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검은 산양(5)
* * *
봉관의 무녀가 내 팬을 자처해서인지, 우리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일전에 한 번 왔다고 하는 임나연이 말했으니, 확실할 거다.
어둑한 밤이 내려앉았다.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떠 있었다.
나는 몸을 점검했다. 상태는 양호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하얀색의 날개 형태의 배지를 꺼내었다.
실피드의 증표.
일전에 그란데힐 덕에 요정 여왕에게 하사받았던 물건이다. 샛별의 영광은 아직 주인작업을 거치지 못했지만, 실피드의 증표는 주인작업을 거쳐, 이제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바람을 뭉쳤다.
손아귀에서 바람이 엮이며 검의 형태를 취했다. 창의 형태로 바뀌고, 직사각형의 판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생각보다 더 좋아. 아니,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실피드의 증표는 뇌혼 상태의 내가 사방으로 움직일 때, 유용해서 선택한 물건이다. 주변의 바람을 ‘물질화’라는 과정을 거쳐서 일시적으로 물질처럼 만들어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 하나만 보고 고른 건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천수」의 효과였다.
나는 손을 먹물통에 넣은 듯, 거뭇하게 물든 손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천수」를 최대 출력으로 끌어올리면 손이 검게 물들었다. 「천수」가 나를 인도했다. 마력의 입자가 흘러나오며 바람을 어떻게 묶는지, 어떻게 다루는지 나를 인도했다.
「천수」.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기교로만 생각했다. 마나에 대한 기교, 무기에 대한 기교. 그러나 「천수」의 효능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형형색색의 빛이 심상에서 떠오르며 점멸했다. 색은 뚜렷하고 선명하였다. 그것들 모두가 내 손에 닿는 것임을 깨달았다.
헛웃음을 흘렸다.
「지식 열람」을 새로이 개방하면서 나는 한번 진로를 틀었다. 그리고 현재, 「천수」의 진정한 능력을 깨우치면서 한 번 더 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천의 가면」도 능력이 더 있던 것 같은데.
저벅.
「불가해한 감각」이 내 쪽으로 오는 인기척을 잡아낸다. 깨달음의 형상을 한 빛들이 저 멀리 날아갔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의 상의와 붉은색의 치마를 두른 무녀복. 단정하게 자른 단발과 단호해 보이는 눈빛은 그녀의 성정을 짐작게 하였다.
하루히 아키.
유명하기로 따지자면 봉관의 무녀나 검성이 가장 유명하지만, 하루히 아키도 만만치 않다. 만 25세. 중격의 한 걸음 내딛고 있는 일본의 유망주 검사니까.
히어로 아카데미의 중격에 이른 괴물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30세 이전에 중격에 오르기만 해도 이 세계에서는 소위 ‘천재’라고 불린다.
나는 하루히 아키에 대해서 떠올렸다. 정보는 금세 떠올랐다.
게임에서도 그녀의 행보는 인상적이었다. 사나에가 오타쿠 스러움을 가지고 있다면 하루히 아키는 그녀를 챙기는 소위, 비서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보면 요정여왕이랑 그란데힐이랑 비슷하지만, 꽤 매우 다르다.
봉관의 무녀가 음침함을 담당하는 캐릭터라면 하루히 아키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음?”
그 순간이었다.
굉장히 불길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감각권에 잡혔다. 드디어 왔나. 나태의 사도와 그 신도들. 고개를 획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내 행색에 묘한 느낌을 받은 걸까. 하루히 아키가 나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적이 나타난 것 같은데.”
“적 말씀입니까?”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핸드폰이 지잉울리자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심호흡했다.
나태의 사도는 강하다. 나태의 산양이 흘리는 힘의 파편을 먹어서 상격에 들어선 자다. 강제로 상격에 들어섰기에 홍유화랑은 비교하기조차 미안하지만, 그래도 상격이다.
아공간 팔찌에서 목함을 꺼내었다. 목함의 뚜껑을 여니 푸른색의 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습격은 순조로웠다.
그러면서도 나태의 사도는 한숨이 일었다. 위대한 산양을 봉인한 곳의 경계가 고작 이 정도라니. 나태의 신도들이 신사의 존재들을 물리치는 광경이 보였다.
‘검성이 오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겠군.’
나태의 사도는 검성이 혼자라면 무리 없이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봉관의 무녀는 까다롭다. 혼자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그녀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사도라 할지라도 꽤 위험할 테니까.
지잉.
순간적으로.
사도는 고개를 틀었다. 무언가 감각권 너머에서 쇄도하는 것이 감지되었다.
콰드드드드득!
보랏빛의 길쭉한 벼락창이 두 쌍. 그것이 회전하면서 자신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흡!”
사도는 양팔을 뻗었다. 양팔에서 마기가 실처럼 뿜어지며, 구름 같은 형상을 만들어 내었다. 마기의 구름이 손에서 피어났다. 한순간에 구름이 전방을 감싸며 보라색의 벼락창을 먹어 치웠다.
그러나 사도는 안심하지 않았다. 경계 어린 눈으로 벼락을 쏘아진 곳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보랏빛의 번개가 이는듯한 눈동자. 얼굴에서 순간 후광이 이는 것 같았다.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신이 빚은 듯한 형태였다.
남자는 오연하게 사도를 바라보았다.
파르르─
남자, 이시우의 어깻죽지에서 보랏빛의 빛이 피었다. 자색의 빛을 엮어 만든 듯한 날개. 그것이 완연한 한 쌍으로 피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이시우를 호위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는 검들, 수십 자루가 둥실 떠 있었다.
콰직.
진각을 밟고.
직후 보랏빛의 벼락이 내리쳤다. 눈을 한번 깜빡인 순간 벼락이 눈앞에서 쇄도했다. 푸른색의 벼락으로 엮은듯해 보이는 검신이. 그리고 그 위에 핀 뇌광光이 보였다.
카가가각!
벼락이 구름을 두들겼다.
‘쯧, 귀찮은 녀석이군.’
사도는 혀를 찼다. 검성이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러면 봉관의 무녀를 죽일 수 없게 된다. 눈을 돌리니 십수 채의 정령을 다루며 무기질적인 눈으로 신도들을 학살하는 존재가 보였다.
금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미리 만들어둔 산양을 향해 뛰어드는 여자도 보였다. 지금 물러나서 때를 기약하는 것도 힘들었다. 협회가 자기 목을 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지팡이를 땅에 내리쳤다.
검은색의 구름이 마기를 먹으면서 덩치를 키웠다. 삽시간에 커진 검은색의 구름이 형체를 갖추었다. 검은색의 구름이 이족보행을 하는 산양의 형태를 취했다. 산양은 거대했다. 어지간한 아파트의 10층을 떼어다 놓으면 그것과 비슷할 정도로.
콰아아앙!
가공할 파괴력이 담긴 주먹이 폭음을 동반하며 내리쳤다. 108계단이라 불리는 입구 자체를 힘으로 짓누르며 산의 지형을 바꾸었다. 계단이 있던 자리는 폭탄이 수십 개가 터진 듯한 모양새로 바뀌었다.
그러나 산양의 힘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나태의 힘으로 만들어진 산양은 그 근처에 있는 것으로도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섬뜩할 정도의 속도를 지닌 남자는 이것으로 끝났을─.
카가가가가각!
보랏빛의 벼락이 쏟아졌다. 보랏빛의 뇌광을 두른 채 주변에 펼친 구름을 공격하였다. 지이잉주변에 머물던 검들이 빠르게 회전하였다.
콰득.
사도는 손을 편 다음, 주먹을 쥐었다.
구름이 한순간 커졌다. 마기로 이루어진 구름이 삽시간에 반경 50m를 뒤덮었다.
나태의 구름이 사도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저놈들은 위험하다. 은색의 머리를 한 남자도, 보랏빛의 머리를 한 남자도, 금발의 여성도. 모두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 사도는 도박수를 던졌다. 구름이 한데 모여서 응어리지며 몸집을 부풀렸다. 이 기술을 쓰면 당분간 몸을 가누기 힘들지만, 그래도 한 번에 저들을 처리할 수 있을 터.
우우웅.
힘이 한점으로 모이는 것을 느꼈다. 구름이 한순간 쑥하고 쪼그라들더니 단번에 팽창했다. 한 번에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공격이었다. 기다란 검은색의 가시가 무작위로 뻗어나갔다.
“사, 사도님 어째서!”
그 과정에서 신도들의 목숨이 사라졌지만, 괜찮다. 자신이 살아 있으니. 사도는 고개를 들었다.
“와, 완전 피도 눈물도 없네.”
툭, 내던지는 말투. 흑룡이 금발의 여성을 감싼 채, 가시를 모두 막아내었다.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가시를 꽃으로 바꿔 막은 남자가 있었다. 처음 자신을 공격했을 때와 같이 허공에서 일어선채, 자신을 오연하게 쳐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하.”
사도는 허탈하게 웃고는.
인간임을 포기했다.
***
나는 바람으로 엮은 발판 위에서 그 공격을 바라보았다.
나태의 사도와의 싸움은 생각보다 할 만했다. 아직 여력이 있다. 「칠색」도 쓰지 않았음에도 속도는 이쪽이 한 수 위다. 「오버로드」까지 쓴다면 적어도 두 수에서 세 수는 위.
그러나 절대적인 우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할만하다고. 나태의 사도가 싸움의 경험이 일천해서였다. 한 번에 윤승하와 윤채린, 자신까지 공격하려 하니 저렇게 된 것이다. 윤승하가 정령들을 앞세우며 신도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윤채린이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윤채린의 모습은 멀쩡하지 않았다. 살짝 그을린 사복과 한쪽 소매가 조금 찢어져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나태의 사도를 휘감은 구름을 보았다. 저것은 마인화에 과정이다. 저 과정이 끝나면, 마인화가 시작된다.
즉, 페이즈 2란 소리다.
원래대로라면 저 구름을 가르고 마인화가 되기 전에 죽이는 게 가장 베스트. 그러나 마인화가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저 구름은 단단하다. 모든 마력을 쥐어짜서 공격해도 금이 조금 갈 만큼 말이다.
까득.
나는 품 안에서 뇌단을 꺼냈다. 안에서 번개가 일렁이는 푸른색의 단. 그걸 입에 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