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공략(2)
* * *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윤채린이 표시한 곳은 공원이었다. 창문 너머 바깥을 보니 어두컴컴했다. 오늘도 밤이네.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나는 슬리퍼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시우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지런하게 머리를 어깨 오른쪽으로 묶어서 정리한 윤승하가 보였다.
“승하야 웬일이야.”
“그냥~시우 보고 싶어서 왔지.”
파란색의 눈을 반짝거리며 윤승하가 말했다. 윤승하가 나한테 총총걸음으로 다가와서 슬쩍 내 팔을 휘감았다.
“시우 이제 괜찮아? 언니가 많이 때렸지? 진짜 무식하다니까.”
“응, 괜찮아. 근데 여기 밖인데.”
“괜찮아. 주변에 사람 아무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윤승하가 히히, 웃으며 내 팔에 기대었다. 그리고는 내 가슴에 코를 묻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우, 냄새 좋다.”
“아까 땀 좀 흘렸는데, 땀 냄새 나지 않아?”
“그래서 더 좋은 거야.”
윤승하는 그 이야기를 하며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임나연이 날 기분 나쁘게 본다던가, 아카데미 매점에 어떤 음식이 맛있다던가, 오늘 저녁으로 나온 코다리조림이 맛이 없다던가.
그리고는 슬쩍 내 엉덩이를 만졌다.
“시우, 그동안 쌓이지 않았어? 오랜만에……할까?”
윤승하가 야릇하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조금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라니, 숙소에 갈 때마다 맨날 쥐어짜는 게 누군데.
아버지가 가끔 골골댈 때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절실하게 이해하고 있다. 섹스하는 게 정말 기분은 좋은데, 남자 입장에서는 쥐어짜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어서.
“나중에. 채린이가 나 좀 보자고 해서 가야 되거든.”
“……채린이가?”
“어.”
윤승하가 이마를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 팔을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그럼 나도 가도 될까?”
“승하, 너도?”
“응. 어차피 기숙사로 바로 갈 거잖아.”
그렇기는 했다.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윤채린은 공략 대상이 아니니까. 윤채린이 가진 천상의 마는 다른 능력들과 어울리지 않는 특성이 있다.
정확하게는 어울리려 하기 보다는 찍어 누른다는 느낌이 강했다. 윤채린처럼 아예 완성된 특성이 있다면 모를까, 내 가면이 특성을 모방하는 힘은 처음에는 미약하게 시작한다.
가장 높은 마도의 업을 모방하는 가면조차도 이제 레벨이 5다.
“그러고 보니 채린이가 요즘 시우 귀찮게 굴지 않아? 내가 넌지시 말해볼까?”
“내가 좀 놀려서 그래. 저번에 실기에서 대련으로 이긴 다음 놀렸거든.”
“시우 네가?”
윤승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장난치는 적이 별로 없기는 했었다. 남자애들 바보짓 할 때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지.
나랑 윤승하는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공원으로 향했다. 중간부터는 사람들의 눈이 보이기 시작해서 팔짱을 풀고 그냥 나란히 서서 걸었다.
“저녁인데 모처럼 나왔으니까 뭐 먹고 갈까?”
“그럴까? 아, 이번에는 내가 살게. 나 장학금 들어왔거든.”
“괜찮아, 내가 계산할게. 저번에 너 내 선물 산다고 무리했잖아.”
저번에 티셔츠나 잠옷 등을 야금야금 사서 오더니 최근에는 내 옷들을 이것저것 사 오느라 윤승하는 돈이 별로 없다. 나름 몬스터 헌팅을 하면서 돈을 벌어온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내 옷을 사느라 오이 맛 사이다를 못 샀다며 중얼거렸던 게 떠올랐다.
“낙곱새 먹으러 갈까?”
“낙곱새? 저번에 먹었던 거?”
내 말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거. 엄청 좋아했잖아.”
“응. 맛있었어. 완전 내 취향이라서.”
“그럼 그거 사주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 어떤 건데.”
“다음 달에 나랑 같이 일본에 가자.”
“일본? 일본은 왜?”
거악 중 한 명을 잡으러 가자. 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 기가 막힌 던전 하나가 있다고 들었거든.”
“그럼 임무 중에 거기에 가자고?”
“응.”
“그러자.”
윤승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데이트인가? 일본에 뭐가 유명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켜고는 여기저기 검색하고 있었다.
공원으로 도착하니 윤채린이 보였다. 달빛을 받아 옅게 빛나는 금색 빛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붉은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더니, 헤실헤실 풀리다가 옆에 윤승하를 보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희 왜 둘이 왔어.”
“어쩌다 보니까 만나서 그냥 밥 한 끼 먹으려고. 근데 무슨 일이야?”
지긋이.
내가 물어보는 거에 신경 쓰지 않고 윤채린이 나랑 윤승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윤승하가 슬쩍 내 팔에 팔짱을 끼웠다.
그러고는 윤승하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눈에는 경계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승하야, 네 언니야.
“뭐야, 둘이 사귀어?”
어처구니없어하는 물음으로 윤채린이 물어봤다.
윤승하가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하가 최면을 걸면서 우리 둘이 몰래 사귀고 있다고 한 이유는 윤승하가 겉으로는 남자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조건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요정 여왕이나 공허의 왕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그녀의 능력은, 그녀가 자신이 남자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들킬 일이 없다.
나는 가면으로 윤채린의 감정을 살피었다. 경악, 황당, 분함, 억울함 등의 감정이 솟구쳤다.
‘억울함은 왜?’
내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보자 윤승하가 내 팔짱을 끼며 윤채린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 시우를 왜 이런 야심한 밤에 불렀어?”
윤승하가 경계 어린 눈으로 윤채린을 바라보았다.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윤채린이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그냥 다시 한번 대련하자고 말했지.”
“시우 다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든?”
“야, 나도 얼마 되지 않았어…….”
윤승하의 차가운 시선에 윤채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승하야, 네 언니라니까.
그러나 윤승하는 거의 연적을 쳐다보듯이 윤채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 나는 네 언니거든!”
“뭐래, 우리 쌍둥이거든? 우리 태어난 시간 고작 분 단위 밖에 차이 안나거든?”
“…….”
윤채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승하가 슬쩍 내 팔을 휘감았다.
“용건은 끝이야?”
“어?”
“그럼 우린 갈게. 데이트하러 가기로 했거든.”
***
수요일 모든 수업이 끝난 오후.
나는 커피를 홀짝였다.
여기 아메리카노는 풍미가 진해서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마나를 머금은 커피콩을 쓰는 덕분에 아메리카노 한잔이 거의 일만 원을 넘어가지만, 맛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메리카노 한잔이 만원이 넘어가는 곳이지만, 학생들로 문전성시였다. 히어로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전부 부자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부자인 탓이었다.
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그란데힐 : 김시연 님 외출 허가가 나왔습니다.
그란데힐 : 그런데 다음 달 임무 주간 때 진짜 일본으로 가실 건가요?
당연하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답장했다. 마찬가지로 김은정에게 문자가 왔다.
김은정 : 꼬맹아.
김은정 : 다음 달에 일본에 간다고 했지. 나도 같이 가마. 아무래도 느낌이 싸해.
김은정의 허락도 받았다. 그동안 양념을 많이 친 덕분이었다.
이걸로 구성원은 윤승하, 임나연, 김시연, 김은정이 확정되었다. 여기에 은수아나 김하린, 이지아를 끼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눈에 띄는 조합이 된다.
안 그래도 저 멤버로 눈에 띄는데, 학생들을 전원 데리고 가면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마인들이 습격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커피를 쭉 빨고 쓰레기통에 플라스틱 컵을 꾸겨 넣고는 길을 나섰다.
윤채린을 만나서 윤채린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야, 이시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윤채린이 나를 불렀다.
“왜?”
“너…아니다. 단둘이 이야기하자. 지금 시간 되냐?”
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오후 4시 23분. 마땅히 할 게 없어서 훈련실에서 죽칠 생각이었지만, 윤채린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줄 수 있다.
“응, 가능해. 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응? 부탁? 뭔데.”
윤채린이 조금 꺼림직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임무 갈 때 나랑 승하랑 같이 가자.”
“나랑 승하랑? 그리고 너랑?”
윤채린이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연인들이 데이트하는 장소에 내가 왜 끼어. 나는 그냥 수아랑 다른 곳에 갈게.”
윤채린이 손을 휘적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윤채린이 필요했다.
"네가 필요해."
"어?"
“다른 누구도 아닌, 윤채린이 필요해.”
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나태의 산양.
그것은 윤승하보다 윤채린이 더 공략에 적합하다. 윤채린이 가진 천상의 마는 나태의 산양에게도 효율적이다.
게임과는 다르게 이곳은 현실인 세계다.
한 번 실패하면 몇백만 명의 인구가 증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 사는 선 성향의 영웅들이나 파견을 나온 영웅들 역시 위험해진다.
그러면 안된다.
미지의 적인 마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도의적인 것도 있지만, 마신을 죽이기 위해서, 정해진 엔딩을 바꾸기 위해서 나태의 산양은 반드시 최소한의 손해로 죽여야 한다.
“하, 이시우 이 새끼…….”
윤채린이 머리 아픈 듯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그러면서 입이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
윤채린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았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시우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다른 것임을 안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하.’
처음에는 그냥 그랬다. 머리가 굉장히 좋고, 얼굴이 굉장히 잘 생긴 애. 마치 주변의 사람들을 홀리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독특한 소년. 그것이 이시우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허약하지만, 기교는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무술인.
그러나 그 정도였다. 힘이 없고, 속도가 없는 기교는 그녀를 위협할 수 없다. 그러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중간고사 때였다. 어느샌가 훌쩍 성장해서, 한종우를 이겼다.
2학기 때는 어느새 자신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왔고, 비록 윤승하가 자신의 구명절초를 가르쳐 줘서, 승부를 양보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신과 겨룰 수 있는 남자. 그것이 바로 이시우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시우 같은 남자는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윤채린은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천마였다.
윤승하는 비록 정말 아끼는 동생이지만, 먼저 하늘같은 언니에게 이빨을 보인것은 윤승하였다. 설마 살다살다 자매끼리 한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게 될줄은 몰랐지만…….
‘사랑은 쟁취하는 거지.’
약탈 순애는 비록 사마외도라고 했지만, 자신이 누구던가.
사마외도의 정점인 마왕, 천마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