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서바이벌(2)
* * *
“따돌린 건가.”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윤채린의 기척이 보이지는 않는다. 아카데미 시절에서 그녀는 ‘천마’라는 자존심이 강하여 은신이나 자신을 가리는 행동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설사 자신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안심하면서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윤채린이 덤비자, 비염을 즉각 소환하며 반격하며 도망쳤다. 보라색의 불꽃이 흩날리며 자신을 공격하는 모습에 재밌다며 웃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행히도 지나가던 한종우 일행이 보여서 나는 재빠르게 윤채린을 그들에게 토스하고 그사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지.
“새끼들아 길 막지 마!”
“네놈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행패를 부렸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윤채린이 눈이 돌아가 버린 것이 컸다. 한종우 일행도 8명가량 있었으니 시간은 많이 벌어줄 거다.
[저거 진짜 살벌하네. 뭐 저런 괴물 같은 여자가 다 있어? 계약자, 우리는 저거랑 싸우지 말자]
비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진짜 말도 안 되게 강해졌는데, 윤채린을 보면 아직도 괴물 같아 보였다. 천마의 경험이나 천마신결 때문에 게임에서도 실제로 보이는 능력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기도 했었다.
능력치나 레벨이 비슷함에도 항상 우위를 점했으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큰 벽은 아니네.’
예전에는 그냥 답이 없을 정도로 막막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비빌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폭주’를 안 했을 때 말이다.
콰앙!
반대편에서 격렬한 소리가 들렸다. 형형색색의 공격들이 쏘아지다가, 흑색의 불꽃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그것들과 격렬하게 맞섰다.
윤승하와 은수아가 싸우는 건가. 저기도 진짜 살벌하네.
꽤 거리가 멀리 있음에도 마력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무가 울창한 숲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20m가량 되는 지형이 바뀌어있었다.
[계약자, 저기도 가지 말자. 그런데 여기 학교 맞아? 무슨 괴물들이 길을 갈때마다 숨 쉬고 있어?]
동의한다.
하지만 저 정도는 해줘야 10년 안에 마왕하고 싸울 전력이 된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훑었다. 몸을 숨길 곳을 찾기 위해서이다.
서바이벌이니 굳이 벌써 힘을 뺄 필요는 없지. 대충 1시간 정도 흘렀으니 2시간 정도 지나면 사냥을 해볼까.
그러다가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확인했다. 자세를 낮추고 단검과 투창용 창을 꺼냈다.
탁한 금발의 소년, 정한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순간 표정이 반가워하더니 이내 굳었다.
“혹시 나 공격할 거야?”
굳이 공격할 필요도 없지만, 공격을 안 할 필요도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한서면 굳이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나름 정이 쌓였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한서를 잡으려면 시간 소모나 소음이 크게 발생하겠지.
정한서가 앞으로 세 발자국만 오면 바로 잡을 수 있겠지만, 나를 경계해서인지 선을 지키며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동맹 맺지 않을래. 나뿐만 아니라 2~3명 포섭해놨어.”
벌써 동맹을 맺고 다니는 건가.
“아냐, 난 괜찮아. 아무래도 윤채린이 나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
“……어쩌다가?”
정한서가 잠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기분 나쁘네.
“그럼 난 갈게. 어지간하면 방과 후에 만나고 싶네.”
“그래. 가라.”
정한서를 보내고 나는 조용히 주변을 탐색했다. 원작에서는 보통 어지간하면 윤승하나 윤채린 둘 중 하나가 서바이벌에 우승한다.
그러나 이따금 안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한종우의 파벌과 한창 싸우다가 힘을 소진하고 은수아를 맞닥트렸을 때.
혹은 여포 메타를 하다가 온갖 학생들에게 다굴을 맞았을 때.
하지만 여기에는 윤승하와 윤채린이 같이 있다. 윤승하의 경우에는 원작보다 파워 업을 해서 어떻게 될지 감이 잘 안 잡힌다.
그리 생각하면서 체력과 마력을 비축했다. 한 시간쯤 지나고 슬금슬금 이동하고 있을 때, 한 명이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옆 반에 있는 학생이었는데 이름은 모르겠네. 지식 열람을 이용하여 장단점을 훑었다. 특성이 감각 쪽에 있어서 기습에 대비하기 용이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활과 화살 3개를 꺼냈다.
“비염.”
조용히 중얼거리자 비염이 내 사념을 읽고 세 개의 화살촉 끝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천수를 끌어올려서 세심하게 조준하였다. 그리고.
쐑!
바람을 가르며 화살 세 개가 남학생 A에게 쏘아졌다.
“누구냐!”
감각 쪽 특성답게 화살 2발을 빠르게 검을 휘둘러 막았다. 그러나 다리 한쪽으로 향한 화살은 막지 못했다.
챙! 배리어가 자동으로 발동되면서 화살을 막았다. 그리고 즉각 가면을 썼다. 가면은 어검.
아공간에서 꺼낸 검이 내 의지에 따라 분열하였다. 검의 분신이 바로 남학생 A에게 쏘아지듯 날아갔다.
“켁!”
이번에도 공격이 막혔다. 나는 재빠르게 뛰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남학생 A는 내 검을 두, 세 번 막았지만, 그게 한계였다. 검이 바깥으로 휘며 검을 놓친 게 결정적이었다.
“항복.”
남학생 A가 힘없이 손을 들며 항복을 외쳤다. 항복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그림자가 쭉 늘어지더니 남학생 A를 감싸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남학생 A는 이제 교수들이 근처에 있는 곳으로 소환될 거다.
“쉽네. 계속 이렇게만 가면 좋을 텐데.”
***
“살벌하네.”
김하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수아와 윤승하가 싸우는 장면을 보았다.
색색의 불꽃과 번개가 쏟아진다. 그에 맞서는 온갖 속성의 정령 공격과 윤승하의 특기인 중력 마법이 격돌했다. 보랏빛의 사슬이 차르륵소리를 내며 은수아를 압박했다.
은수아는 크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화력과 공격자 수. 정령사는 저런 점이 사기였다. 마나를 공급하기만 해도 정령들이 자율적으로 공격하는 것.
은수아는 점점 윤승하에게 밀렸다. 그리고 윤승하가 보랏빛의 사슬을 휘두르자.
쩌저적─!
공간째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아의 손에 칠색 찬란한 검이 쥐어졌다. 칠색. 멀리 떨어져 있건만 살벌할 정도로 강한 힘을 내포한 검이 은수아의 공격을 모조리 격했다.
“뭔 저딴 사기 특성이…….”
김하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김하린의 광익이 그녀보다 딱히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저 파괴력 하나는 탐이 났다. 자신보다 격 하나는 위에 있을법한 압도적인 공격력.
저 공격력은 그 윤채린마저도 고전하지 않았던가.
김하린은 은수아와 윤승하의 싸움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한 여학생이 보였다. 나름 공들여서 꾸민 티가 났다. 영국에서 왔다는 여학생이었다. 서양인 특유의 몸매와 이목구비로 A반에서 인기 있는 여학생이다.
그리고 이따금 이시우를 바라보며 끼를 부리는 여학생이기도 했다. 김하린은 입술을 비죽이며 광익의 깃털 세 개를 뽑았다.
그리고 깃털의 보조 마법을 걸었다. 속도 강화. 정밀성 강화. 낙하 속도 강화. 속성 강화. 한 호흡도 안 걸리는 시간. 김하린은 그것을 가볍게 던졌다.
광익의 깃털이 떨어지자마자 가속한다. 1초도 안 걸리는 시간에 깃털이 총알의 속도에 근접하였다.
콰쾅!
여학생을 향한 공격은 폭격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녀의 주변 3m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초토화 되어 있었다.
배리어는 한순간에 깨져나갔고, 근처에서 요정족이 걸어줬는지 빛의 장막이 여학생 앞에 걸려 희미하게 걸려져 있었다.
길쭉한 귀가 인상적인 요정족 여성이 여학생을 품에 안으며 자신을 노려봤다. 공격이 너무 과하다는 눈빛이었다. 김하린은 슬쩍 웃으며 죄송하다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김하린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광익으로 조금씩 이동하면서.
빛을 굴절시켜 모습을 가리고 있기에 빠르게 이동하지는 못하지만, 은신의 장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모인 집단이 보였다. 수는 대충 5명. 얼굴을 보니 옆 반의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시우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감히……감히 내 시우를 건드려?
깃털이 흩날린다. 거기에 보조 마법을 걸었다. 파괴력 강화. 속성 강화. 속도 강화. 속도 강화. 속도 강화.
그리고 빛줄기 수십 개가 아래로 추락했다.
**
깜짝이야.
순간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길래 당황했다. 김하린에게 나름 잘 해준 것 같은 게, 나를 공격하는 줄 알고.
그런데 빛의 폭격이 내 앞 50m 앞에서 쏟아졌다. 자세히 보니 빛의 장막 같은 것이 빛의 폭격을 막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학생들이 모여있었는데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확실히 눈앞에서 저런 것을 보면 무섭기는 하지. 귀가 기다란 요정족이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하늘을 훑었다. 아주 미세하게 하늘에 굴절된 곳이 보였다.
아직 ‘눈’이 없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네.
나는 다시 김하린이 폭격한 장소를 보았다. 못해도 수십 장의 깃털을 날려버린 것 같다. 저렇게 되면 광익의 ‘조정’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학생들의 얼굴을 슬쩍 봤다. 김하린에게 원한을 가질만한애가 있었나? 한번 확인해보니 김하린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던 남학생이 보였다.
근데 쟨 소심해 보여서 딱히 뭔 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날 기습하려고 해서 그런 건가.
‘좀 감동인데.’
하늘에서 공간이 일렁거리며 김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으로 짜인 날개를 활짝 편 채. 얼핏 보면 천사가 내려온 것 같은 신성한 광경이었다.
“괜찮아, 시우야?”
“나야 괜찮지. 근데…….”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이쪽을 주시하는 시선이나 이곳으로 향해 달려오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졌다.
“일단 여기는 빠져나가자. 애들 온다.”
“어, 어.”
나는 김하린을 이끌고 숲속으로 향했다. 중간부터 김하린이 너무 느려서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다.
“잠깐 실례할게.”
“어?”
김하린이 당황해하며 품에 쏙 안겼다. 나는 김하린을 품에 안고 빠르게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튀었다.
한참을 달리니 꽤 높은 곳으로 온 것 같았다. 나는 김하린을 바라보았다. 김하린이 욕망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나를 이런 깊숙한 숲속으로 데려와서 어쩔 셈이야!”
“……아니, 도와줘서 고맙다고 데려온 건데.”
나는 김하린을 내려놓았다. 김하린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에 있는 감정은 끈적끈적했다. 설마 여기서 하고 싶다는 건가?
김하린의 최면을 떠올렸다.
둘이 있을 때, 김하린에게 음심이 들고 강간하고 싶다는 욕망. 너무 포괄적이어서 골치가 아픈데. 지금 상황에서도 적용 되나. 일단 요정족들이 있을테니 이건 적용이 안될거다.
"앗!"
김하린이 돌부리에 넘어 걸린척을 하면서 나에게 안겼다.
아니, 여기 보는 눈 많다니까!
***
은수아는 조용히 숲 안에서 호흡을 다듬었다.
그러면서 아까 전, 격전에서 정령군주가 자신에게 슬쩍 말해준 것을 떠올렸다.
이시우가 위험하다.
은수아는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시우. 아카데미에서 가장 머리가 좋으며 그 성장률은 가히 회귀자 답게 뛰어났다. 그렇지만 은수아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이시우의 유일한 약점.
정신력이 취약한 것. 솔직히 말해서 은수아는 회귀자인 그가 대비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라면 당연히 대비했겠지.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보완하기도 전에 당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최면 어플이라면 이야기가 아주 많이 달라진다. 이시우는 자기가 최면 어플에 걸릴 리 없다며 웃어넘겼지만, 그때 반 아이들 대부분이 확인했다.
회귀자인 이시우가 모르는 것을 보면 그도 모르는 최면이거나.
`최악의 경우 마인의 손에 회귀자의 정보가 들어갈 수도 있다!`
그건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다. 이시우가 앞으로 가야 할 모든 길이 닫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은수아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령군주가 슬쩍 말해준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대충 범인들의 윤곽을 잡은 것 같으니 자신과 함께 범인을 잡자고 제안을 했다. 은수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군주는 이시우도 믿고 있는 인물이다. 틀림없이 그가 점찍은 `영웅` 중 한 명 일터.
그와 손을 잡고 이시우를 마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기 손으로 이시우를 도우면 그도 자신을 좀 더 믿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나.`
냉혹한 흑염의 여제로.
은수아는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조용히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