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검은 산양(2)
* * *
핏빛의 무복이 바람에 흔들렸다.진한 붉은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홍유화가 히죽하고 요사하게 웃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싸운다는 선택지는 가장 최악의 수다.
일전에 홍유화랑 싸웠을 때, 홍유화는 힘을 발휘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나는 적극적으로 공격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산양 공략 전. 홍유화와 싸운다고 해도 멀쩡히 돌아갈 자신이 없다.
재빠르게 몸에 뇌령을 돌렸다. 보랏빛의 번개가 내 몸 구석구석 돌며 신경을 날카롭게 벼렸다. 가면을 쓴다. 광익과 칠색을 모방한 가면이 얼굴 위에 덧씌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도망치는 것이라면 자신 있다. 다행히도 홍유화는 상격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에 광익을 전개하고 칠색을 엮으면 내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나 다름이 없다. 초당 수백 미터 단위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홍유화의 전투 방식은 귀찮다. 극단적으로 높은 근력과 마력. 제약과 조건이 까다로운 주술을 쓰며, 무공을 쓴다.
그리고 고유 능력인 「아타락시아」. 「아타락시아」는 성장에 중점을 둔 특성이다. 정신을 고양시키며 강제적으로 ‘번뜩임’이라는 능력을 부여해 사용자를 성장시킨다.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었다.
검신이 푸른색의 벼락을 엮어서 만든 것 같은 기린검을 들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흐음. 그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변했구나.”
혈마, 홍유화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퍽 거슬렸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나는 네게 해를 끼칠 마음은 없으니.”
홍유화가 입을 열었다.
“일단 대화를 나눠 볼까? 만약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지만……그렇게 되면 꽤 슬퍼진 본녀는 민간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핏빛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식열람」을 이용해서 홍유화 발치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꿈틀. 하고 조금 움직였다. 아니, 시체가 아니었군. 정보를 확인하니 둘 다 마인이었다.
나는 홍유화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마인 중에서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마인이다. 살생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살생을 필요할 때만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민간인은 손을 안 대는 편이고.
선의 인물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악으로 치우쳐진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홍유화의 ‘성정’이다.
나는 「불가해한 감각」으로 주변을 인지했다. 꽤 험난한 오지라 그런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을 굽어보는 눈」으로 홍유화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홍유화의 핏빛 눈동자가 조금 구부러지고, 기쁜 듯한 느낌이 들면 착각일까. 나는 머리를 굴렸다. 홍유화를 만나 당황하기는 했지만, 가장 먼저 물어볼 것이 있다.
“……여긴 어쩐 일이지?”
“관광이니라.”
어처구니없는 답변이었다. 산양이 깨어나는 낌새가 느껴지는 곳에서 관광이라니. 다른 이들도 아닌 소교주라 불리는 혈마가 관광? 지나가는 어린애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지?”
“나도 관광하러 왔는데.”
나는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내 말에 홍유화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관광하다가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본녀랑 같이 다녀 볼 생각은 없나?”
내가 미쳤다고 너와 같이 다닐까?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내 입은 태연자약하게 움직였다.
“선약이 있어서 안될 것 같은데. 꽤 중요한 선약이라서.”
“본녀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홍유화가 꽤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홍유화의 주먹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무복 아래에 보이는 새하얀 손. 저 손을 제대로 휘두르면 지형조차 바꿀 수 있다.
여차하면 김은정이 준 펜던트를 쓸 각오도 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
“여가 할 말은 아니지만, 본녀는 그때 꽤 추하게 도망쳤거든. 보통 다음에 만나면 추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넘쳐서 덤비는 게 당연할 텐데. 너, 내가 누군지 꽤 자세하게 알고 있구나?”
홍유화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눈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새로운 장난감을 보는듯한 어린아이의 눈빛이었다.
“여가 특별히 제안하마. 우리 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나? 그대는 꽤 특별하게 대해 주겠다. 명예, 황금, 여자…필요하다면 우리가 무엇이든 줄 수 있다.”
“없어.”
“단호하구나. 그래서 더 마음에 들고.”
홍유화가 머리카락을 꼬았다.
“아쉽구나. 여기기까지 와서 굳이 재빠른 너랑 술래잡기는 하기는 싫고…….”
“그럼 그냥 가면 되겠네.”
내 말에 홍유화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슬쩍 날 보고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빈틈이 드러나면 습격이라도 해서 데리고 가려 했거늘. 처음 봤을 때부터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는구나.”
“…….”
“오늘은 물러 가주겠다. 꽤 기분 좋은 날이기도 하고.”
홍유화가 눈웃음을 치며 발치에 놓인 마인의 목 위에 발을 올렸다.
뚜둑.
홍유화가 가볍게 발에 힘을 줘 마인의 목을 꺾었다. 그리고 마인의 육체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마인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드네.”
홍유화는 나를 한번 힐끔 보고는 몸을 돌렸다.
“다음에 보지. 아, 그리고 혹시 마인이 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홍유화가 나한테 무언가를 획 던졌다. 나는 천수로 그것을 붙잡았다. 자세히 보니 명함이었다.
“인사는 안 해주나?”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
“차갑기는.”
홍유화가 손을 흔들며 산에서 내려갔다.
나는 온 감각을 이용해서 홍유화가 내려갈 때까지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다.
***
나는 본래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목적지에는 빠르게 도착했다. 게임 속 지리와 현실의 지형은 다르지만 「지식열람」이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줬다.
내 허리의 절반까지 올라오는 이름 모를 풀이나 나무들이 엉킨 곳이 보였다. 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곳을 지나치니 땅이 이곳저곳 파헤쳐진 곳이 보였다.
찾았다.
이곳은 사파이어 래빗이라 불리는 토끼굴이다.
이곳은 일본의 삼신기를 얻을 수 있는 시련관하고 상관없는 곳이지만, 내 파워업에 필요한 물약을 만드는 데 꽤 유용하다.
사파이어 래빗은 몸에 사파이어를 닮은 마정석을 품고 있다. 여기에 물약 처리와 사파이어 래빗이 가진 마정석을 합치면 뇌단雪?이라는 물건이 탄생한다.
번개 속성에 한정해서 일시적으로 온갖 능력치와 속성내성 등을 올려줘서 번개 속성을 가진 이들에게 필수 소모템이었다.
문제라면 사파이어 래빗이 굉장히 희귀한 몬스터라 재료를 찾기 어렵다는 정도다. 후에 사파이어 래빗들을 내버려 두면 나중에 거악들이 날뛸 때, 거악들의 편에 서기 때문에 지금 제거하는 게 좋다.
나는 아공간에서 기린검을 꺼내서 뇌광을 둘렀다. 벼락으로 엮은 푸른빛의 검신에 보랏빛의 뇌광이 씌워졌다.
이것은 미끼다. 사파이어 래빗은 ‘번개’를 주식으로 한다.
파지지지직!
번개가 휘몰아쳤다. 그러자 「불가해한 감각」에 수십 개에 달하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파밧! 사파이어 래빗들이 굴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비염.”
화르르륵!
보랏빛의 불꽃이 허공에서 피었다. 동시에 가면을 썼다. 마도의 업을 모방한 가면과 세계의 운명을 모방한 가면이 내 얼굴 위에 덧씌워졌다.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폭주라도 하려는 듯, 마력의 흐림이 거세지며, 정해진 순리를 거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식열람」이 기억하는 은수아의 특성 「마법의 기원」을 꺼냈다. 주홍빛의 눈이 허공에서 열리며 내 상태창에 「마법의 기원」이 새겨졌다.
휘이잉!
바람이 손아귀에 머물렀다. 자그마한 풍인을 수십 개를 전개한다. 자그마한 바람의 칼날들이 거대해지기 시작하고.
콰아앙!
거대한 돌풍이 되었다. 날카로운 칼날들을 두른 돌풍이 토끼들에게 몰아치듯 날아갔다. 동시에 비염이 내 마나에 불꽃을 입혔다. 불꽃과 날카로운 칼을 두른 돌풍이 토끼들을 모으고, 그대로 사파이어 래빗들을 모아서 태웠다.
“비염 살살해. 안에 있는 마정석까지 타겠다.”
[계약자. 네가 만든 바람의 칼날이 더 날카로운데?]
비염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답했다. 나는 돌풍으로 모은 사파이어 래빗들의 상태를 살폈다. 마도의 업을 모방한 가면을 써서인지 생각보다 날카롭게 베인 부분이 많았다.
[킁킁. 근데 여기 좋은 냄새 나네. 번개의 마나를 꽤 순도 높게 품었는데. 계약자, 나한테 마정석 몇 개 넘겨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에 있는 마정석을 꺼내줬다. 사파이어 래빗들의 마정석은 돈을 주하고 구하기도 힘든 놈들이라서.
[이 짠돌이!]
아공간에서 꺼낸 마정석을 맛있게 먹어 치우며 비염이 말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가면을 썼다. 어검을 모방한 가면이 내 얼굴 위에 씌워졌다.
그리고 어검을 이용해 단검을 복사했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그 숫자는 64자루가 되었다. 여기까지 복사하니 머리가 좀 아팠다.
나는 어검으로 시체를 빠르게 해체했다. 어검을 이용하니 사파이어 래빗들은 한순간에 마정석들만 남긴 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
일요일 오후.
나는 유명한 튜브에서 강력하게 추천하는 초밥집으로 갔다. 이 세계의 일본은 전생의 일본보다 관광산업이 더 발달했다. 그런 탓인가. 나눠준 팸플릿에는 한국어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저기.”
어색한 한국어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단발의 여성이 보였다.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여성 3명도 있었고.
「불가해한 감각」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눈에도 이상한 점이 띄지 않았고. 나는 슬쩍 「지식열람」으로 정보를 확인해보니, 일반인이었다.
헌팅인가?
좀 귀찮은데. 나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한 다음 입을 열려고 했다.
“혹시 여기 동영상에서 나오시는 분 맞죠?”
아, 그건가.
윤채린과 대련할 때 찍힌 동영상이 있다. 흔한 생도들의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올라가서 한동안 튜브 순위권에서 놀던 동영상이었다. 한국의 장래가 밝다. 라던가, 멀고…높다…한국. 이라는 댓글 등이 달렸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이 준 핸드폰을 보았다.
……이게 뭐야. 왜 여기 있어. 나는 당황해하며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1학기 중간고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저, 저 시우 님 팬이에요. 호, 혹시 샤인을 해쥬실 수 이쓸까요?”
“아, 네…….”
나는 당황해하며 펜이 준 종이와 펜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면서 한 번도 사인을 해본 적 없는데. 천수를 활성화하며 내 이름을 영어로 종이에 적었다.
“가, 감쟈합니다. 가보로 갼직할게요!”
여성이 어색한 한국어로 답했다. 나는 여성의 일행으로 보이는 여성들에게도 사인을 해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