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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156화 (156/298)

〈 156화 〉 검은 산양(8)

* * *

“시우는 뭐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누나가 사줄게.”

남다윤이 물었다. 먹고 싶은 거라. 생각이 없다. 조금 전에 신사에서 잔뜩 먹고 와서. 그래도 한창 활발한 육체니 금방 꺼져서 억지로 구겨 넣으면 들어갈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사드릴게요. 안 그래도 계속 누나한테 받기만 하는데. 혹시 누나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는 시우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가장 힘든 대답이 나왔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유명한 건 초밥이나 횟집이다. 그러나 이건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먹는 거랑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점심에 임나연이 추천해 준 가게는 꽤 괜찮았는데, 거길 또 가기는 좀 그렇고. 그냥 어제 저녁에 갔던 가게로 다시 갈까.

“그런데 시우는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거야?”

“일본에서 저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요.”

“하긴, 윤채린하고 대련하는 거 협회에서도 엄청 화제였었으니까. 우리 팀원들도 내가 시우랑 가까이 지내니까 부러워하는 눈치더라.”

“그래요? 다윤이 누나 팀원 정도면 다들 뛰어난 편 아니에요?”

“……다윤이 누나. 응, 다들 뛰어난 편이지. 하지만 시우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없거든. 중격 이상은 전부 30세 이후에 중격이라는 칭호를 달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일본에 아는 애가 하는 가게가 있는데 거기로 갈까? 마침 여기 근처니까 거리도 가깝고.”

“네, 그러면 거기로 가요.”

남다윤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문자를 넣었다. 그러자 바로 진동이 울렸다.

“됐다. 마침 자리 하나가 비었다고 하네. 저번에 집에 있었을 때, 시우가 장어 잘 먹길래 장어 정식으로 했는데 괜찮아?”

“……네.”

*

밥을 다 먹고 난 뒤,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밥은 맛있었다. 수상쩍어질 정도로 굴 요리하고 장어요리가 많이 나와서 그걸 억지로 먹느라 속이 좀 더부룩했다.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서 입가심으로 커피를 시킨 후 바깥으로 나왔다.

“근데 일본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많이 바쁘셨을 텐데.”

“김은정 님이 부탁하셨거든. 뭔가 좀 찝찝하다고 하셔서 말이야.”

남다윤이 잠깐 뜸을 들였다.

“……그리고 시우도 있다고 했으니까.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해서.”

얼굴을 조금 붉히며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했다. 나는 괜스레 얼굴이 후끈해져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입 마셨다. 조금 씁쓸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남다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애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기도 해서. 나랑 남다윤은 걷기 시작했다.

***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윤승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나른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눈에 익숙한 여자가 보였다. 완연한 밝은 푸른색의 장발을 가진, 임나연이 있었다.

임나연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

경멸과 혐오가 섞인 부정적인 시선. 일순간 그것을 느끼며 동시에 사라졌다. 방긋­하고 감정마저 지운 채 임나연이 웃었다.

윤승하는 조용히 조소하며 거울에 기대었다. 어렸을 적부터 온갖 시기와 질투는 받아보았다. 아비 없이 자란 모자란 것. 출생이 천해서 행동거지가 바르지 않다 등등. 많은 말들과 시선에 노출되었지만, 이건 꽤 색달랐다.

물론 그것이 좋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드륵­하고 닫히려는 찰나. 발 하나가 문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문이 다시 열렸다. 태연하게 웃으며 윤채린이 들어오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급해서…….”

윤채린은 미안해하며 들어서다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정적.

불편한 침묵이 내리 앉았다.

임나연은 조용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윤승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윤채린은 짝다리를 짚으며 기대었다.

윤채린은 이 둘이 퍽 불편했다.

윤승하는 자기 가족이지만, 동시에 이시우를 사랑하는 연적이기도 하였다. 저번에 자신이 관심이 있다는 걸 넌지시 알리자, 둘이 팔짱을 끼는 사진이라던가, 이시우와 관계를 맺으며 이시우의 복근이 은근슬쩍 드러나는 사진 등을 찍어서 보냈다.

임나연은 불편했다.

뭔가 일이 있을 때마다 이시우에게 달라붙으며 귀여운 척을 하는 것도. 대한민국에서 돈이 가장 많은 가문의 외동딸이라는 것도. 그리고 평소에는 헤실헤실하며 바보같이 보이지만, 속내를 감추는 게 엄청 능숙하다는 것도.

불편함이 자리 잡은 공간.

엘리베이터의 칸이 하나씩 내려갈수록 불편한 침묵은 더 심해졌다. 띵­문이 열리자 윤채린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추었다.

붉은 장발의 미남이 보였다.

검성??.

윤채린은 솔직하게 말해서 과분한 칭호라고 생각한다. 저 정도면 상격이라도 꽤 해볼 만한데. 윤채린은 감각으로 가늠해보았다.

…진짜로 싸우면 이겨볼 만 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보다가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이 눈에 띄었다.

“천총운검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네. 꽤 좋아 보이네요.”

윤채린의 말에 코무로 테츠야가 살짝 웃으며 답해주었다.

“무인이라면 당연한 관심입니다. 저도 천총운검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검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당장 일본에 있는 마사무네나 영국에 있는 엑스칼리버, 한국의 칠지도,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중국의 간장과 막야…….”

거기까지 말하던 코무로 테츠야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다정하게. 남다윤과 함께 오는 이시우가 보였다. 코무로 테츠야는 슬쩍 웃으면서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런데 남자친구분이 검주 님이랑 꽤 다정해 보이시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인이라고 착각할 만큼요.”

윤채린은 잠깐 멍했다. 지금 나한테 그 말을 한 건가. 하긴, 나만큼 이시우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또 없지.

“…뭐, 그렇죠.”

윤채린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참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검주님에게 찝쩍거렸을 때, 눈치 없는 남자라 욕했지만, 지금은 꽤 보는‘눈’이 있어 보이는 걸로 평가를 수정했다.

“죄송한데, 채린이는 시우 여자친구가 아닌데요.”

싸늘한 목소리로 임나연이 말하자 코무로 테츠야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에이, 뭐 그럴 수 있죠. 아직은 아니니까요. 아직은.”

윤채린은 아직은을 강조하면서 히죽­하고 웃었다. 싸늘한 시선이 두 개 꽂혔다. 윤승하와 임나연의 시선이었다.

***

쟤네는 지금 뭘 하는 거지.

코무로 테츠야가 중간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윤채린과 윤승하, 임나연이 서로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코무로 테츠야가 일본을 대표하는 상격의 영웅지만, 그래도 임나연에 비하면 몇 끗발은 딸린다.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세상이라.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임나연의 가문 혼자서 일본 경제를 완전히 짓밟을 수 있는 수준이다. 나는 눈을 아래로 돌렸다. 검성이 허리춤에 달고 있는 검집.

천총운검.

“저 검이 보고 싶니?”

남다윤이 넌지시 물었다.

궁금하다고 하면 바로 뺏어올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히가미 사나에는 황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히죽거리면서. 저러니까 좀 기분이 나쁘긴 하네. 왜 저 나이를 먹으면서 연애도 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 오셨군요. 이시우 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코무로 테츠야가 나한테 다가오면서 말했다.

“이번에 이시우 군이 저희가 벼르던 나태의 사도를 잡아 주셔서 일본 정부에서 상과 함께 상금이 나올 예정입니다. 혹시 따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원하는 거라. 별로 없는데.

돈이야 충분히 있다. 원화가 강세인 세계라서 환율이 좀 이상할 정도인데, 내 통장에는 정말, 진짜, 원화가 많아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본에서 받을만한 게 있나.

지파의 약초를 받아서 약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나 감응력을 올려주기 때문에 샤오메이가 요즘 전전긍긍해 하며 약을 많이 받고 싶어 하고 있어서. 다만, 약초가 없어서 요즘은 많이 못 만드는 실정이었다.

약초를 받는다면 지파의 약의 재료 하나가 유출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호, 혹시 워, 원하시는 게 따, 따로 있으시면 저, 저도 도와 드릴게요. 나, 나태의 사도는 매, 매번 저희 시, 신사를 노려서 저희도 고, 골칫거리였거든요.”

은근슬쩍 히가미 사나에가 내 근처로 오며 머뭇거리고는 말했다.

나는 히가미 사나에를 슬쩍 바라보았다. 천의 가면으로 살피지 않아도, 그녀가 나에게 가지는 호감도는 꽤 높았다.

“그러면 혹시 이렇게 생긴 약초를 주실 수 있나요?”

나는 아공간 팔찌에서 지파의 약초를 하나 꺼내었다. 그러자 검성이 나를 조금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네! 무, 물론이죠! 저, 저희 신사에서는 그냥 보관만 하고 있어서, 써, 썩지 않을까 고, 고민했던 물건인데!”

히가미 사나에는 마음껏 가져가라고 말을 했다. 하루히 아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경쟁심을 느끼던 검성도 주겠다는 확언을 받았다.

***

다음 날.

우리는 일찍 호텔을 나섰다. 멤버는 나와 윤채린, 윤승하, 남다윤이었다. 던전을 깨러 가는 거라 임나연하고 김시연은 호텔에 남기로 했다. 어제 전투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니고, 그냥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기야?”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고,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벽 끝에 이끼로 가득한 곳을 바라보며 윤채린이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해한 감각」이 묘하다는 감을 보내고 있다. 「하늘을 굽어보는 눈」이 마력 파장을 보며 이곳이 던전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과연 절세의 감각들이다. 윤채린도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것을 보면.

나는 어검으로 검 두 자루를 복사했다. 그리고 이끼 쪽으로 검을 조종해서 걷어내니 1m 남짓한 구멍이 보였다.

“들어가자.”

우리는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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