줄 테니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누굴 따먹는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