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천상의 마(4)
* * *
화요일.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끝났다. 솔직히 말해서 비밀 수련관에서 눈이나 감각 중 하나를 얻고 싶었지만…….
‘아직 확실하게 얻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준이 아니라서.’
게임에서는 버그라는 꼼수가 있다지만, 현실에서 그게 통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구조이다 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계약자. 준비 잘 됐지?]
“물론.”
비염이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비염은 어느새 내 팔뚝만 한 크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전보다 더 높은 위계를 가지게 된 비염은 윤승하의 불의 정령과 맞붙어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이렇게 말하면 비염이 정말 약하게 보이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다. 오히려 세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윤승하의 정령과 비견되는 게 이상한 일이다.
훈련소를 나오며 기숙사로 가는 길.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뒤로 묶어 말총머리를 만들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윤채린이 보였다. 요즘 유행하는 초록색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그려진 트레이닝 복장.
윗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멍하니 보던 윤채린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야밤에 웬일이야.”
“이제 훈련 끝마치고 기숙사 가는 중. 너는 뭐야. 왜 그리 표정이 죽상이야?”
내 말에 윤채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냥. 요즘 따라 머리가 복잡해서.”
“그래?”
천상의 마 때문인가.
“머리가 복잡할 땐 산책이 좋은데.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그럴까.”
윤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왔다.
“이번 대련에 말이야. 외부에서 인원들 겁나 들어온대.”
“어. 당연하지.”
윤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1학기 중간고사 때 애들 활약한 거 못 봤냐. 나부터 시작해서 너나 윤승하나 다들 활약해서 스카우트들 벙쪄있던거.”
“그건 지금 생각해도 웃기긴 해.”
“그거 때문에 중간고사 전에 몸값 내려간 애들 전부 엄청 올랐다더라. 꽤 우수하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
윤채린이 킥킥 웃었다.
“근데 너 너무 나한테 친하게 대해주는 거 아냐?”
“뭐가?”
“우리 이제 곧 싸우잖아.”
“어디까지나 대련이잖아. 뭐야. 설마 너, 나한테 지고 나서 울면서 모르는 척하려고?”
“하……이시우 많이 컸다? 진짜 어이가 없네.”
윤채린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입을 열었다.
“이 누님이 그렇게 우스워 보여?”
“처음에는 막연했는데 지금은 나름 비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 우리 시우 진짜 많이 컸네. 여기 입학할 때 처음 봤을 때는, 날 보고 정신 놓던 게.”
"아니, 그때는 솔직히 다 죽일것처럼 굴었잖아."
"그때는 예민했으니까. 이상한 놈들이 천한 출신이라면서 꼴받게 했잖아."
윤채린이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젠 좀 괜찮아?”
“……응, 좀 괜찮아졌어.”
“근데 뭐 때문에 그리 머리를 싸매고 있던 거야. 답지 않게.”
“이 누나가 원래 생각이 깊어서 티가 안 나고 있었던 것 뿐이야.”
“그래?”
그 이후로 대화는 끊겼다.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불편한 침묵이 아니라 나름 편한 침묵이.
“야.”
“왜?”
“상담 좀 해주라.”
***
달빛은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다.
윤채린은 그것을 느꼈다. 이상하리만치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익혔는데도.
윤채린은 이시우와 나란히 걷다가 이시우를 힐끔거렸다.
175cm.
여자치고는 매우 큰 키라, 남자애들을 올려다볼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시우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키가 몇이랬지. 184cm라고 했었나. 윤승하가 떠들던 게 기억 속에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이야기 했던 것이.
윤채린은 쓰게 웃었다.
“여기에 앉을까?”
“그러지 뭐.”
윤채린이 벤치를 가리키자 이시우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저러는 거지?
어디선가 흐릿한 밤꽃의 향기 때문인 건가.
그러고 보니 남자들은 밤꽃 냄새를 싫어한다고 어디서 본 것 같다.
윤채린은 벤치로 가다가 개 목걸이 같은 것을 보았다.
이니셜로 S.H가 쓰여 있는.
팍.
이시우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개 목걸이를 주웠다.
“어라, 이게 왜 여기 있지?”
“뭐야, 네 거야?”
“응. 키우던 강아지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잃어버렸었거든.”
“……네가?”
온갖 물건을 아공간에 넣는 이시우가 잃어버렸다고?
윤채린은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피식 웃었다.
“됐고, 앉아.”
“……응.”
공터에 배치된 벤치에 앉았다.
이시우가 옆에 앉았다. 윤채린은 윗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문득 그 고민이 퍽 우스웠다. 여기까지 이시우를 끌고 와 놓고서 고민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윤채린은 고민했다.
네 남은 수명은 얼마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서 윤채린은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아하. 너 슬슬 주기가 오는구나.”
이시우가 입을 열었다.
……윤승하, 그 기지배가 다 말했나.
“걔가 말하디?”
“어. 승하가 너보고 조심하라더라. 특성이 위험한 게 잔뜩 들어 있어서 가끔 폭주를 할 수 있다고 주의하라던데.”
“……걔는 별걸 다 말하고 다니네.”
“그래서 어때? 괜찮아? 버틸 만 해?”
“당근빠따쥐.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 누나는 그런 거에 휩쓸리지 않아요~.”
이시우의 말에 윤채린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폭주의 전조는 있었다.
옆에 이시우의 특성이 자신을 붙잡았기에 폭주하지 않았을 뿐.
윤채린은 그 말을 삼켰다.
“그럼 이번 대련 때, 진심으로 덤벼도 되는 거지?”
“……진심?”
윤채린은 눈이 떨렸다.
진심이라. 저번에 썼던 그 기술을 쓴다는 건가. 몸을 망치며 극단적으로 속도를 올리는 기술. 이시우가 뇌혼이라 부르는 그 기술의 속도는 가히 일절이었다.
감각을 극도로 단련한 윤채린이 일순간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말이다.
윤채린은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10년을 이야기했을 때, 아련했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것은 이시우의 수명이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인 거겠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절반도 안 되는 수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선고받으면 도대체 무슨 기분일까. 늦어도 30전에는 죽는다는 건…….
윤채린은 눈을 감았다.
평소답게 누나라던가, 언니라던가 말하면서 너 따위가 덤벼도 이 몸은 쓰러지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련을 포기할래?
아니면 내가 포기할까?
무리하지 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가지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윤채린은 억지로 웃었다.
“덤벼.”
억지로 쥐어 짜낸 말.
제발 고개를 끄덕이지 말라고 생각했지만, 이시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수요일.
축제가 시작되었다.
히어로 아카데미의 문이 활짝 열리며 요정족들이나 돈이 없는 학생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 길을 담담히 지나치며 꼬치 하나를 입에 물었다. 잘 밴 양념의 맛이 혀를 만족시켰다.
실로 오랜만에 휴식이다. 그동안 훈련장에 처박혀 훈련만 했으니까.
“꼬맹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야구모자에 새까만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캐쥬얼한 복장의 여인이 보였다. 김은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꼬맹이. 잠시 안 봤지만, 굉장히 강해졌구나.”
김은정이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분들은?”
“다른 애들은 일이 있어서 안 왔다. 일본에서 의뢰가 들어와서 말이다.”
일본?
나는 김은정의 말에 굳었다.
일본에서 사건이 하나 크게 일어나는데 그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봉관의 무녀가 봉인한 거악 중 하나가 봉인에서 풀려나 일본의 오분지 일을 날려버리는 사건이 말이다.
그 사건은 2학년 때 벌어지는 것이지만, 원작이 많이 바뀐 지금 시점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혹시 처음 보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 마물이라던가 나오나요? 마물 주위에 가면 정신이 몽롱해진다던가, 무기력해진다던가.”
“응? 어떻게 알았지? 꼬맹이, 너 혹시 뭐 알고 있나?”
김은정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나도 얼굴이 굳었다.
혹시나 해서 찔러봤는데 정말 깨어나고 있다고?
“아는 정보통이 있어서요.”
“그래? 혹시 위험한 거냐?”
김은정이 물었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위험도 하나만을 따지자면 거악 중에서도 투톱으로 위험하다.
나태의 산양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위험해지니까.
마왕은 윤승하나 윤채린이 시간이 지나고 루트를 따름에 따라 물리칠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나태의 산양과 탐욕의 벌레, 오베론은 주인공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니까.
‘애초에 그 정도 흘러가 버리면 나라 하나쯤은 하루도 안 걸려서 멸망시키는 놈들이라 그전에 물리치지만…….’
그 나라가 세계 삼대 국가인 한국이나 미국, 중국이라는 게 문제지.
나는 고민했다.
이 정보를 알릴까, 말까.
이 정보를 알리면 김은정은 당장 일본으로 가서 가진 전력으로 나태의 산양을 죽이려 할 거다. 문제라면 여기서 김은정이 죽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게 문제지.
최상격에 오르고 멸망의 번개라는 권능을 가진 김은정은 정말, 정말로 강하다. 작정하고 파괴라는 행위에 집중한다면 한 시간도 안돼서 서울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게 김은정이니까.
다만 나태의 산양이 더 강해서 문제지.
하지만 여기에 내가 간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나태와 상성이 극단적인 「유아독존」. 그리고 일본에 잠들어있는, 삼신기를 해방한다면 나 혼자서도 나태를 사냥하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음, 생각해보니 혼자서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갑자기 좀 쫄린다.
거악 놈들이 정욕의 처녀를 제외하곤 혼자 다니는 놈들이긴 한데 아무래도 경지만을 따지자면 나 정도의 인간이 수백 명이 덤벼도 하품하면서 학살하는 게 나태라서.
“괜찮을 거예요.”
나는 김은정의 말에 답했다.
나태는 말 그대로 나태하기에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음 임무 주간이나 협회에 힘을 빌려 일본에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
미심쩍은 눈으로 김은정이 나를 바라봤다.
[욤뇸뇸]
갑자기 등장한 비염이 내 몸속에 마나를 빼먹었다. 불꽃 주위에서 음양의 전기가 파지직거렸지만, 비염은 그걸 신경 쓰지 않고 맛있게 마나를 먹고 있었다.
“오, 오랜만에 보는구나.”
[오랜만이야! 계약자의 상사! 잘 있었어?]
"물론이지. 너는 잘 지낸것같구나. 저번에 봤을 때 보다 위계가 더 높아진게……."
김은정하고 비염이 시시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닭고기꼬치를 크게 한입 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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