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검은 산양(6)
* * *
모종의 이유로 마력이 단절되어버린 시대가 있었다.
온갖 영웅들과 신화, 괴물이 공존한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변혁을 겪으며, 마나를 다루는 존재들과 영웅, 신들과 괴물은 시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약 40년 전, 마나는 다시 세상에 퍼졌다.
다시 괴물들이 흘러넘치며, 영웅들이 나타나고, 신들이 존재하는 세상.
별의 시대.
그 시대에서 사도는 보았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나라 하나를 지도에서 없애버린 산양을. 거악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모습을 한 산양을 말이다.
사도는 이기적인 남자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내다 버릴 그런 인물.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광신도이다.
산양의 봉인을 푼다. 그 명제로 사도는 인간임을 포기했다.
몸 안에서 나태의 힘이 반응했다. 질척질척하고 거무튀튀한, 이질적인 어둠이 흘러나왔다.
마기.
어둠의 일족, 마족의 힘과 비교해도 그 힘은 굉장히 이질적이다.
더 어둡고, 더 질척한. 그러한 어둠.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그런 힘. 그것이 사도의 몸을 잠식했다.
쩌억.
사도의 입이 찢어진다.
아래로 길게. 입이 어둠 속에서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무언가 거뭇거뭇한 것이 자기 몸을 잠식하고, 정신마저 침식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산양에게 더 가까워졌다.
***
────────────!!!
구름의 저편에서 무언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게임 속에서 나온 형용사 그대로였다. 인간인 것 같지 않은 것의 언어.
드디어 2페이즈인가.
우우웅─하며 검은색의 왕관, 유아독존이 반응했다. 힐끔 하고 주변을 훑어보니 윤채린이 눈살을 찌푸렸고, 윤승하가 노려보고 있었다.
마인화.
마인들이 계약을 통해 몸에 마기를 완전히 받아들여, 괴물이 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검은색의 산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족보행을 하는, 옛 신화의 소머리를 한 괴물과 같은 모습.
[후. 인간의 몸을 포기한 대가가 이리도 크다니. 산양께서 나를 총애하는 증거인가.]
날카롭게 퍼지는 금속음같이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타닥!
빠르게 윤채린이 진각을 밟았다. 자전섬뢰로 반으로 갈라진 구름이 윤채린의 지배하에 그녀의 손에 모였다. 그것이 우웅─소리를 내었다.
천상의 마.
나태의 사도가 흩뿌린 마기가 윤채린의 양쪽 손아귀로 모이며 그것이 구체가 되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의 륜이 윤채린의 손아귀에 뭉치며 회전했다.
동시에 흑룡이 몸을 틀며 입을 쩍하고 벌렸다. 입에서 회색의 륜이 모였다.
끼익.
천마신결오의
멸겁륜???
굉천륜???
파천륜???
합체기
삼합연환륜三???
[그런 거에 맞아줄 것 같으냐?]
산양이 높이 뛰어들었다. 곧장 윤승하가 보조했다. 중력이 산양의 몸을 짓누르고, 그 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빛이 반짝거리며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진 창이 쏟아졌다.
검은 산양이 빛의 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어둠이 폭사하며 빛의 창을 지웠다. 어마어마하게 상승한 능력치. 그러나 전투하는 법이 너무 무식하다.
차르르륵사슬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양이 고개를 돌렸다. 봉관. 거악마저 봉인했다고 알려진 사슬이 수십 개가 산양을 향해 쏘아졌다. 산양이 힘을 모았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 산양의 입에 모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방출한다.
그 어떤 기교도 없는 단순함. 그러나 무식하기 그지없는 힘으로 사슬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짜식, 힘만 더럽게 무식해졌구나!”
그 속에서 윤채린이 나왔다.
[내가 너를 모를 줄 알았더냐?]
산양이 오만하게 답하며 팔을 뻗었다.
쩌저적. 팔이 얼어버렸다. 허공에서 꽃이 피었다. 천영의 꽃. 일순간 가공할 냉기가 산양의 몸 전체를 얼렸다. 그러나 산양은 몸을 뒤틀며 얼어붙은 몸을 털었다. 그 아주 잠깐의 틈. 눈을 한번 깜빡일 정도의 지극히 짧은 시간.
“나이스!”
그 시간을 윤채린을 놓치지 않았다.
세 개의 륜이 산양의 배에 틀어박혔다. 세 개의 륜이 동시에 회전하였다. 캬가가가각! 륜들이 회전하며 산양의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한계까지 회전한 륜들이 폭발했다. 콰아앙!
[크아아악!]
산양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원소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거대한 검 조각들이 산양을 향해 날아갔고, 중력이 산양을 짓누르며, 불꽃, 번개 등의 십수 개의 원소가 내리쳤다.
차르르륵.
검은색의 사슬이 뒤를 이었다. 봉관의 능력. 그것이 산양에게 쏘아졌다.
나 역시 움직이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다.
“시, 시우야. 이, 이거면 돼?”
김시연이 바람을 응축하며 존재 부정의 마력을 넣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에서 물약을 꺼내어 입에 넣었다.
“응, 고마워.”
나는 실피드의 증표로 풍랑의 바람을 엮었다. 아공간에서 샛별의 영광을 꺼내었다.
‘마’라는 성질의 대척점.
별 무리로 벼린 창, 샛별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 주인작업을 거치지 못했지만, 산양의 기운에 반응하며 나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뇌혼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파지직번개가 튀었다.
나는 샛별의 영광을 쥐었다. 별무리로 벼린 성창이 내 마력에 호응하며 별빛을 뿜었다. 뇌광이 그 위에 덧씌워졌다. 벼락과 불꽃이 응축되었다.
“야, 야! 잠깐─!”
윤채린이 별빛의 마력을 느끼고 경악해했다.
광익을 폈다.
보랏빛의 날개 한 쌍이 활짝 피었다. 여기에 「오버로드」.
민첩을 더했다. 뇌령이 신경을 내달렸다.
「천수」를 최대로 활성화했다. 손이 먹물통에 넣은 듯 새까매졌다.
가면을 쓴다.
칠색을 모방한 가면. 얼굴에 무언가가 덧씌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붉은색과 초록색의 실이 불꽃과 번개를 융화시켰다.
뇌광비검술光???
자전섬뢰???雪
흑색의 산양에 몸뚱이에 한줄기의 선이 그려졌다.
보랏빛의 선이었다.
그것이 일자로 흑색의 구름을 갈라내었다.
[안돼!!!]
그보다 한 발짝 늦게.
그 선에서 벼락과 불꽃이 피었다.
***
쩌적.
산양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며 번개와 불꽃에 몸이 타고 있었다. 솔직히 시전시간이 긴 기술이라서 반신반의했는데, 윤채린의 활약이 컸다.
윤채린이 사도의 마기를 닥치는 대로 지배하고 륜 세 개를 박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저 멀리 도망친 윤채린을 바라보았다. 윤채린도 별빛의 마력에 당해 눈이 살짝 그렁그렁했다.
사라락잿가루가 허공에 흩날렸다. 마인의 육체가 재가 되며 사라졌다. 그리고 잿더미 속에서 지팡이 하나가 나왔다. 「지식 열람」으로 감정해보니 역시나 마와 관련된 아이템이다. 이러면 찝찝해서 팔기도 귀찮아지는데.
“괜찮아?”
임나연이 하늘색의 머리를 귀 뒤로 쓸며 나한테 다가왔다. 하늘색의 눈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무력함도.
“응, 괜찮아. 근데 벌써 그 능력을 잘 다루네. 나연이 네가 없었다면 엄청 힘들었을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임나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내가 한 방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윤채린이 먼저 크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그 틈을 만들어준 것이 임나연이고.
“아냐. 진짜 도움이 됐어. 마음 같아서는 상 같은 거라도 주고 싶은 정도로.”
“……상?”
임나연이 한 단어에 반응했다.
다음에는 상을 많이 줘야겠네. 속으로 생각하고 있자니, 사나에가 이쪽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천의 가면으로 느껴지는 감정이 오묘했다.
질투가 조금 섞이고, 자조랑 좌절 같은 부정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저러니까 하루히 아키에게 윤승하의 키스를 뺏기는 거다. 나는 게임 속에서 사나에가 좌절하며 도둑년이라고 했던 대사를 떠올렸다. 그래서 하루히 아키 별명이 시프로 고정됐었지.
“시우, 고생 많이 했네.”
윤승하가 나른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임나연이 조금 안 좋은 눈초리로 윤승하를 보려다가 멈췄다. 나는 쓰게 웃었다. 윤승하가 가진 페널티 때문에 임나연은 윤승하를 게이로 알고 있다.
……사실 지금 복잡한 여자관계를 생각하면 게이가 더 나은 게 아닐까.
“야, 근데 넌 무슨 능력이 그렇게 많냐.”
샛별의 영광을 아공간 팔찌에 넣으니 윤채린이 투덜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옆에 천 같은 것을 깔고 주저앉았다.
“뭐, 이 누님에게 이기려면 여러 능력이 필요하지. 이번 기말고사 알지? 이번에 만나면 진짜 각오해라.”
히죽하고 웃으며 윤채린이 말했다. 나는 「지식 열람」으로 슬쩍 상태창을 살폈다. 그러다가 놀랐다. 대부분의 능력치가 1~2가량 상승했다. 무언가 기연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윤승하같은 사례인가. 정해진 루트보다 더 강해지는 그런 케이스.
“야. 그런데 마지막에 그거 창에서 나온 마력이냐?”
“어? 아, 별빛의 마력.”
윤채린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샛별의 영광이라고, 이번 중간고사 실기에서 널 이기고 얻은 무기지. 경기 수준이 높다고 엄청나게 좋아하시면서 주시더라. 덕분에 고맙다, 이런 무기도 얻게 해주고.”
히죽하고 웃으며 말하자 윤채린이 어이없는 투로 말했다.
“하. 야, 이시우. 너 누님한테 깝죽거릴래?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만든 전용 무기 말고 다른 무기 쓰는 거 반칙인 거 알지?”
윤채린이 안도해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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