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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105화 (105/298)

〈 105화 〉 나찰의 마녀

* * *

……적막이 내려앉은 복도 앞.

은수아는 머리를 매만지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금색 빛의 눈과 색이 바랜 은발이 보였다.

칠색의 부작용이었다.

칠색은 공간조차 뒤흔들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품고 있다. 그러나 강한 능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이 있는 법. 그 부작용 탓에 은수아는 다른 이들보다 ‘시야’가 떨어지고 머리카락 색은 그 여파로 색이 바랬다. 상아탑에 온갖 마법과 지식으로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였기에 고작 이 정도였지만.

옛날에는 이 머리카락 색이 좋았다.

마치 잡초와 같은 거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머리카락이 불만족스러웠다. 옛날 찰랑이던 은발이 이뻤는데.

은수아는 거울로 머리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건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는 단정한 옷차림을 골랐다.

검은색의 스타킹에 단화를 신고, 하늘색의 블라우스 위에 넥타이와 하얀색의 재킷을 걸쳤다. 그 아래에는 새까만 치마를 입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그것이 설사 영감­상아탑의 탑주­랑 은수아의 고모가 옷차림 좀 단정하게 하라고 잔소리해도 반항의 의미로 조금 헤퍼 보였던 옷차림을 했었는데.

­이시우 님이 이번에 엄청 고생하셨습니다.

­시우가요?

­네. 사실 지금 이시우 님의 상황이 꽤 심각하지만, 저것도 운에 좋은 축에 속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은수아 님이 쓰러졌을 때, 눈이 뒤집혀서 온갖 도핑으로 혈마를 공격했었거든요.

그란데힐이 나지막하게 말한 것이 떠올랐다.

은수아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선물로 가져온 바구니를 확인하였다.

이시우가 이전에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상아탑은 칼을 빼 들었다.

색깔에 칭호를 얻은 장로들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들을 숙청하였다.

그들을 숙청하고, 장로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은수아의 지분이 상당했기에 은수아는 꽤 많은 것을 고를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구비해두었던 회복약을 꺼냈다. 포션 병 안에서 금빛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풀 힐링 포션.

매년 상아탑에서 만드는 희귀한 물약이었다.

상아탑에서조차도 한 해에 고작 10개 남짓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영감의 허락을 받느라 조금 늦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은수아는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조용하게 문을 노크했다.

똑똑.

문을 두들겼지만 은수아는 기대하지 않았다.

지난 3일 동안 이시우는 거의 혼수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루 중 꼬박 20시간 이상을 잠으로 세웠다. 일어나 있는 이시우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았다. 항상 창백한 안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포션만 있으면 문제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은수아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자, 잠깐만요!”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기실 생각입니까!? 제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려왔는지, 시우 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순간 은수아는 자신이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시우는 왜 멀쩡한가. 그란데힐은 평소와 같은 단정한 메이드 복이 아니라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이시우를 붙잡고 있는가.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란데힐과 이시우가 친하게 지내있는 모습이 불쾌했다.

“뭐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은수아는 일단 그란데힐을 떼어 놓았다. 염동력과 칠색을 섞었다. ‘부동’의 힘을 가진 남색 빛이 섞인 염동력이 이시우를 그란데힐에게서 떼어내어 자신 쪽으로 당겼다.

“고맙다.”

이시우가 옷매무새를 만지며 은수아에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어? 어, 으응.”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무심한 듯이 자신을 보고 고맙다고 말하는 이시우.

그런데 그 느낌이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게 이상하게 부끄러워서 은수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뭐지.

은수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가면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항상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포근포근한 감정이 느껴졌다.

‘가면의 효과인가.’

생각보다 골치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

칠색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무지개의 색을 따서 각각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서 어울리는 개념끼리 조화를 이루고 극에 이른 개념들을 반발시킨다.

그렇게 엮어진 칠색은 중격인 은수아가 일순간 ‘출력’ 하나만을 따지면 상격조차도 경시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뀐다.

칠색은 그대로 휘두르면 몸에 부화를 주지만, 저번 혈마와 싸울 때 은수아처럼 칠색을 두른다면 그 부담은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칠색에 대해서 떠올리다가 은수아의 옷차림이 다른 것을 확인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단정한 차림이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이길래 시우를 쥐잡듯이 괴롭히려고 해요. 얘는 아직도 환자인데.”

“……죄송합니다. 제가 이성을 잠깐 잃었습니다. 못 보일 모습을 보였군요.”

그란데힐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은수아가 그란데힐의 말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이길래, 그란데힐이 이성을 잃었을까.

“그런데 시우는 몸이 멀쩡하네.”

은수아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자염뇌제라는 별명이나 웨폰 마스터 등으로 불리니까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했다.

“어, 특성 때문이거든.”

“삼라만상?”

삼라만상은 회귀자의 동료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현재 대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능력 중 하나였다. 정신력을 대가로 남의 능력을 가지는 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숨긴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말하기는 좀 힘들었다. 친밀도라는 능력으로 남의 능력을 뱃기는 가면의 힘.

가면은 솔직히 말해서 너무 사기였다. 고작 S급 정도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통 이 정도면 페널티가 강해야 하는데 페널티도 생각보다 견딜 만 했고.

‘아니, 그건 아닌가.’

나는 기린의 가면에 적힌 페널티를 떠올렸다. 자아가 매몰될 수 있다는 말. 잘 못 사용한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 있는 페널티였다.

“그런데 재생 쪽 능력은 그렇게 좋은 능력이 아닌데.”

은수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은수아의 말대로 재생 관련 능력은 생각보다 좋지 않다.

전투에서 상처가 빠르게 낫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급부로 체력을 급격하게 소모한다.

“재생과 관련된 능력이 아닙니다. 이시우 님이 가진 능력은…….”

“시간 쪽과 관련된 능력 맞아. 육체에 한정된 능력이지만.”

그란데힐이 말하려는 걸 가로챘다. 언젠간 밝혀야 하는 능력이었으니까.

“그럼 지금도 회복시킨 거야? 대가는? 시간 관련 쪽은 대가가 심하잖아?”

유아독존에 대가 같은 건 없다. 굳이 찾자면 부하를 주면 줄수록 오랫동안 못 쓰는 정도였다.

‘유아독존이 진화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긴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먼일이다.

어쨌든 은수아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

시간 쪽 능력은 교환 비율이 좀 이상했다. 심하면 수명 10년을 깎고 컨디션이 조금 좋아지는 정도에 그치는 일도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부담하는 건 거의 없으니까.”

“음, 시우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은수아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무리하지 말고 좀 쉬어. 시우는 그래도 환자니까.”

은수아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썼다. 그란데힐이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나는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조금 있다, 2시간만 이렇게 숨을 죽이고 있다가 훈련이나 하러 가야지.

그란데힐을 밖으로 끌고 가는 은수아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눈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어째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란데힐이 보였다.

나를 여장시키겠다는 집념이 대단했다.

분명 두 시간이나 지나서 훈련하러 슬쩍 훈련실로 향하다가 그란데힐에게 걸렸다.

‘왜 이런 쓸데없는 것에 두 시간씩이나 대기를…….’

도저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란데힐은 나한테 여장을 시키는 데에 진심인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어차피 한번은 했었어야 했으니까.

“우선 이걸 입어주시면 됩니다.”

그란데힐 손에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교복인 하늘색 셔츠에 하얀색 재킷하고 푸른색 넥타이. 여기까지는 그냥 교복과 같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치마에 스타킹을 신은 것.

그리고.

“이 유물의 효과가 생각보다 좋군요.”

나는 멍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185cm의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던 키가 작아졌다. 원래 키에서 170cm 정도로. 얼굴은 좀 더 갸름하게 바뀌었다.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명한 근육질의 몸에서 좀 더 가냘프게 바뀌었다.

임나연의 전문 트레이너인 최유나의 도움 덕에 근육은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보기 좋았던 근육들이 여리여리하게 바뀌었다.

내 근육들이…….

“……이거 돌아오는 거 맞죠?”

“네. 이시우 님은 모르시겠지만, ‘변화의 탑’에서 얻은 신체 변용 유물입니다. 티타니아 님께서도 이따금 밖으로 유희를 나가실 때 이용하는 유물입니다.”

“…….”

그러니까 여왕의 유물을 몰래 가져왔다는 건가. 내 여장 하나 때문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란데힐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왕님은 한동안 드라마에 빠져 있으니까요. 140부작이니 아직 한참은 시간이 있습니다.”

요정족의 미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V자를 그리시고 얼굴에 붙여줄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는 좀…….”

“……어쩔 수 없군요, 이번에 제대로 협조를 해주시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그란데힐이 한숨을 쉬면서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허공에 파문이 일어나며 푸른빛의 검신이 드러난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역시 안목이 좋으시군요. 뇌 속성 무기를 가진 벼락검이라고 합니다.

[벼락검]

땅의 요정과 벼락의 정령이 벼락으로 벼린 검이다.

­주문 : 라이트닝 볼텍스

­번개 속성 지배력 상승.

지식 열람으로 확인했다. 적어도 중반부까지 무난하게 쓸 수 있는 검이었다. 기린의 던전에서 김하린에게 줬던 번갯불보다는 조금 안 좋은 물건이다.

……즉, 거절하기에는 너무 좋은 물건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나는 손으로 v를 그리고 볼에 붙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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