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이끌림
* * *
공허족의 왕은 굉장히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종족 전체와 땅을 이끌고 바깥으로 도주한 삼왕 모두가 특별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다.
홀로 거악들을 토벌할 수 있는 강함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요정족의 여왕인 티타니아는 그녀의 능력인 동화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세계수와 동화하여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그곳에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힘을 가진다.
그리고 티타니아는 눈이 뛰어나다. 그녀의 눈은 통일한국북한과 통일된 한국전체를 감시할 수 있으며, 재능을 제대로 개화하지 못하는 소년이나 소녀들을 판별해 그들을 끌어내 재능을 개화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허점이 있다. 그래서 빌런들이 한국에 발을 붙여서 살아갈 수 있는거고.
용왕은 용족에 한하여 신룡족으로 만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후에, ‘용의 피’를 이은 한종우는 신룡족이 되어 윤승하나 윤채린을 든든하게 도와준다.
공허족의 왕은 그중에서도 굉장히 특별하다.
사람마다 그릇이 있는데 이것을 강제로 확장하며, 특성이나 고유 능력을 진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한계는 존재했다.
고유 능력들 중에서 진화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임나연이 가진 「대해의 마나」나 김하린이 가진 「광익」은 각각 「인피니티」와 「진성광익」으로 진화가 가능하지만, 윤승하가 가진 「세계의 운명」이나 윤채린이 가진 「천상의 마」는 진화할 수 없다. 은수아가 가진 「칠색」 또한 불가능하다.
다만 위의 세 명은 어떤 루트를 클리어하면 진화가 가능해진다. 은수아는 저번에 던전을 돌아 얻었던 라피스 라줄리로 칠색을 뭉쳐 칠색검에 상위의 단계에 있는 「공허의 검」으로.
윤승하와 윤채린은 두 가지의 진화단계를 가지고 있다.
거악을 쓰러트리면서 고유 능력의 진정한 힘을 각성하고 Ex 등급으로 추정되는 능력, 「정신」과 「마신」으로. 이때의 윤승하와 윤채린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다.
홀로 마왕을 죽일 수 있으며, 단일 개체로 가장 강한 거악, 묵시록의 붉은 용이나 무신, 혁월도 상대가 안 되니까.
하지만 이래도 후반에 등장하는 마신한테 윤승하는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마신에게 패배한다. 라며 텍스트 한 줄로 끝나버린다.
나는 쭉 고민했다.
나라면 공허족의 왕의 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내가 가장 먼저 올려야 하는 능력이 무엇일까.
「천의 가면」, 「지식 열람」, 「천수」.
이 세 가지 것들이었다. 허나 위의 세 가지는 모두 S등급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다. 아마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저 세 개는 진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변강쇠」와 「음양체」였다. 「음양체」는 시간이 흐르면 김은정과 같은 「태극지체」로 진화하니까 패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변강쇠…….’
「유아독존」 역시 진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조건을 만족하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진화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변강쇠」 밖에 없다. 「변강쇠」에서 S등급으로 진화하면 「색즉시공」이라는 특성으로 변한다. 「색즉시공」의 능력은 변강쇠와 궤를 달리한다. 에너지의 치환에 중점을 둔 능력이다.
진화조건이 꽤 까다롭지만, 나에게는 별 문제없다.
진화조건이 색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면 얼마 안 가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것저것을 떠올리며 이동하다가 어느새 교장실 앞에 당도한 것을 깨달았다.
똑똑.
그란데힐이 우아하게 노크했다. 나무 문이 소리 없이 절로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평소와 달리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티타니아가 있었고, 그 앞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안뇽안뇽~.”
내 허리보다 약간 높은 키를 가진 중학생 언저리로 보이는 소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란데힐이 옆에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도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으음, 너무 딱딱한데. 그냥 편하게 인사해. 편안하게~.”
저 말은 함정이다.
진짜로 편하게 하면은 삐진다.
“괜찮습니다. 아, 오는 길에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나는 샤오메이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물건을 꺼냈다. 샤오메이에게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고, 천수를 활용하여 연금으로 만들어낸, 환상 밀크티. 내가 먹기에는 정말 단 물건이지만, 여자애들에게 선물로 주면 호감도가 굉장히 높게 책정된다.
나는 그것이 담긴 보온병을 꺼냈다.
킁킁.
그러자 코가 움찔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뭐, 뭐야? 엄청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특별히 만든 주스입니다. 드셔보실래요?”
“응, 빨리빨리!”
“그란데힐. 다과와 함께 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티타니아의 말에 그란데힐이 고개를 숙이며 다과를 가지러 갔다.
“시우는 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티타니아가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냉큼 앉았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코를 스쳤다.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란데힐이 다과를 내왔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그릇 위에는 주전부리와 황금색으로 빛나는 액체가 담긴 컵을 내왔다.
공허족의 왕, 에니스는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컵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는 냄세를 맡았다.
헤벌쭉.
에니스가 바보같은 웃음을 지었다.
홀짝.
에니스가 차를 한잔 마시다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이거!”
에니스가 화들짝 놀랐다가 다시 차를 마셨다. 티타니아도 차를 마시다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꿀꺽꿀꺽.
숨도 쉬지 않고 한잔을 단번에 마신 에니스가 그란데힐이 들고 있는 보온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기 말이야.”
“네.”
“혹시 저거 어떻게 만들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어? 값은 내가 톡톡히 치러줄게.”
에니스가 나에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별로 어려울 것 없어요. 신비초와 하늘벌의 꿀, 마력초를 먹여서 키운 1등급 젖소의 젖과…….”
“잠깐잠깐. 내가 물어봐 놓고 이렇게 말하는 건 이상하긴 한데, 그렇게 깔끔하게 가르쳐 줘도 돼~?”
“에니스 님이니까요.”
“너, 엄청 괜찮은 애구나~?”
에니스가 활짝 웃었다.
“음~내가 말이야 조금 도와줄까?”
“도움이요?”
나는 눈을 반짝였다.
“응. 내 능력이 남의 능력을 개화시키는 쪽에 있거든.”
“그럼 제 특성도?”
“응, 가능해. 근데 지금 가능한 건 몇 개 없어 보이네. 지금 네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주홍색의 눈이 눈을 조금 ‘뜨게’ 해준다던가. 아니면 분홍빛으로 빛나는 걸 진화시켜줄까?”
분홍빛으로 빛나는 건 아마도 「변강쇠」일 거다.
그러나 주홍색의 눈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눈이요?”
“응, 눈. 뭐라고 해야 하지. 좀 말하기 어렵네~. 아마 네가 똑똑한 이유와 관련이 있는 느낌인데.”
우움.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에니스가 이마를 찌푸렸다.
“어떻게 할래?”
에니스가 나한테 물었다.
진화조건을 모르는 「지식 열람」의 강화냐, 진화조건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색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조건을 만족하고 있는 「색즉시공」이냐.
답은 정해져 있다.
***
“우와 진짜 장난 아니네~.”
에니스는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며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에니스가 개화하자마자 주홍빛의 눈동자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눈을 뜨는 건 조금 먼 후의 일일 것이다. 저 눈은 생각보다 위험해 보이니까.
“괜찮은 겁니까?”
걱정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왕의 비서, 그란데힐. 공간장악이라는 굉장히 희귀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에니스에게는 뛰어난 업무처리 능력이 더 인상 깊게 다가온 여성이었다.
“응~괜찮아. ‘눈’ 자체는 굉장히 위험하지만, 쟤는 이것저것 가진 게 있어서. 오, 뜨기 시작했다.”
검게 물드는 눈에 따라 검은색의 왕관이 진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천 개의 가면과 천 개의 손. 그것들이 왕관을 향해 뻗고 있다.
‘정말 재밌네. 저것도 아직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 같은데.’
에니스는 손들을 바라보았다. 천 개의 손. 저것들도 범상치 않다. 남의 ‘영혼’을 빼앗거나 훔치는 가면도 범상치 않지만…….
“그러고 보니 가면은 괜찮은 건가요?”
“어, 괜찮아~저 가면은 생각보다 해가 없거든. 무식하게 자기보다 격 높은 상대의 가면을 쓰면 좀 위험하겠지만……쟤는 왕관이 있으니까.”
“왕관이 있다고요?”
티타니아의 물음에 에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타니아는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저 소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수백 개나 되는 가면들이 자기 눈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후아암. 오랜만에 능력을 썼더니 조금 피곤하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줘~.”
에니스가 기지개를 켜며 졸린 눈으로 교장실을 나갔다.
티타니아는 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에니스가 피곤을 느낀다고 하는 것이 언제였더라. 일전에 마왕하고 싸울 때랑 거악과 단신으로 싸울 때 정도 아니면 티타니아는 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보지 못했다.
에니스가 피곤을 느낄 정도라니, 도대체 무슨 능력을 개화한 거지.
시선을 옮겼다. 이시우가 보였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아름다움은 요정족들 조차도 눈에 띄는 그것이었다. 거기다가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요사한 분위기는 화룡점정이었다.
타락하기 전, 요정족을 이끌던 남자가 떠올랐다.
전대 요정족의 여왕이 죽고, 미쳐버리고 마왕의 휘하로 들어갔던 왕이.
티타니아는 추억에 잠긴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
다시 태어난 것같이 개운했다.
몸이 가볍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이미 어둑해진 지 오래.
그란데힐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네. 몸이 가뿐해.”
나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다른 분들은?”
“에니스 님이랑 티타니아 님은 가셨습니다.”
“그래?”
나는 그란데힐을 보았다. 눈이 강화되었다고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강해졌는지 모르겠다.
……일단 눈이니까 감정과 관련된 게 아닐까.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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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그란데힐
근력 : 28
민첩 : 32
체력 : 30
마력 : 35
고유능력 : 공간 장악
특성 : 완벽한 가사(S), 암귀(S), 현모양처(A+), 공간제어(A) 외 3종.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특성이 보였다.
그렇지만 이걸로는 좀 부족해 보였다.
나는 내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은 변한 게 없었다. 설마 특성 하나 바뀌었다고 끝인 건가.
낙담하던 찰나였다. 머릿속에 지식 열람의 사용법이 새겨졌다.
……이게 가능하다고?
“…….”
“왜 그러십니까?”
“아냐, 좀 당황해서.”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운이 좋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