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변화
* * *
“우선 김하린을 잡으러 가자. 시우, 김하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은수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김하린의 행동반경은 의외로 좁다.
“아마 김호동이 있는 만화 부실이나 김하린의 개인 부실이 아닐까.”
“좋은 추리야, 시우.”
은수아가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부터 갈 거야?”
“만화 부실. 김호동이라는 애도 한번 볼 겸.”
나는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 일 텐데 만화 부실로 향하는 걸음이 굉장히 익숙했다. 마치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뭐 은수아니까.
“도착했군.”
은수아가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김호동이 헤드셋을 끼고 컴퓨터 앞에서 뭔가 보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애니 캐릭터가 움직이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인가.
“아닛, 저건! 이번 분기에 최고의 화제작인 아카데미의……!”
“수아야, 우리 그거 말고 김하린에 대한 거 물어보려고 왔잖아.”
“……맞다.”
은수아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그리고 품속에서 담배 모양의 초콜릿을 입에 물고 다시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김호동. 우리는 김하린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왔어. 김하린이 최근 수상한 짓을 하려는 정황 같은 것을 보았나?”
김호동이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김하린은 요즘에 오히려 얌전히 지내는 편이었다.
아카데미에서 한 짓이라고는 처음에 자기를 괴롭혔던 애들을 지독하게 괴롭힌 것 정도?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이곳에 왔으니까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은수아가 김호동을 노려보며 말했다. 행동거지도 말하는 투도 전혀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그녀가 가진 영향력은 위협적이어서 김호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 진짜야! 오히려 김하린은 요즘 엄청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고. 중학교 때 만나는 불량한 애들도 잘 안 만나고 다니고.”
“흠.”
은수아가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김호동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 같네. 시우야, 그럼 다음으로 가자.”
“그래. 근데 고작 이걸로 끝이야?”
“후, 시우는 이런 데에 약하구나. 넌 잘 모르겠지만, 눈은 정말 많은 것을 말해줘. 특수한 훈련을 받지 않으면 대부분 눈만 봐도 알 수 있지. 김호동은 어렸을 적부터 해킹 능력에 대부분을 할애해서 그런 훈련은 받기 힘들어.”
“그래? 너는 그런 훈련을 받았고?”
“……오늘은 날씨가 좋네.”
“…….”
“애초에 애니를 좋아하는 애 중에 나쁜 놈은 없다고.”
뭔 개소리야.
은수아가 김호동의 부실을 나갔다.
나도 따라서 복도를 나오다가 복도 앞에서 이지아가 보였다.
은수아가 이지아를 경계 어린 눈으로 보았다. 아무래도 윤승하가 이지아도 말한 것 같은데. 그러자 이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어봤다.
“수아야, 혹시 내가 잘못한 짓 있어?”
"혹시 너 시우에게 최면 어플 썼어?"
순간 이지아가 흠칫했다. 그러자 은수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설마 네가 아카데미의 흑막?”
“무슨 소리야!”
“그럼 조금 전에 왜 흠칫한 건데.“
“아니, 네가 화내면서 왔으니까.”
“수아의 화낸 얼굴이 좀 무섭기는 해.”
킥킥거리며 말하자 은수아가 불만족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문득 김은정이 말해줬던 내 특성의 페널티가 떠올랐다. 사람의 욕구를 자극하는 특성. 은수아는 그런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게 아닐까?
“너, 너도 나연이처럼 시우를 성희롱한 건 아니겠지?”
“서, 성희롱?!”
이지아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눈동자가 나에게 향했다.
나는 재빨리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전에 나연이가 나한테 성희롱을 했다고 했거든."
“나연이가 자기 입으로 성희롱했다고 했어?”
은수아가 말하자 이지아가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근데 의외로 이지아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특성을 이용해서 감정을 살폈는데 이외의 감정이 떠올랐다.
안도감.
그리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구나.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수아야, 애들이 너무 많이 모이는데. 김하린한테 슬슬 가야 되지 않을까.”
“맞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아직 남아 있었지. 가자 왓슨.”
이젠 내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건가.
나는 은수아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응우옌과 마주쳤다. 지식 열람으로 힐끔 상태창을 살펴보니 고유 특성이 강화되어 있었다.
`결국 넘어간 건가.`
나는 슬쩍 은수아를 살폈다. 은수아가 그냥 넘어가려 하길래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응우옌 있잖아."
"응우옌? 아, 저 쌀국수처럼 하얀 치아를 가진 태국에서 온 유학생 말이군. 그런데 어떻게 사람 이름이 응우옌일 수가 있지."
"내 생각에는 쟤가 좀 수상한데."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실망이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외관으로 판별하면 안 되지."
"......."
아니, 쟤가 진짜 흑막이라고.
은수아는 빠르게 부실로 향했다.
김하린은 부실 안에 있었다. 아카데미의 교복을 개조하여 소매 없는 와이셔츠에 타이트한 미니스커트. 어깨 위에 아카데미 재킷을 걸치고 우리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데 말도 없이 여기에 온 거야. 흔히 보이는 조합은 아니네."
담담하게 김하린이 말하자 은수아가 나섰다.
"아카데미에 숨어든 흑막을 찾고 있었지. 김하린. 그동안 잘 숨겨왔지만, 이제 들켰어. 네가 이 아카데미에서 마인에게 협력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흑막이야."
"흑막? 내가 흑막이라고?"
"최면 어플로 이시우를 조종해서 아카데미의 전복을 꾀하는 음모를 가진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뭔 헛소리야. 아니, 시우를 조종한다고 쳐도 요정 여왕님이 멀쩡히 있고, 요정족이 멀쩡히 있는데. 나나 이시우가 힘을 합쳐서 수작을 부린다고 쳐도 그게 가능해?”
“세, 세계수에 수, 수작을 부린다던가.”
“그 세계수는 요정 여왕님이 꼼꼼히 관리하고 있는데. 애초에 그거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해?”
내가 알고 있기는 했다.
어쨌든 김하린에게 말을 밀린 은수아가 눈을 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들었던 용의자들이 전부 아니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김하린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럼 나한테 이제 용무가 없는 거지?"
"그, 렇지?"
나한테 의문문으로 말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우리는 가볼게.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안했어."
"괜찮아. 시우는 언제든지 와도 돼."
손을 흔들며 우리는 부실을 떠났다.
솔직하게 말해서 속이 아팠다. 이지아가 임나연이 최면 어플을 나한테 사용한 걸 알았다. 김하린이 이지아에게 강제로 당했을 시점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상황이 꽤 암담하기는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
김하린은 밖으로 나가는 은수아와 이시우를 보며 살짝 의아해했다.
‘이상한데.’
은수아의 행동이 이상했다. 독불장군 같은 윤채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은수아도 그런 면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말 몇 마디에 물러나지 않았으리라.
아마도 원인은 이시우.
이시우한테 어리게 보이고 싶어 하는 걸까. 이시우에게 고집 세다는 인상을 주기 싫은 걸까. 뭐가 되었든, 은수아는 이시우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확실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은수아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혼자 다닌다지만 어지간한 아이들은 그녀에게 덤비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배경 하나만을 따지자면 임나연도 한 수 접어줘야 할지 모른다. 그녀는 모든 마법사의 주인, 상아탑의 후계자이니까.
김하린은 고민했다. 임나연과 은수아. 누구에게 붙을까.
똑똑.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안색이 창백한 여학생이 보였다.
“뭐야.”
“하, 하린이 네가 구해달라는 거 구해왔어.”
“그래? 두고 가.”
김하린이 무표정하게 말하자 여학생이 책상 위에 그것을 두고 갔다. 김하린은 여학생이 나가자 봉지를 슬쩍 열었다.
“흐음.”
김하린이 봉지 안에서 잡지를 꺼냈다.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남자에게 사랑받기 쉬운 법.
김하린은 잠깐 주변을 본 다음 책을 살폈다.
“요즘 남자에게 인기 있는 단어. 허접? 왜 이런 게 인기 있는 건데.”
김하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책을 쭉 읽었다.
***
나는 내 부실로 들어와서 한창 물약을 만들고 있었다.
샤오메이에게 제시간에 물약을 납품하기 위해서 열심히 물약을 만들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 지식 열람은 이 세계에 아직 퍼지지 않는 정보들조차 담고 있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모르지만, S급 이상의 가치를 하고 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파의 약초로 지파의 물약 말고 다른 거로 만들 수 있나 살펴봤다.
‘역시 없네.’
지파의 약초는 양이 은근히 많아서 많은 고인 물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실험을 해봤기에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다가 문득 한 쪽에 놔둔 빙정이랑 월광의 단, 빙정을 얻으며 얻은 귀걸이가 보였다. 저것도 다 넘겨야 하는데. 빙정은 임나연의 것이고 빙정을 얻으면서 같이 얻은 빙설의 귀걸이라 불리는 물건이다.
얼음 마법 제어력을 올려주지만 이건 부가적인 효과다. 마나 친화력과 감응력을 올려주기에 초반에 얻을 수 있는 보물 중에서 1티어에 속한다.
대부분 이지아가 쓰거나 윤승하가 쓰는 편이지만 나는 이지아에게 주는 것을 선호한다.
‘애초에 윤승하는 정령검이 있으니까.’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아공간에 귀걸이와 단을 넣고, 슬리퍼를 신으며 밖으로 나섰다. 시계를 힐끔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식당으로 향하니 평소와는 다른 한산한 공간이 보였다. 느긋하게 하품을 하면서 걷다가 저 멀리서 이지아가 보였다.
“어, 시우야. 밥 먹으러 가?”
“응. 지아, 너도?”
“어. 원래 나연이랑 먹으려고 했는데, 나연이가 집에 행사가 있어서 집에 가버려서.”
나는 이지아를 살폈다. 마법 훈련을 한 모양인지 저번에 티타니아에게 받았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니 학생도 없었다.
“지아야.”
“응? 왜?”
나지막이 이지아의 이름을 불렀다.
이지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뭔가 가슴을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단순하게 선물을 주는 건데.
문득 내가 이 세계에 정말 많은 정을 갖게 된 것을 깨달았다. 게임이라고 냉정하게 보려고 했던 시각이 어느새 주변 인물들에게 정을 너무 줘버렸다.
“왜 시우야?”
이지아가 나를 재촉했다.
“선물이야. 오다가 주웠어. 그냥 귀에 대면 저절로 끼워질 거야.”
하늘색으로 발광하는 귀걸이를 꺼냈다. 이지아가 멍하니 나를 보다가 활짝 웃었다. 입을 달싹거리다가, 멈칫하고는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가 귀에 살짝 걸었다.
“어때? 잘 어울려?”
이지아가 눈웃음치며 상체를 살짝 숙이며 물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