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부녀(5)
* * *
“이봐, 뜬금없는 말이지만, 가면을 벗어줄 수 있나? 안에 있는 얼굴이 궁금해서 말이야.”
마인이 느끼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 역겹네.
나는 몸속의 뇌령들에게 마나를 주입했다. 뇌령들이 마나를 받아먹으면서 번개를 뿜어냈다. 전신의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조심해. 상대는 현혹 마법이 특기야.”
“내가 나설까?”
은수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수아도 저것에 넘어간다. 은수아도 유물이나 아티팩트가 있지만, 현혹하는 나비는 정신 방벽이 없는 특성이나 고유 능력이 없으면 막기 힘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나에게 최적화된 상대가 저 녀석이었다.
은수아가 마법을 전개하였다. 은수아가 다루는 마법들이 은은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마법의 비원」의 특성이었다.
“어이쿠, 그건 안되지. 여자라면…은수아 맞지? 상아탑의 후계자를 잘못 건들이면 아무리 나라도 꽤 위험하거든. 너는 얌전히 잠에 빠져 있어라.”
짝.
마인이 손뼉을 쳤다.
마인의 특징이었다. 고유 능력인 현혹하는 나비를 전개할 때 그는 손뼉을 친다. 그가 손뼉을 치면 나비가 온갖 장소에서 등장하며 상대를 현혹한다.
심지어 중격이라 할지라도 그 현혹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유아독존.
이것의 능력은 일종의 정신 방벽을 치는 것이다. 나보다 격상의 상대조차도 환혹이 걸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데 나보다 약한 상대의 환혹쯤이야.
파지직!
보랏빛의 번개가 사방으로 튀었다. 뇌령신공의 오의─뇌혼?. 그것을 발동시키자,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쭉하게 늘어졌다. 시야가 자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마인을 향해 재빠르게 뛰어갔다.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떤 것을 고를까. 잠깐 고민했지만, 벼락검을 꺼내었다. 일전에 여장을 대가로 그란데힐이 건네준 물건이었다. 벼락을 그대로 검신으로 만든 듯한 푸른빛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슬아슬하게 속도가 부족할 것 같다.
저 마인은 철저하게 상대를 현혹하고, 농락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그 본성은 겁쟁이이기에 상대가 자신의 환상에 걸리지 않았단 것을 깨달으면 바로 도망을 준비하는 인물이다.
가면을 쓴다. 어검은 애매했다. 벼락검은 상격에 이르러서도 쓸 수 있는 물건이기에 어검을 사용하면 마나 소모가 너무 격렬하다. 그렇기에 그란데힐의 고유 능력을 모방한 가면을 쓴다.
“……!!”
마인이 당황한 게 느껴졌다. 품속에서 검은색의 손을 꺼내었다. 공간 속성과 관련된 유물. 저것은 사용자를 1km 밖으로 무작위로 이동시켜주는 물건.
뇌혼을 킨 지금의 상태라면 1km를 주파하는 것도 10초도 안 걸려서 도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굳이 지금 잡을 수 있는 상태에서 상대를 놓쳐줄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은수아가 현재 환혹에 걸려서 눈치챌 수도 없고.
콰득.
그란데힐의 능력이 발동된다. 공간 장악이 마인의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재빠르게 몸을 뒤틀었다.
그렇지만 늦었다. 검은색의 구체가 마인의 손목을 그대로 압력에 짜부라졌다.
“크아아악!”
마인이 손목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 다른 손으로 검은 손을 잡아서, 마법을 발동시키는 점에서 살고자 하는 발버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봤자 의미는 없다. 뇌혼을 발동시킨 내 속도는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다. 순간적인 속도는 대략 1초에 100m.
서걱
마인의 목이 하늘 위로 올랐다. 몸과 분리된 목에는 경악 어린 표정이 선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꼴도 보기 싫기에, 비염을 소환했다.
“비염.”
[오케이.]
“태워버려.”
[타올라라, 얍!]
비염이 손을 뻗으며 괴인의 목을 조준하자 괴인의 목이 보랏빛의 불꽃에 타올랐다. 그러자 멀리서 은수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파파?”
……쟤는 도대체 무슨 환상을 본거지.
현혹하는 나비는 일종의 상대가 보고 싶은 환상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일찍이 자기가 잃었던, 가족이나 혹은 인생에서 자신이 가장 슬펐거나, 행복한 순간을 말이다.
은수아는 눈가를 글썽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나를 보고는.
와락!
“파파! 죄송해요! 다시 파파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제발, 제발 수아를 버리지 마세요!”
울면서 매달렸다.
젖은 목소리였다. 누구라도 한눈에 알 정도로 은수아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본거지?
나는 은수아의 행동에 당황하면서 일단 달래 주었다. 차분하게 머리를 쓰다듬자 은수아가 흐느끼는 소리가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한 슬픔과 죄책감.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봤을까.
은수아는 부모님이 없다. 어렸을 적,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은수아는 친척인 고모와 상아탑의 탑주의 손에 컸다.
“괜찮아. 전부 다 꿈이야. 안 좋은 꿈을 꾼 것 뿐이야.”
“…꿈?”
“어, 꿈. 조금 전 마인이 환혹으로 만들어낸 꿈일 뿐이야. 괜찮아.”
그렇게 은수아를 다독이며 차분하게 머리를 쓸었다.
“……조금 전에 일들이 전부 다 꿈이라고?”
“현혹하는 나비. 저 마인이 가지고 있던 현혹의 능력이야. 상대한테 환각을 보여주는 거지. 근데 부모님에 관한 꿈을 꿨어?”
“……어? 어, 어…부, 부모님에 대한 꿈을 꿔, 꿨어.”
은수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런데 시우는 야, 약점이 정신력 아니었어? 근데 환상은 어떻게.”
은수아의 말에 나는 미리 검은색으로 칠해둔 배지를 꺼내었다. 실피드의 증표를 검게 물들인 색. 사실 저 배지와 비슷한 배지가 없어서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그것을 검게 물들여서 실피드의 증표를 모작한 것이다.
그러나 실피드의 증표와 같은 현묘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뭐, 어차피 힘을 잃었다고 변명할 거니 문제는 없지만.
“꽤 힘들게 구한 건대. 안타깝네.”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러자 은수아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 그럼 이제 한동안 정신 공격은 위험한 거야?”
“그렇지, 뭐. 그러니까 나 좀 잘 지켜줘라.”
실상은 별로 위험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둘러대었다.
솔직히 말해서 은수아라면 말해도 별 상관은 없다. 천의 가면이 문제지. 천의 가면이란 능력이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기에 설명하기가 조금 그랬다.
끼에에엑!
저 멀리서 무언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새라고 하기에는 목소리에 담긴 힘이 크고, 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약한 힘이 담긴 힘. 아니나 다를까. 한가인의 환수인 비룡이 있었다.
“오, 신입!”
한가인이었다.
“하이룽! 오랜만이지, 신입아.”
“네, 가인 누나. 오랜만이네요. 방학 때 체험으로 협회에 간 뒤의 처음이죠?”
“엉. 가끔 카톡 하라니까. 벌써 우리 잊어버린 줄 알았네. 그런데 마인 못 봤어?”
“마인이라면…….”
나는 시체를 한쪽 손으로 가리켰다.
목이 깔끔하게 날아간 채 땅에 엎어져 있는 시체가 있었다.
“좀 까다로운 마인이더라고요. 환혹계열 능력인데…….”
“헉, 어떻게 잡았어? 신입이 너 정신 쪽에 영 젬병이잖아.”
“정신 쪽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 있어서요. 방금 막 쓴 터라 지금은 좀 무력한 상태이긴 해요.”
오호. 하면서 한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옆에 은수아를 보고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야 뭐야! 너 마탑주의 후계자인 은수아 아니야?”
“네, 맞아요.”
“뭐야, 둘이 친했던 거야? 신입, 이런 여자친구가 있으면 우리한테 바로바로 소개시켜줘야지. 아 참, 이런 내 소개를 안 했네. 나는 한가인. 영웅 협회의 직원이야.”
“여, 여자친구요? 저, 저는 은수아라고 해요.”
한가인의 말에 은수아가 얼굴을 붉혔다.
“누나 죄송한데, 저희 도심지까지 태워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좀 피곤해서.”
“아, 그래? 그럼 우리 용용이 등에 태워주지 뭐.”
나와 은수아는 용용이 등 뒤에 올라탔다. 잠이 솔솔 쏟아졌다. 유아독존을 이용하면 바로 상태가 멀쩡해지겠지만, 은수아나 한가인의 눈이 있어서 좀 꺼림직했다. 굳이 쓰고 싶지도 않고.
“으음…….”
“왜 그래? 졸려?”
“어, 조오금 졸리네. 좀 무리 했나 봐.”
“그럼 신입아, 잠들어도 돼.
나는 조용히 잠에 빠졌다.
***
어렸을 적의 바랬던 꿈이었다.
정말로 행복한 꿈.
장소는 놀이공원이었다.
한때 내가 꿈꿨었던 광경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관람차와 회전목마. 손에는 솜사탕이나 츄러스를 들고, 머리 위에 머리띠를 쓰고, 즐겁다는 듯이 웃는 광경.
TV에서나 봤었던 풍경이었다.
아니, 이런걸 바랬던 게 아니다.
아이들이 웃으면서 부모님의 손을 잡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평온한 일상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은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우리 공주님, 아빠랑 같이 놀까?”
이제는 잊어버린 어렸을 적의 모습이 순간 이시우의 얼굴하고 겹쳤었다. 아닌가. 그냥 이시우인가. 상관없었다. 나는 까만 머리를 흩날리며 이시우에게 달려갔다.
“네, 파파!”
이상하게도 꿈속에 자신은 몸이 어려졌다. 대충 10살 전후였다. 하이힐을 신으면 시우하고 키가 얼추 맞았는데. 그때의 자신은 시우의 허리 반밖에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공주님은 뭐하고 싶어요?”
“수아는 우움……회전목마! 아, 아니다! 관람차, 저기 저 자이 드롭스라는 것도 재밌어 보이는뎅…….”
“그럼 수아가 하고 싶은 거 다 할까?”
“진짜? 파파, 거짓말하면 안대! 수아랑 약속해!”
“물론이지. 우리 수아가 하고 싶은 거 같이 하자.”
“그럼, 그럼! 처음은 수아 목마에 태워주세요!”
“목마?”
“응! 수아 테레비에서 봐써! 목마 타는 거! 수아도 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우리 공주님 목마에 태워줄까.”
이시우가 무릎을 굽혔다.
나는 낑낑거렸지만, 낮아진 키 때문에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으쌰.”
이시우가 가볍게 자신을 안아 들고 어깨 위로 자신을 올렸다.
“뭐야, 우리 공주님 왜 이리 가벼워. 좀 더 커야겠는데.”
“수아는 이쁜 공주님처럼 클 거야!”
“수아는 지금도 이쁜 공주님인데~.”
“더 이뻐질 거야! 키도 이마안큼 커질 거야!”
나는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 행동에 이시우가 큭큭 거리며 웃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 행복해서.
그리고 이 꿈이 깨질까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고는 눈을 떴다.
“너는 정말 날 실망하게 하는구나.”
실망하는 이시우의 표정이 보였다.
“죄송해여…….”
놀이공원에서 있었던 따뜻한 대화는 없었다. 나는 그게 너무 슬펐다.
“이젠 지쳤다. 너를 키우는 것도 이젠 너무 힘들어.”
“파, 파파! 죄송해요! 수아가 진짜 착한 아이가 될게요!”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나를 실망 시키는 아이가 되었지. 미안하구나. 나는 너무 지쳤다.”
이시우가 그 말을 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짧아진 다리로 이시우를 향해 달려갔다. 제발, 제발 나를 버리지 마.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그냥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그거 하나면 되는데.
“어머, 귀여운 아이네.”
“귀여운 아이는 무슨……그것보다 자기야, 빨리 가자.”
“어머, 그렇게 우리 신혼집으로 가고 싶었어? 그럼 빨리 가야지. 나도 자기랑 하고 싶은 거 많거든~.”
이시우를 보며 야릇하게 웃는 임나연이 보였다.
더러운 손으로 내 파파에게 손대지 마. 파파는 내 거다. 너 따위가 손을 댈 게 아니다.
나는 힘껏 이시우를 향해 달려갔다. 그렇지만 이시우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따스하게 웃으며 임나연을 껴안았다.
그리고.
꿈이 깨진 거울처럼 바뀌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머리가 멍했다.
뭐지. 꿈인가. 꿈이라고 보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신이란 게 하늘 위를 날다가 지하로 처박힌 듯이 우울했다. 그러다가 이시우가 보였다.
파파.
내 아빠.
생각하기도 전에 이시우에게 달려들었다.
이시우가 당황해했지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다독여줬다. 마치 아빠처럼.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이시우는 회귀자니까. 그가 언제 회귀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진정시키는데 익숙한 걸 보니 꽤 나이를 먹었을 터.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이시우의 손을 만끽했다.
정말……정말로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시우가 나를 진정시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 그럼 이제 한동안 정신 공격은 위험한 거야?”
“그렇지, 뭐. 그러니까 나 좀 잘 지켜줘라.”
이시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찼다.
이시우가 한동안 정신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과 자신을 지켜달라는 말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