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나태(2)
* * *
바티칸.
성 십자기사단.
이 이름을 좋아하는 기득권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으로 마를 섬멸하며, 대가를 거의 받지 않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기득권층은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뒤가 더러운 기득권층들이.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인이라고 판단되면 권력이나 무력, 그런 것에 상관없이 상대를 체포하려고 하니까.
저들은 권력이나 재력 등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신성력.
믿음이 힘으로 작용하는 이능??.
그것이 저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네요!”
릴리의 소녀가 활짝 웃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군. 너도 여기에 있었나.”
느끼한 말투로 나탈이 인사했다.
“아는 애들이야?”
“네, 저번에 방학 때 협회에서 만났거든요.”
“바티칸…!”
윤채린이 별로 좋지 않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윤채린은 한때 마기를 다뤄서 바티칸에 잡혀서 고문을 당할뻔했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엔 웬일이야?”
“음, 아직은 말씀드리기 좀 곤란한 일이라.”
릴리의 소녀, 엘리스가 조금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나는 이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나태의 산양을 잡기 위해서다.
나는 바티칸에서 온 이들의 면모를 훑었다. 신념의 방패부터 시작해서 성실의 깃발, 절제의 검 등등. 하나같이 화려한 이들이었다.
Tv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프로필들이 더 유명한 이들.
나는 그들을 힐끔 바라보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백금발의 머리를 올백 머리로 올리고, 하얀색으로 도금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성기사가 보였다.
절제의 검, 엘도르라 불리는 이였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시우 씨 맞으시죠? 저희 엘리스랑 나탈이 많이 신세 졌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에요, 엘리스랑 나탈이 워낙 싹싹하고 능력있는 애들이라 오히려 제가 더 신세를 졌습니다.”
엘리스와 나탈을 칭찬하자, 엘도르가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리스와 나탈은 교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차기 성자와 성녀다. 그리고 엘도르는 그들을 키우는 부모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엘도르를 공략할 때는 그녀를 칭찬하는 것보다 엘리스와 나탈을 칭찬하면 호감도가 쭉쭉 오른다.
“그런데 시우 님은 이곳에 어쩐 일이세요?”
엘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봤다.
“임무 때문에.”
윤승하가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임무요? 아, 그러고 보니 히어로 아카데미에는 그런 제도가 있었죠.”
“응, 그래서 방금 던전 돌고 와서 피곤한데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윤채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을 깨고 와서 피곤한 건 아니었다. 그냥 새로운 여자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그 때 입구 쪽이 웅성거렸다. 붉은색과 하얀색이 조화를 이룬 무녀복을 입은 사나에와 일본 전통 복장을 한 검성이 등장했다.
검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주변을 훑다가 눈이 커졌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명성이 화려한 이들밖에 없기 때문일 거다.
“이곳은 어쩐 일로 오신 거죠? 바티칸에서 일본에 올 이유는 없을 텐데.”
검성이 날카로운 어투로 물었다.
“아, 별거 아닙니다.”
신념의 방패가 멀겋게 웃었다.
“거악, 나태의 산양 봉인을 확인하려고 왔을 뿐이니까요.”
“나태의 산양은 잘 봉인되어 있습니다.”
신념의 방패에 말에 검성이 나타나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일본의 이상 현상들이 있지 않나요? 얘를 들어 던전으로 향하는 헌터들이나 영웅들이 갑작스레 무기력해 진다든가, 시민들이 나태해 졌다던가.”
“…….”
“검성님의 입장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는 확실히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만약, 그럴리는 거희 없겠지만, 만약에 나태의 산양이라는 마왕이 부활했을 가능성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아시지요? 정말로 나태의 산양이 부활했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봉관의 무녀 님도 함께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신념의 방패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곧바로 신사로 향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일행 전부를 데리고 왔다.
반쯤 무너진 건물들은 어느새 복구되었다.
마법과 과학. 그것들이 합쳐진 마법 공학은 하룻밤 만에 빌딩을 완성할 수 있을 정도니, 이 정도는 이 세계에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럼 확인하러 가보겠습니다.”
일행은 신사 중앙에 있는 곳을 향했다.
“이곳이 마왕이 봉인된 곳…….”
윤승하가 중얼거리며 한 곳을 응시했다. 검은색의 쇠사슬이 수백 개가 칭칭 묶인 사당이 보였다.
온갖 부적은 물론 십자가나 성수들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장소. 그 아래는 땅이 마기에 물든 듯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건재하군요.”
검은색의 쇠사슬로 칭칭 묶인 곳을 바라보며 신념의 방패가 말했다.
"그런데 왜 나태의 징조가…."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흙이 보였다. 이 흙 아래에 산양이 잠들어 있다.
머릿속으로 산양 공략법을 정리했다.
산양은 깨어나자마자, 주변의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시작한다. 인간으로 치면 그저 기지개를 피는 행위. 그 행위로 이 주변의 반경 100m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태의 공략이 시작된다. 검성의 검과 무녀가 가진 거울로 곡옥의 봉인을 풀고, 그것을 해방하여 일시적으로 얻는 능력으로 나태의 산양을 죽인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삼신기의 해방이 가장 중요하다. 애초에 그게 없으면, 시작도 할 수 없는 거라.
‘내일이 바로 결전의 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상격의 영웅만 6명 이상은 되었다. 검성, 봉관의 무녀, 검주, 절제의 검, 신념의 방패, 성실의 깃발.
그리고 펜던트로 언제든지 김은정을 호출할 수 있다. 그렇게되면 나태의 산양을 상대로 생각보다 할만할지도 모른다.
“다행이군요. 아직 마왕은.”
신념의 방패가 입을 열었다.
이변은 갑작스러웠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불가해한 감각」이 온 몸에 경종을 울렸다.
이곳은 위험하다. 당장 도망쳐라.
몸속의 뇌령이 반응했다. 파직. 뇌령이 신경을 내달렸다.
머리가 자기장에 의해 삐죽삐죽하게 솟았다.
주변을 살피기도 전에, 조용하게.
내 눈앞에 산양의 인형 같은 것이 보였다. 50cm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검은 양이.
산양의 뿔. 검은색의 털로 덮인 노란색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검은색의 산양이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 무엇이지? 어째서 냄새가 이렇게 짙게 나는 거지?]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나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
동시에. 수십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거검이 산양에게 쏘아졌다. 빛이 사방에서 뿜어지며, 쇠사슬이 차르륵소리를 내며 산양에게 쏟아졌다.
빛이 폭격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성스러운 빛의 줄기들이 내 쪽으로 쏟아졌다. 나는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성가대!”
방패가 다급하게 외쳤다.
──────!
아름다운 소리가 흘렀다. 청아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적을 견제하면서 아군에게 버프를 주는 능력이었다.
[이건 좀 귀찮은데.]
산양이 느릿하게 말했다.
말이 머리에 새겨지듯 울렸다.
산양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언뜻 보면 앙증맞은 주먹. 그러나 그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
쨍그랑한순간에 수십 배로 커진 양의 발톱이 모든 빛을 깨트렸다.
마치 유리가 깨져나가듯 빛 조각들이 흩어졌다.
“커헉!”
“쿨럭! 쓰러지지 마라! 이곳에서 마왕이 부활하면, 이 나라는 끝이다!”
산양의 일격으로 성가대 일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검성이 검을 들었다. 순간적으로 검성이 ‘거대’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녀!”
검성이 소리 지르듯 외치며 달렸다. 사나에가 거울을 꺼내어 검성을 비추었다. 그러자 검성의 몸이 분열했다. 한 명에서 두 명으로.
거울의 효과였다.
남다윤이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절제의 검이 휘광을 두르며 산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성실의 깃발이 깃발을 땅에 꽂으며 주변에 있는 존재들의 기운을 북돋았다.
수백자루에 달하는 검이 하늘을 빼곡히 감쌌다.
검성의 몸이 분열하며 검강을 뿌렸다. 절제의 검이 휘광?光을 두른 채, 산양의 등 뒤를 노렸다. 신념의 방패가 산양의 앞을 막았다. 빛이 하늘에서 내리며 아군의 기운을 북돋았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순간에 산 따위는 날려버릴 힘이 산양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 모든것을.
───────────────!!!!
한 수.
이질적인 검은 기운이 팔 한쪽을 뒤덮더니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그것으로 빛이 깨져나가며, 하늘을 채운 수백 자루의 검이 유리처럼 비산했다. 검성은 검을 휘두른 팔째로 사라졌고, 절제의 검은 복부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끄아아아악!"
[뭐, 부활의 신고식으로는 나쁘지 않네]
산양은 느긋하게 말했다.
가볍게 찢어버린 검성의 팔을 입에 넣으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