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부녀(6)
* * *
두둑.
기지개를 켰다.
불편하게 자서 몸이 뻐근했기 때문이다.
한가인은 우리를 도심지로 데려다주고 어디론가 향했다. 다급한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우리에게 뭐라 말하지 않았으니, 굳이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닐 터다.
“괜찮아?”
은수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내가 잠들었는데 혹시 불편했어?”
“응, 아니야. 우리 사이에 뭘.”
은수아가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점심 먹으러 갈까?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우음. 글쎄.”
입술을 내밀며 은수아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묘한 눈으로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은수아가 혀 짧은 소리를 내었다. 아까 전 마인에게 당한 환상이 아직도 여파가 있는 것 같다.
“돈가스 먹을래? 파스타랑 돈가스 잘하는 집 알고 있는데.”
“돈가스?”
은수아가 내 말에 반응을 보였다.
“어, 돈가스. 아니면 일식집 갈래? 일식 좋아하잖아. 초밥집도 괜찮고.”
“초밥 먹고 싶어?”
은수아가 나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일식집으로 가겠지만, 나는 조용히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현혹하는 나비의 효과가 아직 있는 지금은 그녀가 택하는 게 좋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먹을 것을 먹으면 스트레스 수치가 많이 풀릴 테니까.
“그럼 족발집 갈까?”
“족발?”
“엉. 시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잖엉.”
“좋아하긴 하는데, 어제 먹어서 좀…….”
“하긴.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지. 그럼 돈가스 먹으러 갈까? 라멘 맛있게 하는 데로 가자.”
“그럴까?”
“응, 파파.”
은수아가 내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다.
“아……미안. 아직 마인에게 당한 후유증이 있네.”
……이해한다. 현혹하는 나비는 후유증이 꽤 쌔서 그거 처리하느라 귀찮아 나도 꽤 상세하게 기억하는 편이었으니까.
이럴 때는 정면 돌파가 좋다. 괜히 이리저리 후유증을 치유하려고 돌아가려다가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은수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활약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챙기려면 내가 관리 해줘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러자면 내가 아빠의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럼 오늘 하루만 아빠 역할을 해줄까?”
“어? 지, 지지, 진짜?”
은수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렇게 좋은가.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후유증 때문이잖아. 그런 건 초반에 빠르게 잡는 게 중요해.”
“그, 그렇지? 이런 건 초반에 빨리 잡아야 하지?”
…뭔가 방금 함정을 밟은 것 같은데.
“그, 그럼 파, 파, 파파. 파파는 뭐 먹고 싶어?”
“나? 지금 생각나는 게 없네. 우리 수아는 뭐 먹을래?”
“우, 우리 수아?”
은수아가 얼굴이 발개지며 나에게 물었다.
“이 호칭은 조금 그런가?”
“아, 아냐. 조, 좋아. 그, 그럼 파, 파파. 빠, 빨리 가자.”
은수아가 나한테 가까이 오더니 양팔로 내 왼쪽 팔을 휘감았다.
“오늘 하루만. 딱 하루만 이래도 될까?”
“……응. 오늘 하루만이야.”
은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자 은수아가 갸르릉거렸다. 고양이인가.
우리는 금세 일식집에 도착했다.
일식집은 고급스러움을 풍겼다. 사람이 몇 없는데 전부 명품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서오십시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 안을 들어가기 전에 마법사로 보이는 한 여성이 뜨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본 것 같은데.
안내를 받은 방은 정말 고풍스러웠다. 그림 몇 개와 비싸 보이는 도자기 등이 장식하고 있었다. 특실인가. 하긴 은수아가 있으니까.
“주문하실 때에는 종을 치시면 저희가 오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는 직원이 바깥으로 나갔다. 은수아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
“파파, 뭐 먹을래? 여기 돈가스 엄청 맛있는데. 아, 라멘도 맛있어. 여기 주방장이 일식 요리만 50년을 해온 사람이라서 말이야.”
은수아가 옆에서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얘가 이렇게 활발했나 싶을 정도로.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은수아의 말에 맞장구쳐줬다.
“그래? 그럼 뭐부터 먹지.”
“여기 초밥 엄청 맛있는데, 초밥 먹어볼래? 영감이 입맛 까다로운데 여긴 맛있다고 할 정도야.”
여기서 말하는 영감은 상아탑의 탑주이다.
나는 메뉴판을 봤다.
“그럼 초밥 먹을까? 초밥으론 좀 부족할 것 같으니 돈가스 하나 시키고…….”
“난 돈코츠 라멘. 아, 파파. 여기 새우장 맛있는데 새우장이랑 연어장 맛있는데.”
“그것도 시키자.”
메뉴를 다 정한 다음 종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종업원이 들어왔다.
“여기 초밥 하나랑 돈가스, 돈코츠 라멘이랑 새우장하고 연어장 하나 주세요.”
“네, 주문받았습니다.”
종업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런 데는 보통 회 같은 것만 팔지 않나.
“파파, 그러고 보니 중간고사 준비 잘 돼?”
은수아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생기 가득한 눈이 나랑 계속해서 아이컨텍을 했다. 이건 좀 부담스러웠지만, 은수아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쯤이야.
“그러고 보니 슬슬 중간고사가 다가오네. 수아, 넌 잘 돼?”
“나는 엄청 잘 되지. 실기가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그래도 윤채린을 이번에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은수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좀 힘들다. 윤채린도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이제 중간고사 전에 명교의 신물을 하나 더 찾아, 강해질 예정이다.
물론 윤승하도 강해지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그림자의 정령을 사역해야 하지만 이미 전 학기에 사역을 마친 지금 윤승하는 2학년 때 얻을 정령 하나를 사역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
임나연은 천영의 꽃을 슬슬 다루고 있다. 저번에 훈련하는 모습을 슬쩍 봤는데, 장난 아니더라. 냉기를 수족처럼 다루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가히 여제라 불릴 정도로 어울렸다.
이지아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마도의 업이라는 고유 능력이 워낙 사기이기에 이지아는 딱히 터치할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그녀는 ‘라플라스’라 불리는 정령이 마법을 이끌어주고 있으니.
“파파는 어때? 이론은 당연히 만점일 테고, 실기가 문제겠네.”
“뭐, 그렇지. 실기는 조금 두렵네.”
“걱정하지 마. 만약 수아가 파파 만나면 적당히 봐줄 테니까!”
그건 고맙네.
“식사 나왔습니다.”
은수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음식이 왔다. 직원들이 조용하게 식탁 위로 음식들을 올렸다. 돈가스, 돈코츠 라멘, 연어장이랑 새우장, 초밥 등이 올라왔다.
나는 연어 초밥에 젓가락을 옮겼다.
“오, 맛있네.”
“그치? 파파, 이것도 먹어봐. 맛있어.”
은수아가 숟가락으로 연어 한 점을 내게 주었다. 나는 입을 벌려서 그것을 받아먹었다. 입맛을 돋우는 감칠맛이 느껴졌다. 굉장히 맛있었다.
“맛있네. 우리 수아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다.”
“……나, 나도……파, 파파가 먹여줘.”
나는 돈가스 한 점을 소스에 찍었다.
“자, 아~.”
“아, 아앙.”
은수아가 입을 벌렸다. 돈가스가 은수아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돌았다. 돈가스를 입에 넣기 전에 바로 뺐다. 딱하고 은수아가 허공을 씹었다.
“아앙, 파파!”
“미안, 미안. 우리 수아 공주님이 귀여워서.”
“…….”
화악.
그런 소리가 난 것 같다.
수아 공주님이라고 하자 은수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번에는 장난 안칠게. 자, 아~.”
“아~.”
은수아가 조용하게 입을 열고 돈가스를 우물우물했다.
“맛있어?”
“……응. 엄청, 엄청 맛있어.”
“그래?”
“응. 파파가 먹여주니까 진짜 맛있어. 나, 나도 줄게. 이거 엄청 맛있어.”
은수아가 수저에 돈코츠 라멘 국물과 면을 담고, 그 위에 차슈까지 올렸다. 차슈, 저거 엄청 맛있는 건데. 내가 입을 벌리자 은수아가 내 입에 수저를 넣어줬다. 돈코츠 라멘은 느끼해서 별로였는데, 기본 베이스는 같아서인지 내 입에는 좀 별로였다. 차슈는 맛있었고.
“최고인데. 우리 수아가 주니까 더 맛있다.”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은수아가 웃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환한 표정으로.
그리고 약 2시간가량 식사가 이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서로 떠먹여 줬기 때문이었다.
***
밥을 먹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공원으로 향했다.
놀이공원을 갈까 생각해봤지만, 지금은 사람이 너무 붐빌 테니 무난한 공원이 좋을 것 같아서.
내 제안에 은수아도 크게 나쁘지 않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이라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부녀의 느낌을 내고 싶어 손을 잡고 있을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이거 부녀가 아니라 애인이 아닐까.
“공원도 나쁘지 않지?”
“응, 좋다. 파파랑 있으니까 더 좋아.”
은수아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천의 가면으로 은수아의 감정을 살폈다. 느껴지는 감정은 진한 행복. 부정적인 감정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후유증이 거의 없다는 건데. 문득 묘한 불길함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파파, 우리 저쪽으로 가볼까?”
은수아가 공원 한쪽을 가리켰다. 나무가 우거져서 잘 안 보이는 곳.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나와 은수아는 안쪽으로 향했다. 안쪽에는 커플이 대부분이었다. 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거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은수아는 그걸 눈치 못 챘는지 내 어깨에 기대어 잘도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옛날에 잠깐 키우던 고양이가 떠올라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을 걷다가 문득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태양처럼 찬란한 금색의 머리카락. 은수아도 그것을 봤는지, 재빠르게 손을 놓았다.
“쟤, 윤채린 맞지?”
“그러게.”
윤채린은 혼자가 아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태평양처럼 넓은 남자가 그녀의 주위에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을 알고 있다. 3학년에 있는 ‘검룡’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윤채린으로 플레이하면 공략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이고.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남궁선우.
왠지 모르지만, 윤채린과 같이 있는 남자를 보니 기분이 나빠졌다.
“야, 윤채린!”
은수아가 옆에서 윤채린의 이름을 불렀다. 윤채린이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다라는 듯이 뚱한 표정에서 은수아를 보고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리고 씩, 하고 웃다가 나를 보고는 멈칫했다.
“뭐야, 너희 둘 왜 이 공원에 온 거야.”
“응? 아, 파시우랑 던전갔다가 밥 좀 먹고 잠깐 들른 거야.”
“잠깐?”
윤채린이 의심스럽다는 듯, 지긋이 나와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근데 그쪽은?”
은수아가 윤채린 옆에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남궁선우야. 부끄럽지만 검룡이라고 불리고 있지.”
“아, 선배였군요. 안녕하세요.”
은수아가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남궁선우가 손사래를 쳤다.
“인사는 안 해도 되. 난 그런 허례허식은 싫어하거든.”
거짓말이다.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인물이다. 초반에 1학년에게 얻어터진 2학년을 보고 1학년에 기강을 잡으려는 악역으로 등장했다가 윤채린에게 얻어맞고 그녀에게 반해서 졸졸 따라다닌다.
대사가 아마 나에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 였지?
“너는…이시우 맞지?”
“네,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자, 묘하게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마 90도로 허리를 숙이지 않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보다! 너희 뭐야. 왜 너희 둘이 이 공원에 있는 거야?”
“그냥 던전 돌다가 점심 같이 먹었는데 말이야. 밥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먹어버리는 바람에 소화 좀 시킬 겸 걷고 있었어. 근데 채린이 너는?”
“나는 잠깐 수련 중이었지?”
“둘이서?”
내가 묻자 윤채린이 뭐라 하려다가 갑자기 흐흐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우리 시아, 설마 질투하는 거야?”
윤채린이 내 옆으로 슬쩍 오면서 팔꿈치로 툭툭 쳤다.
은수아하고 남궁선우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것 같은데~~.”
윤채린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아, 선배. 아무튼 일 끝났으니 저 가도 되죠?”
“……응.”
윤채린의 말에 남궁선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거의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저희가 같은 조라 의논할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윤채린이 내 팔과 은수아의 팔에 팔짱을 끼며 밖으로 뛰어갔다.
“와, 진짜 고맙다. 우리 시아랑 수아 덕분에 탈출했네. 저 선배 존나 느끼한 주제에 눈은 높아서 자꾸 껄떡대서 귀찮았는데.”
“네가 그런걸 신경 써?”
은수아가 툭 물었다.
“아니, 나라고 그냥 막무가내로 들이받는 줄 알아?”
“막무가내로 들이받…지는 않지, 채린이가.”
윤채린의 말을 부정하려다가 매섭게 노려봐서 말을 바꿨다. 아무리 나라도 윤채린은 버겁다.
“너희 지금 아카데미 가는 거야?”
“엉, 그렇지.”
사실 공원에서 은수아랑 좀 더 놀까 했지만, 시간이 너무 애매했다.
“그, 그럼 혹시 나 돈 좀 빌려 줄 수 있냐.”
“돈? 그건 왜?”
“나 이번에 워프 게이트를 다 이용했거든……. 다음 달에 장학금 나오면 바로 갚을 테니까!”
이상할 거 없기는 하다. 윤채린은 명교의 신물이나 천마신결의 조각을 모으기 위해서 여기저기 자주 다니는 편이니까. 알겠다고 답하려다가 멈칫했다. 꽤 좋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빌려줄 테니까, 갚을 필요는 없고 부탁 몇 개만 하자.”
“뭐? 돈 대신 몸으로 때우라고?”
윤채린이 악동같이 미소를 지으며 팔을 x 자로 교차했다.
“아니, 그건 됐고.”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대놓고 거절하면 좀 상처인데.”
윤채린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나랑 어디 좀 돌자고.”
“뭐, 그 정도야.”
내 제안에 윤채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
나는 지금 은수아와 부실에 단둘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천의 가면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것을 숨긴 탓일까.
아니면 중간에 윤채린과 있어서 그런가.
“그러니까 이제부터 시우는 은수아랑 단둘이 있을 때, 은수아의 아빠가 됩니다.”
‘……수아야.’
뭐, 그렇게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