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활동(2)
* * *
“일단 살았나.”
나는 얼어붙은 한종우를 바라보았다. 아슬아슬하게 한종우를 방패로 삼아서 나는 리타이어 되지 않았다. 공격력과 비교하면 몸이 종잇장인지라, 저거에 맞았으면 무조건 리타이어 했을 거다.
얼어붙은 한종우가 눈알만을 움직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천의 가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진한 분노.
천영의 꽃은 모든 것을 얼리는 겨울의 꽃이지만, 한종우가 가진 마갑은 모든 것에 저항하는 억겁의 갑옷이다.
저항력 하나만을 따지자면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압도적이지 않을까할 정도로 높으니까.
용갑까지 완전하게 개화했으니, 이제 용족 정도가 아니면 한종우에게 비비기도 힘들 거다. 아니면 일본에서 봤던 신념의 방패 정도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거다.
아마 이 상태로 5분 정도 지나면 다시 풀리겠지만.
“미안하고, 고맙다.”
나는 검을 한종우에게 겨눴다. 그러자 배리어가 지잉하고 생기더니 한종우를 보호했다. 한종우가 나를 강하게 노려봤다. 분노의 감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참 안타깝다.
한종우가 가진 마갑이 고유능력이 아니라 특성이었다면 지식 열람에 넣어서 필요할 때 급하게 쓸 수 있을 텐데.
가면은 안된다.
작성 자체가 안될뿐더러 나는 여자만을 좋아하니까.
배리어가 작동된, 주변의 학생들이 어디론가 전송되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1p는 챙겼다. 이걸로 내가 가진 포인트는 총 5p인데.
나는 주변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대해의 마나가 마나를 빠르게 회복해주고 있다. 남은 마나는 대략 40% 정도.
뇌혼은 아마 이번 실습에서 쓰기 힘들 거다. 유아독존까지 썼으니 몸을 좀 사릴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얌전히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하늘을 굽어보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애들이 꽤 흩어져 있다. 그 수는 대략 60명 가까이. 조금 전 싸움의 여파로 애들이 모였다.
쯧.
나는 혀를 낮게 찼다.
눈으로 둘러보며, 동시에 불가해한 감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애들에게 안 들키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학생 중에 마냥 무시할만한 애가 없는 데다가 정한서가 애들을 지휘하며 빠르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불완전하다. 포위망에 빈틈이 두 군데가 있다. 각각 상위권 한 명이 들어가 있는 조들이었다. 지식 열람으로 상태창을 훑어보니 각각 기교파와 힘을 쓰는 강한남 같은 과였다.
파지직.
화르륵.
불꽃과 번개. 그것이 합쳐진 뇌광염익을 꺼냈다. 그리고 빠르게 기교파 쪽으로 달려든다. 힘을 쓰는 무식한 탱커를 잡으려면 일시적으로 화력을 내서 무너트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시간도 잡아먹고 마나도 줄줄 샌다.
기교파는 반대로 쉽다. 같은 기교파가 만난다면 기교는 더 우위인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가져간다. 그리고 나는 천수의 힘으로 상격들 조차도 기교로 싸우려고 하지 않는 특출난 기교파.
“이시우다! B3 지점에 이시우가!”
나를 발견한 학생이 크게 소리 질렀다. 눈여겨 봐둔 상위권의 학생이 창을 꺼냈다. 그를 보조하려는 듯, 버퍼 한 명과 탱커 한 명, 그리고 활을 든 학생이 나를 견제하려고 활시위를 당겼다.
어검.
어검을 모방한 가면을 쓴다. 검이 한 자루에서 두 자루로 늘어난다. 그리고 둥실뜬 검은 재빠르게 궁수를 향해 쇄도했다.
탱커로 보이는 학생이 글라디우스를 내팽개치고 방패를 두 손으로 잡았다. 검을 쓰면 나한테 패링으로 잡아먹히니까 방어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나쁘지 않다.
퉁.
방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지르는 것은 장(?).
동시에 뇌광염익을 휘둘렀다. 한쪽의 날개가 수 갈래로 갈라지며 탱커를 공격했다.
동시에 장을 내지른 손을 주축으로 반발력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천수. 극에 달한 재주가 있기에 가능한 기교.
내 몸쪽으로 창이 내질러진다.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창을 내질렀다. 몸에 익었다는 증거다. 훈련을 빼먹지 않고 몸에 때려 박았다. 강한자라면 점수를 크게 줄 것이다.
나는 손을 뻗었다. 창을 붙잡으며 뇌광염익을 휘둘렀다.
불꽃과 번개가 조화된 날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다. 창을 내지른 학생이 크게 기함하며 몸을 굴렸다.
그러나 내가 더 빨랐다. 미리 날려둔 발에 학생의 머리가 닿으려고 했다.
지잉하고 투명한 배리어가 생성되었다. 교수들의 빠른 판단으로 내 발차기가 학생의 머리에 닿아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로 1p는 더 벌었군. 어검을 이용해서 버퍼를 향해 날렸다.
어검에서 뇌광이 솟구쳤다.
그리고 버퍼의 몸에 배리어가 생기면서 리타이어.
나는 뇌광염익을 거두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슬슬 애들이 몰려오고 있어서 2p는 수집하지 못한 게 안타깝네.
***
학생들을 습격하면서 야금야금 포인트를 수집했다.
그 수는 무려 15p.
은수아는 얼마나 모았을까.
윤채린이나 윤승하가 다른 애들한테 리타이어를 당하지 않았다고 전제를 가정하면 우리가 무난하게 2등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미로 바깥으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오니 나에게 먼저 리타이어를 당한 애들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나는 대충 구석진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려다가 놀랐다. 이미 리타이어 된 사람에 윤승하가 있어서.
“이열~. 오랜만에 활약 못 하니까 인간미 있어 보이고, 좋네.”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온 정한서가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턴 인간미 없이, 다 털어버린다.”
“……나만 좀 봐주라.”
정한서와 실없이 농담하고 있을 때, 은수아가 나왔다. 은수아를 바라보다가 나는 꽤 놀랐다. 생각보다 많이 다쳐서.
옆을 보니까 윤채린이 거의 죽을락말락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설마 윤채린하고 한 번 더 붙은 건가.
그러면 은수아도 포인트는 얼마 못 벌었을 것 같은데.
“자! 그럼 오늘 결과를 발표하겠다!”
강한자가 손뼉을 치고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순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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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임나연, 김하린, 제인, 크레임95p
2등이시우, 은수아30p
3등윤승하, 윤채린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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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연 파티가 윤승하를 잡았구나. 그래도 우리 성적도 썩 나쁘지는 않다.
나는 윤승하에게 시선을 옮겼다. 윤승하가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천의 가면으로 살펴보니 부정적인 감정들이 컸다.
어쩌면 훈련을 명목으로 이번엔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잠깐 윤승하와 윤채린이 공유하는 특성을 떠올렸다.
용사의 혈통(S+)
빈사 상태가 되어도 일시적으로 전투를 지속하게 해주는 전투 속행. 정신력을 올려주며 언제 어디서든 최상의 힘을 발휘해주는 불굴 등 전투에 유용한 특성들의 집합체이다.
또한, 빈사 상태로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무적이 되며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다.
평소에도 온갖 수련치에 보정을 주고, 활력을 더 한다.
여기에는 숨겨진 특성이 있어서 지식 열람과 같은 등급을 받았다.
뭐, 여하튼 용사의 혈통이란……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녀들의 피에 용사의 피가 있다는 말이다.
용사.
여러 가지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왕을 멸하기 위해서 이세계에서 그녀를 부른 존재들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아마 시리즈 2가 나오면 이것에 대해서 다루겠지, 생각했었으니까.
다만,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세계를 멸망시킨 용사.’
세계를 구원하고자, 그 세계를 멸망시킨 신념을 가진 여성이었다. 저 둘은 그녀의 피를 짙게 이었다.
세계를 구원하고자 불렀으나, 이윽고 세계를 멸망시켜버린 여자.
용사이되, 그 직업이 가진 상징성에 반하였던 용사.
그렇기에 멸망의 용사.
“그럼 순위에 따라서 상품을 분배하겠다. 1등인 임나연 조는…….”
강한자가 상품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강한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상품들을 훑었다.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교환하려고 말이다.
***
수요일 점심.
나는 오랜만에 점심을 혼자 먹게 되었다. 애들 대부분이 이미 점심을 먹거나, 약속이 잡혀서 바깥으로 나가게 돼서.
나는 티타니아 님이 호출해서 다음 수업에 빠지고 티타니아 님한테 가기로 했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덕분에 바로 전에 까지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카데미 앱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들어가 볼까.
추천을 많이 받은 추천 게시글에 보니, 이번에 윤승하가 잡혔다는 것에 대한 글이 많았다.
[ㅋㅋㅋㅋㅋ윤승하 쉨 드디어 잡힘?]
[응~념글 가는 게 더 이득이야~]
[부산 명문 야구 왕조 킹데 3년 연속 통합 우승 실화냐?]
[ㅋㅋㅋㅋㅋ윤승하 쉨 드디어 잡힘?]
ㄹㅇ신나네.
그 새끼 나른하게 하품하면서 사람들 내려다 보는 거 ㅈ 같았는데
ㄴ이 새끼 념글가서 자살하게 추천 ㄱㄱㄱ
ㄴ이 새끼 윤승하 팬클럽이 무섭지도 않나?ㅋㅋㅋㅋ
ㄴ윤승하 팬클럽 수 국내에만 5만 명 넘었다. 조심해라 게이야…
ㄴ그것밖에 안 댐?
ㄴ요즘 누가 카페에 가입함? 스타그램이나 얼굴책가지. 글구 걔 활동 전혀 안 함. 오히려 5만이 ㅈㄴ비정상적인거임.
ㄴ작성자 : [대충 피에로가 활짝 웃으며 입에 손을 모은 사진]
응~상관없어~한강 가서 자살하면 그만이야
ㄴ이새끼ㅋㅋㅋㅋㅋㅋ
[응~념글 가는 게 더 이득이야~]
[대충 배경이 하늘인데 투명한 피에로가 활짝 웃으며 입에 손을 모은 사진]
한강 가서 자살하면 그만이야
ㄴ짤이 왜 진화하냐ㅋㅋㅋㅋㅋㅋㅋ
ㄴ짤 씹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이미 가버렸네ㅋㅋㅋㅋㅋ
대충 훑어보니 윤승하가 잡혔다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익은 두 명이 보였다.
무녀복을 입은 사나에와 정장 차림을 한 아키가 보였다.
재밌는 것은 사나에가 굉장히 단정하게 있다는 것. 삐죽삐죽 솟은 머리는 꽤 단정해졌고, 얼굴에는 옅은 화장기가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앗, 아, 안녕. 조, 좋은 아침이에요.”
사나에가 어색한 말투로 나를 반겼다. 아키의 표정을 보니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것 같다.
“점심을 드시려고 오신 겁니까?”
“네.”
“그럼 저희와 같이 합석하시겠습니까?”
아키의 말에 사나에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아니면 밥은 나 혼자 먹었어야 했으니까.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서일까.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혹시 여기서 추천해주실 만한 메뉴가 있으신가요?”
하루히 아키가 정중하게 물었다. 추천해줄 만한 메뉴라.
“매운 거는 좋아하세요?”
“사나에 님은 매운 거 못 드신…….”
“저 매운 거 잘 먹어요.”
아키의 말을 사나에가 잘랐다.
그러고 보니 사나에는 매운 거에 엄청 약하다는 프로필이 있었다. 아키는 매운 것을 엄청 좋아하는데 사나에가 약해서 아쉬워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그러면 한정식 같이 드실래요? 아, 아키 님은 마파두부 어떠세요. 여기 마파두부가 매우면서도 맛있는데.”
“진짜요?”
“네. 중국집에서 유명한 쉐프를 모셔왔다고 하더라고요. 중국 유학생 말에 따르면 사천의 마와 랄을 느낄 수 있다던데.”
“……그렇군요.”
아키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사나에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아키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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