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이끌림(3)
* * *
금요일 오전 11시 57분.
모든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환호했다.
중간고사 직전이라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오늘 수업은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
“다들, 놀 생각 하지 말고 집에서 이론 공부하도록.”
“네에.”
단정한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여교수의 말에 다들 크게 네라고 답했다. 여교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다들 그룹 스터디 할래?”
임나연이 말했다.
말이 나오자마자 직감했다. 임나연이 그룹 스터디를 핑계로 같이 모일 거란 것을.
아마도 저번에 임나연에게 말했다가, 은수아랑 약속이 있다는 말로 거절해서 이렇게 둘러 말해서 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럴까?”
이지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윤승하가 슬쩍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크게 팔을 둘러 내 어깨 위에 걸쳤다.
“그룹 스터디 좋지. 남자들끼리 우정도 다질 겸 나랑 같이 공부할래, 시우야?”
윤승하가 말하자 임나연이 드물게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나 오늘 약속이 있는데.”
“아차, 미안. 오늘 은수아랑 약속이 있었지. 그룹 스터디 한다고. 근데 스터디는 사람이 많은 게 좋지 않을까?”
임나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은수아를 바라보니 은수아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래 공부는 적은 사람이 하는 게 좋아. 사람이 많이 모이면 괜히 번잡하다고. 그리고 저번에 시우가 상아탑에 도움을 줘서 그거 보답도 할 겸 가는 거기도 하고.”
“……진짜로?”
내가 놀라서 물었다.
은수아를 구하기 위해서 소교주, 홍유화를 상대했을 때, 크게 다치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회복약을 줘서 그게 보상인 줄 알았는데.
“……고작 그게 보상일 리가 없잖아.”
그렇기는 했다.
상아탑주가 은수아를 보통 아끼는 게 아니라서.
나는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감정.
▼
이름 : 은수아
근력 : 23
민첩 : 24
체력 : 23
마력 : 35
고유능력 : 칠색
특성 : 마도황제(S+), 원소응집체(S), 황금의 마안(S), 라피스 라줄리(S), 마법의 비원(A+), 신비의 기원(A+), 사고가속(A) 외 3종.
윤채린과 비교하자면 특성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였다. 내가 끼어들어서 「라피스 라줄리」와 「마법의 비원」, 「신비의 기원」을 얻어줬기 때문이다.
능력치의 차이가 꽤 있는 데다가 특성이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하게 다루겠지만, 윤승하와 꽤 좋은 싸움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터디는 다음에 하자.”
“다음 언제?”
나는 날짜를 보았다.
주말은 모두 약속이 있다.
“……월요일?”
“다음 주부터 시험 기간인데?”
“미안, 주말엔 다 약속이 있어서.”
나는 가방을 정리했다.
“그럼 슬슬 갈까?”
“응, 빨리 가자. 영감님이 너랑 만나는 거 엄청 기대하고 있어.”
은수아가 히히거리며 말했다.
***
“파파…….”
은수아가 부끄러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빛바랜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고, 반짝이는 금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노란색의 병아리 모자를 쓰고, 하늘색의 하늘하늘한 유치원 옷을 입었다. 가방은 란도셀이라 불리는 일본식 책가방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상아탑주님은……?
“수아, 오늘 파파가 상을 준다고 해서 엄청나게 기대했어요.”
……상아탑주님은?
은수아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근데 파파, 임나연이랑 친하게 안 지내면 안 돼요?”
“……나연이?”
“네. 요즘 자꾸 파파한테 자꾸 끼 부리잖아요. 그리고 친한 척도 하고.”
은수아가 불만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은수아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아마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은수아를 견제하는 게 임나연이기 때문일 거다.
‘은수아가 나쁜 건 아닌데.’
다른 애들이 나한테 들이대었으면 히히하고 웃으면서 받아들였을 거다. 은수아는 임나연과 견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여자애들은 괜찮지만, 정실의 가능성이 있는 은수아를 극단적으로 견제한다.
윤승하는 예외다.
임나연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걸 포용할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차별주의자라 게이를 굉장히 혐오한다.
“그래서 나연이가 싫어?”
은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로.
그러나 은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거짓말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은수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조용히 키스했다.
은수아가 조용히 눈을 감고 혀를 어설프게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은수아가 황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상아탑주님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 온다고 했는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내가 대신 전해주겠다고 하니까 알겠다고 하더라고.”
은수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마치 지금은 나와 있으니까 나만 봐달라는 목소리.
나는 살포시 웃었다.
“그래? 그럼 우리 수아 파파가 상을 줄까?”
“응. 나 진짜 열심히 했으니까…오늘 온종일 나랑 놀아줘요.”
그 뒤에 은수아랑 실컷 놀았다.
같이 비디오 게임을 한다던가.
"수아야, 그거 아이템 먹어야 해!"
"엇, 진짜네!"
집에서 큰 스크린으로 만화 영화를 본다던가.
"프리큐어는 역시 명작이야."
"수아야……."
실내 수영장에서 놀고, 같이 요리해서 저녁을 먹는다던가.
"파파는 요리도 엄청 잘하네."
"수아야 일단 그 식초 좀 내려놔."
"왜? 식초를 넣으면 맛있어지지 않아?"
"파스타와 피자를 만드는 중인데?"
은수아는 심각하게 요리를 못했었다.
“나 파파가 생기면 언제 한번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
“그래?”
“응.”
소파 위에서 내 무릎 위에 앉은 은수아가 말했다.
은수아가 내 손을 잡아서 껴안는 자세를 만들었다.
“파파는 어땠어?”
“나도 좋았어. 우리 수아랑 함께해서.”
“히히.”
내 말에 은수아가 활짝 웃었다.
“파파.”
“응?”
“이제 슬슬 밤이야.”
“그러네.”
“이제는 어른의 시간이야, 파파.”
은수아가 하늘색 옷의 아래를 들추었다. 내 팔을 은수아가 손으로 잡고 아래로 향하게 했다.
“나, 요즘 이상해. 파파 생각만 하면은 여기가 계속 축축해.”
은수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파파 것도 커졌네.”
은수아가 흐뭇해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은수아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
나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숲은 특히 위험하다. 집단으로 다니는 동물형 괴수들이 자주 출몰하기 때문이다. 아니, 집단형 괴수들은 그래도 괜찮았다. 거미형이나 곤충형 괴물보다는 나으니까.
“키에에엑!”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개 형태의 철갑옷을 두른 철갑견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수는 15마리. 많네. 나는 검을 꺼내 들었다. 벼락 통째로 검신으로 만든 듯한 푸른색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지지직!
기린검이 벼락을 뿜었다. 푸른색의 번개와 보랏빛의 번개가 어우러져 뇌광을 만들었다. 푸른빛의 번개가 철갑견을 휘감았다.
번쩍!
보랏빛의 뇌광이 돌진하는 철갑견을 갈랐다. 반으로 갈린 철갑견에서 비염의 보랏빛 불꽃이 피었다. 피어난 불꽃이 철갑견의 살을 가르며 나오는 피를 태웠다.
[설마 내 역할은 피를 제거하는 게 끝이야?]
피를 안 묻게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나는 불만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비염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설마.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를 한 거였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항의하는 비염을 무시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마리가 순식간에 죽었기 때문인지 철갑견들이 나를 경계하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특성을 발동했다. 「지식 열람」.
지잉.
허공에서.
주홍빛의 눈이 열린다. 지식이 머릿속에 새겨진다. 마법, 비원, 술식, 배열 같은 것들이 솟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수인을 맺는다.
수인에 따라 마력이 인도되며 마법을 만들었다. 보랏빛의 마나가 파지직거리며 번개를 만들었다. 번개에 하늘색이 머물고, 강렬하게 들끓었다.
일전에 은수아가 얻은 특성, 「마법의 기원」.
그것이 내 마법에 머물렀다.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지지지지직!
보라색의 번개가 그물처럼 퍼진다. 그물처럼 퍼진 번개가 철갑견을 사이를 오가며 전압을 증가시켰다.
[와우]
비염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 번의 마법으로 철갑견들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역시 마법의 화력은 우월하다.
[계약자, 진짜 대단하네. 검술도 수준급에 마법도 수준급이고. 정령술도 점점 수준급으로 올라가고. 슬슬 한 놈 더 계약해도 되지 않아?]
“그렇지. 그릇이 커지기는 했고.”
하지만 계약은 안 할 거다.
그보다는 비염의 강화가 더 효율이 높으니까.
정령은 한 마리 늘 때마다 용량을 크게 잡아먹는다. 윤승하가 가진 「세계의 운명」이나 「삼위일체」 같은 정령 특성을 가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사람은 계약할 수 있는 정령에는 한계가 있다.
나에게는 「세계의 운명」이 있기는 하지만, 가면의 효과인데다가 레벨도 낮아 효율이 별로다.
“하지만 안 할 거야.”
[왜?]
“네가 있으니까.”
[……계약자, 말투 너무 오글거리는 거 알아?]
“……그런가?”
처음에는 물의 정령과 계약할까 고민하고 있었지만, 지식 열람의 진정한 효능을 알게 된 뒤로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지식 열람의 능력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특성의 열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특성들을 모조리 베낄 수 있는 능력.
그러나 이것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있다. 가장 큰 건 아직은 높은 등급의 특성은 몸에 큰 부하를 준다. 저번에 내가 임나연의 특성인 「천영의 꽃」을 복사했을 때도 「유아독존」을 쓸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마법의 기원」을 이용했을 때, 두통이 심해진 것도 그 이유 탓이었다.
그리고 지식 열람을 통해 내가 확인한 특성이어야만 했고, 그 외에도 자잘하게 여러 가지가 있다.
“슬슬 가볼까?”
[빨리 가자고, 계약자.]
나는 시계를 보았다.
10시 52분. 여유롭게 잡아도 6시에는 돌아오겠군.
[그러고 보니 오늘 갈 곳이 어디야?]
“늪지대 형태의 던전이야.”
나는 그러면서 그곳에 있는 비약을 떠올렸다.
솔직히 오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다. 일시적으로 신체에 부하를 걸고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익시드」와 많이 고민했지만…….
‘「익시드」는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 주인은 김시연이니까.
나보다 김시연에게 더 맞는 능력이기도 했고.
***
“후, 힘들었어.”
[마지막에 나온 그놈이 진짜 무서웠어. 그 악어 놈, 피부가 진짜 단단하더라.]
“그래도 뭐, 이겼으니까.”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악어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검은 늪지의 악어라 불리는 놈이었다.
분류는 중격이지만, 몇 가지 특수한 능력 때문에 골치 아픈 놈이기도 했다. 부하들을 소환하는데 그게 벌레라서 마법사급의 화력이 필요하다던가.
나는 악어의 사체를 아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끝에 제단으로 가서 단과 금화, 아티펙트를 챙겼다.
[순조로운걸. 역시 내 계약자야!]
“뭘, 비염 너도 장난 아니던데.”
나는 비염과 서로를 칭찬하며 밖으로 나왔다.
쾅─!
그때였다. 멀리서 폭음이 들리며 땅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싸우고 있었다. 전투 직후의 민감한 감각이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포착했다.
3m 크기에 한쪽 팔이 기형적인 마인이 보였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극단적으로 근력이 강한 저 마인은 어떤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인이 크게 팔을 휘둘렀다.
쾅─!
팔을 휘두르자 마인이 공격한 곳이 포탄 세례라도 떨어진 듯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 위에서 마인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붕 뜬 인형이 보였다.
찬란한 금발이 보였다.
윤채린이었다.
윤채린이 허공에 떠 있자, 마인이 크게 웃으며 다시 한번 크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윤채린은 공중에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허공답보라 불리는 극상승의 경공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천마신결.
보법 중 하나인 천마월보였다.
천마문워크를 쓰며 거리를 벌린 윤채린이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발견했다.
“시아야, 언니 좀 도와줘라아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공간에서 감자 튀김을 꺼냈다.
킹데리아에서 얻어온 수제품. 감자 튀김의 여신이 가장 좋아하는 감자 튀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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