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부녀
* * *
우리는 빠르게 안쪽으로 향했다.
목표는 보스 몬스터였다. 원래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학생들의 움직임이 좀 심상치 않았다. 우리 조, 정확하게 윤채린을 노리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앞에 한 조.”
은수아가 조용히 말했다. 조만을 말한다면 특별히 눈에 띄는 애는 없다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검의 가면과 대해의 마나 가면을 썼다.
검이 복제된다. 한 자루에서 두 자로. 다섯 자루까지 늘린 다음 검에 뇌광을 입혔다. 보랏빛의 뇌광이 번뜩였다. 이렇게 되면 마나 소모가 심하지만, 단기간에 화력이 향상한다. 그리고 마나 소모는 대해의 마나가 커버해준다.
───.
옆에서 은수아가 입을 달싹거렸다. 삽시간에 여러 개의 보조 마법들이 어검에 걸렸다.
어검을 학생들에게 날렸다. 학생들이 갑자기 다가온 어검에 당황하더니 이내 싸우려다가 옆에서 윤채린의 공격과 은수아의 합공에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림자가 쭉 늘어지더니 제압당한 학생들을 삼켰다.
“몇 명 제압했지?”
“지금까지 85p 얻었어.”
은수아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사실 나도 속으로 어느 정도 세고 있었는데, 지식열람에 포인트가 뜨는 것을 본 뒤로 세는 것을 그만뒀다.
“음, 85p는 좀 불만족스러운데.”
윤채린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더 화끈하게 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85p면 꽤 안정권이다. 보스 괴물이 100p니까.
아마 대부분의 학생은 30p도 못 얻겠지만…….
“앞에 적, 윤승하야!”
은수아의 말에 재빠르게 검을 꺼냈다. 언제든지 뇌혼을 발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윤채린이 씩 하고 웃으며 소수마공을 준비했다. 윤채린의 하얀 손 주변에 냉기가 일었다.
“근데 윤승하가 도망치는 것 같은데?”
“윤승하가 도망이라고?”
윤채린이 의아해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윤승하가 누구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아마 우리를 보고 도주를 한 것 같은데.
“……앞에 조 3개가 뭉친 것 같은데?”
“누구누구 있는데.”
은수아의 말에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 김하린이랑 한종우. 다른 학생은 모르겠어. 그리고 아야네랑 강한남이랑 이지아랑 임나연.”
“……도망친다고 해도 안 들을 거지?”
나는 은수아의 말에 암담해졌다. 혹시나 해서 윤채린에게 물어봤다.
“당연한 말씀. 우리 시아, 슬슬 이 언니의 큰 뜻을 깨달아 가는구나. 튀긴 어딜 튀어. 싸워야지! 승리는 쟁취하는 거야!”
윤채린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포기하고 즉각 전투를 준비했다. 광익은 숨긴다. 광익은 너무 눈에 띄는 데다가 이런 좁은 장소에서 별다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으니까.
얼마 전에 얻은 그란데힐의 능력도 쓰지 않는다. 공간계 관련 능력은 너무 눈에 띈다.
망설임 없이 아홉 명의 학생에게 돌진하는 윤채린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며 따라갔다.
윤채린의 손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천마신결, 소수마공. 전과는 다른 기파가 찌르르울려 퍼졌다.
쟤는 또 언제 강해졌대.
***
‘어떻게 할까.’
윤승하는 멀리서 날뛰는 윤채린과 그녀를 보조하는 이시우와 은수아를 보았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잘 막아주고 있었다. 윤채린을 이지아와 임나연 한종우와 아야네까지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붙들어 매고 있었다. 김하린이 은수아를 노리고, 나머지가 이시우를 공략한다.
이시우를 공략한다고 해도 대부분이 방패를 들며 방어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대련을 통해 이시우와 정면승부를 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시간 끌기밖에 되지 않지만, 근처의 학생들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막고 있으니, 대충 끼어들어서 공격하라고. 아까 애들끼리 말을 맞췄다. 윤승하는 생각해볼게라고 답했다.
여기에 자신이 나선다면 이시우 조의 패색이 짙어지겠지만.
‘그러면 시우한테 미움받잖아. 그건 싫어.’
하지만 이시우 조에 붙는 것도 조금 껄끄러웠다. 윤채린 저건 같은 조만 팀으로 바라본다. 아마 저 상태에서 내가 도와줘도 머지않아 자기를 습격해서 점수를 탈환할 것이다.
17년간 붙어있기에 잘 알고 있다. 저건 도와줘도 자신을 습격할 것이다.
윤승하는 풍룡이 위에 앉아 있다가 계산을 끝마쳤다. 윤채린이 리타이어되고 이시우가 위험하면 도와주자.
그 때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15명 즈음 되는 학생들이 몰려서 오는 것을 확인했다. 조는 5개의 조. 한종우와 자주 어울리던 한종우의 패거리들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시우도 그걸 깨달았는지, 잠깐 눈을 굴리더니 한번 검을 크게 휘둘러 애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 윤채린과 은수아를 잠깐 바라보다가 은수아 쪽으로 향하더니 은수아의 손을 낚아채고, 벽을 향해 공격했다.
그러나, 저 벽은 미로 탑의 벽이다. 윤승하도 이곳에 오자마자 벽을 부술 수 있나를 확인했지만, 벽을 부수는 행위는 윤승하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부수고자 할 수는 있지만, 들이는 대가가 너무 큰 것이었─.
“어라?”
하지만 벽은 이시우의 작은 공격에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그리고 은수아와 함께 안쪽으로 도망치자, 벽이 스스스하고 복구되었다. 이시우를 쫓던 4명과 김하린이 벙찌듯이 바라보다가 벽을 공격했다.
방패로 치고, 빛나는 깃털이 벽을 때렸지만, 그들의 공격에도 벽은 고고하게 있었다.
“……무슨 방법이지?”
윤승하는 멍하니 그것을 보면서 수법을 떠올려보았다. 주술도 아니고, 무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능력이었다.
역시 내 남자였다.
***
……윤채린이 장렬하게 희생하여 겨우 제압당하지 않은 나와 은수아는 미궁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괜찮아?”
“어. 어차피 보스는 100p고 애들도 여기에 몰리느라 괴물을 많이 못 잡았을 테니까.”
거기다가 우리가 괴물을 잡는 속도가 워낙 빨랐어야 말이지.
다른 조는 이렇게까지 잡지 못한다. 그건 확신한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괴물이 많은 곳에 배정이 된다. 아이템과 버프를 받을 수 있는 문약은 멀리에 떨어져 있고. 그래서 성장이 더뎌진다.
그런데 우리 조는 그 괴물들을 그냥 짓밟고 올 전력이라서.
“…아니, 그게 아니라. 윤채린을 버리고 와도 괜찮냐고.”
“……뭐, 윤채린은 그런대서 의외로 쿨하니까. 어차피 윤채린이 멋대로 덤빈 거에 우리는 휘말린 거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피해자였다.
“그래도 윤채린이 날뛴 덕에 포인트는 꽤 벌었으니, 우리 조는 아마 못해도 3등 안에는 들 거야.”
은수아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를 노린다고 해도 다른 조 애들이 윤채린을 잡아서 약해진 우리 조를 가만히 둘 것 같지는 않고. 외각에서 괴물 사냥을 하면서 천천히 포인트나 벌자.”
“좋은 생각이야. 이번에는 노리는 상품이 없나 보지?”
나는 이번에 주는 상품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무기 종류를 준다. 당연하게도 평소 실습보다 빡센 만큼 좋은 것을 주지만…….
‘요정족의 보물고 3등급에서 결정되지.’
3등까지는 거기서 거기라 굳이 애써서 3등에 들 필요는 없다.
만약 1등이나 2등이 내 무기와 겹치면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좋은 무기들이 꽤 있어서 괜찮았다.
한 달 뒤에 공허족의 왕이 와서 눈여겨보는 인물들에게 따로 하사하는 중간고사가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응. 없어.”
“그런데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아, 벽?”
별거 없었다. 그냥 미로 탑에 있는 트릭 중 하나였으니까.
"다 방법이 있지."
흔히 쓸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내부에 마나를 주입해서 반발하듯이 터트리는 방법이니까. 마나를 조금만 다룰 줄 알아도 통용되지 않지만, 물건을 부수는데 꽤 유용한 방법이었다. 골렘이나 골렘류 몬스터에게 통한다면 모를까, 저들에게도 쓸 수 없는 방법이다.
거기다가 필요로 하는 기교 수치가 높아서 아마 제대로 쓸라면 상격 정도의 마나 제어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상격쯤 되면 의지만으로 물건을 부수는 경지가 되어 이런 걸 굳이 쓰지도 않는다.
"그런거구나."
은수아에게 방법을 가르쳐주다가 익숙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근처에 아이템이 있었는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벽 구석으로 향했다.
“오, 찾았다.”
벽 구석에 나무로 된 상자가 있었다. 나는 그대로 나무상자에.
콰득!
해머로 내려찍었다.
“끼에에엑!”
나무상자, 아니 나무상자로 위장한 미믹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검은색의 연기로 변하더니 아이템 하나를 내뱉었다.
미믹은 처음에 건들이면 괴성을 지르면서 특유의 날카로운 이빨로 손을 물려고 한다. 아카데미에 있는 학생에게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미믹이 선공을 가한다면 안에 있는 아이템을 매체로 자폭 공격을 감행해서 꽤 악질적이다.
그래서 미로 탑을 처음 시작하는 뉴비들은 나무 상자는 폭파하는 거구나, 생각해서 피해 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진짜 개망겜이라니까.’
미믹이 뱉어낸 아이템은 검은색의 구슬 같은 것이었다. 럭키. 이게 나올 줄이야.
「은신의 구슬」이라는 물건이다. 이걸 들고 있으면 은신이 보다 쉬워지며 괴물들에게 잘 들키지 않는다.
게임에서는 은신이 가능해지고 치명타와 선공을 취하는 등의 이점이 있어서 이 구슬을 얻으면 점수를 꽤 쏠쏠하게 벌 수 있었다.
나는 구슬을 은수아에게 넘겼다.
“은신의 구슬이라는 물건이야. 이 구슬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은신의 가호가 발동돼. 이걸로 은신하고 괴물들을 잡고 다니자. 남은 시간은 4시간 정도니까, 꽤 여유 있겠네.”
시계를 보면서 확인했다.
“그럼 움직여볼까?”
“괴물들을 모두 흑염으로 태워…괴물들을 모두 쓸어버리면 되는 거지?”
은수아가 화끈하게 말하려다가 멈칫하고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진짜 어색하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체험이 끝난 뒤.
아이들이 여기저기 조로 나뉘어서 모여 앉고 있었다. 교수들이 봐준다고는 하나, 실전이었기에 여기저기에 다친 학생들이 많았다. 다친 부위를 포션을 바르며 인상을 찌푸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윤채린이 가장 멀쩡한 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배신자들. 이 언니를 버리고 가니까 좋냐?”
“꽤 멀쩡했잖아. 애들한테 들으니까 진짜 살벌하게 날뛰었다더니만.”
다름이 아니라 우리 조의 점수가 높아진 게 윤채린의 덕분이었다. 혼자서 15명에 가까운 학생들과 동귀어진해서 30p를 벌었다.
단순 계산으로 15명의 학생을 데리고 간 거다.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민트 초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리가 두통이 난 것처럼 지끈거렸다.
마력을 생각보다 많이 쓴 탓이었다. 가면도 많이 장착해서 정신력도 떨어졌고. 유아독존으로 회복할 수 있지만, 유아독존은 어지간하면 아끼는 게 좋았다.
‘얼마나 착정당할지 모르는데, 지금 좀 머리 아픈 게 낫지.’
아니면 이걸 핑계로 하루쯤은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끄응.”
은수아가 옆에서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얘도 마나를 꽤 썼지.
“하나 줄까? 머리 아픈 데에 좋은데.”
“민초 우유가…?”
은수아가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트 초코 우유 받았다. 은수아가 눈을 질끈 감고 한 모금 홀짝이는 것을 보다가 깨달았다. 은수아가 민트 초코는 엄청 싫어하는 것이었는데.
“괘, 괘괜찮네.”
몸을 찌르르 떨며 말했다.
이거 좀 미안한 짓을 한 것 같네.
“아, 미안. 민트 초코 싫어했지?”
“…….”
은수아가 불만스러운 듯 볼을 부풀렸다. 알고 그랬지?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미안 미안.”
너털웃음을 짓고는 은수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은수아가 잠깐 당황하는 표정을 짓다가 홍조를 띠고 내 손에 머리를 맡겼다.
은수아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잃고, 고모에게 맡겨져 상아탑의 후계자로서 살아왔던 삶.
은수아가 중2병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남이 나에게 관심을 줬으면 싶어서. 상아탑의 후계자가 아닌, 은수아로서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애니를 보다가 이상하게 어긋났지만.
사고치는 애들보다 이런 어긋남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뭐야, 둘이 부녀야? 왜 이리 친근해.”
윤채린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부녀? 갑자기?
“나랑 수아가?”
“완전 부녀인데. 그렇지, 시우 아빠?”
“뭐야, 채린 엄마. 왜 빈손으로 왔어. 내가 오면서 분유 좀 사 오라고 했잖아.”
“하, 결혼 전에는 나만 바라보던 시우가 이상하게 변했어. 수아야 이제 엄마는 수아뿐이란다.”
윤채린이 훌쩍이는 흉내를 내며 은수아를 껴안았다. 평소라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을 은수아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파파.
은수아가 조용히 그 말을 중얼거렸다.
나를 바라보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