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개학
* * *
우리는 재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
검은색의 거북이들이 수십이 모여서 날뛰고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도심지로 가겠네.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먼저 가겠다. 꼬맹이들, 알아서 따라와라.”
김은정이 그렇게 말하며, 한순간 검은색의 번개로 화하였다. 그리고.
쾅!
거북이의 중심에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거북이의 등껍질을 발로 내리찍어서 곤죽으로 만들고, 거북이의 등껍질과 본체를 분리해서 그것을 날려버렸다.
“이거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신입아.”
“저는 인명구조를 도울게요.”
“……그럴래? 우리 신입, 객기도 안 부리니 참 좋네. 우리 신입을 위해서 이 누나가 특별히 소환수를 준비해줄게. 이거 타고 가.”
한가인이 수인을 맺으며 마법진을 소환했다. 문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자그마한 풍선 같은 토끼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끼는 그대로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컸는데, 비서는 익숙하게 토끼의 등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나도 비서를 따라 등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럼 있다 봐요.”
유키나가 손을 흔들길래 나도 손을 마주 흔들어줬다. 나는 아래를 둘러보았다. 아래는 꽤 심각했다. 요원들이 나와서 인원을 통솔하고 있지만, 잘 안 되고 있었다.
저래서는 몬스터에게 나오는 피해보다 인파에 휩쓸려 나오는 피해가 더 클텐데.
나는 아공간에서 천변을 소환해 손목에 찼다.
“저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그리고 가면을 썼다. 가면은 마도의 업. 그리고 혹시나 해서 가면을 작성했다. 무면의 가면. 요즘 얼굴이 좀 팔려서 조심하자는 마음가짐에서 썼다. 괜히 소란을 일으키면 귀찮으니까.
토끼에서 내려서 마력을 활성화했다. 염동력으로 땅에 닿기 전에 몸을 띄웠다.
손목에 찬 천변을 만지며 주변을 주시했다.
나랑 비서 누나가 할 것은 별거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혹시 모를 몬스터가 이쪽으로 온다면 막아줄 것.
원래대로라면 후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김은정이 있으니까. 그녀는 최상격의 일각이며, 그녀의 순위는 최상격 중에서도 앞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른 영웅이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파멸의 번개다. 무언가를 죽이는 데에 굉장히 유용한 힘이지만 이런 도심지에서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래서 신체 능력으로 하나하나 빠르게 제거하고 있다. 이미 절반 정도 가량을 죽였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 절반이나 있다.
“호, 혹시 협회의 영웅이신가요?”
나는 눈을 찌푸렸다. 핸드폰을 내 쪽으로 향하며 나에게 물어보는 여성 때문이었다.
“업무 중에 핸드폰 촬영을 하시면 안 됩니다.”
“한 번만 안될까요?”
여자가 귀여운 척을 하며 말했다. 나름 이쁘장하지만, 매일같이 임나연과 이지아와 윤승하와 김하린으로 단련한 내가 보기에는 별로였다.
“네, 안됩니다. 조금 더 나가면 업무 방해죄로 연행하겠습니다.”
“하, 존나 꽉 막혔네. 존나 관종같이 가면쳐쓴거 보면 얼굴 개 못생기게 생긴 새끼가.”
“…….”
어이가 없네. 나는 여자를 무시하며 천변으로 벽을 만들 준비를 했다. 비서 누나를 도와주려고 혼란이 이는 방향으로 향하려고 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쪽으로 오시면 안됩니…….”
“저, 내년에 히어로 아카데미에 입학할 학생인데 혹시 도와줄 일이 있을까요.”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조금 어색한 한국말이었다.
반짝이는 백금발의 눈동자와 머리색이 보였다.
공주.
그런 타이틀을 가진 소녀가 있다.
뜬금없지만, 게임 내에서 게이머들을 모아놓고 동료를 고른다고 한다면 여러 의견으로 갈린다.
대부분 자기가 애정하는 캐릭터들을 고르고 거기에 알맞게 파티를 짜지만, 힐러를 고르고자 한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2명으로 선택지가 좁혀진다.
릴리의 소녀. 백합의 공주. 그녀의 이명들이었다.
그녀의 힐러 능력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거기다가 백합의 공주는 뛰어난 방어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합의 공주가 있다면 다른 인물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플레이어의 선택지에 따라 성별이 갈리는데 윤승하를 택했다면 백합의 공주로, 윤채린을 택했다면…….
“후. 불쾌한 것들이 숨 쉬는 것이 역겹군.”
느끼한 말투의 소년이 어울리지 않게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어디선가 꺼내온 장미를 들고 서.
반짝이는 백금발의 눈동자와 어깨 바로 밑까지 내려오는 단발.
백합의 공주가 방어력과 힐링, 버퍼 능력을 겸했다면 이 인물은 그 반대편에 서는 인물이다.
장미의 왕자.
힐러 주제에 힐링과 디 버프의 능력을 지니고 공격성까지 장착한 소년이었다.
장미의 왕자가 터벅터벅 걸어오자 나는 막았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나, 나를 모르나? 프랑스의 왕자, 이 나탈 바스티앙을? 후후, 노, 농담이 심하군.”
“네, 모릅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니, 뒤로 물러나 주세요.”
“혹시 저는 아나요?”
백합의 공주가 물었다. 알다마다. 영국의 공주라 불리는 엘리스 루나마리아.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내, 내년에 히어로 아카데미의 수석으로 입학할 나탈 바스티앙을 모르다니!”
나탈은 저런 말을 하면서 우울해하고 있었다. 자기애가 강한 녀석이니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김은정이 있는 곳을 주시했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광경이 있었다.
고사리같이 여린 두 손으로 흑귀갑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돌려서 한 마리를 죽여버리고, 뒤에서 돌진하는 다른 한 마리는 손으로 한번 막은 다음 머리를 터트려 죽였다.
어느새 흑귀갑이 거의 전멸해 있었다. 저거 처리하는 것도 일이겠는걸. 그러다 강한 인기척이 느껴지자 흑귀갑 두 마리가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입! 부탁할게!”
한가인이 멀리서 외쳤다. 그녀의 주위에는 15마리가량의 소환수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손이 부족해서 일어난 참사 같았다.
“후후. 이 몸이 나설 차례인가. 미래의 히어로 아카데미의 역사를 써갈 프랑스의 왕자인 이 나탈 바스티앙이. 프랑스 귀족의 의무로 프랑스의 동맹인 한국을 위해서 특별히 나서…….”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탈의 말을 끊었다. 아공간에서 검을 뽑았다.
지식 열람을 이용해 흑귀갑을 살피길 잘했네.
흑귀갑은 단단하다. 하지만 그것은 등껍질에 한정한다. 노출된 살 부분은 오히려 조금 무른 부분이 있다. 그렇다 해도 검기를 뿜을 수 없는 생도라면 흑귀갑은 대단히 까다롭지만.
파지직!
보랏빛의 뇌광이 길쭉하게 늘어졌다. 돌진해오는 흑귀갑을 향해 달렸다. 혹시나 해서 천변을 이용해서 길쭉한 벽을 만들어 그것을 놓고 왔다.
흑귀갑이 돌진해오자 가볍게 아래로 슬라이드 하며 다리를 잘라내었다. 서걱. 보랏빛의 궤적을 그리며 흑귀갑의 다리 두 개가 그대로 잘렸다. 이걸로 한마리는 기동력을 상실했다.
어느새 다가와서 나에게 돌진하는 흑귀갑을 보며 가면을 덧썼다. 임나연의 가면. 보랏빛의 뇌광이 한순간 크게 발광했다. 보랏빛의 섬광이 1m가량 길쭉해지며 그대로 흑귀갑을 두 동강 내었다. 그리고.
서걱.
기동력을 상실한 흑귀갑의 머리를 내리쳤다.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릴리의 소녀와 장미의 왕자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보, 보랏빛의 뇌광(光)! 저 봤어요!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엄청나게 활약했던 이시우 맞죠?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이론 하나로 만점을 받은 전무후무한 천재!”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나는 무면의 가면을 지웠다. 정체는 어차피 뻔히 밝혀졌으니 가릴 필요도 없고, 안면도 틀 겸 해서였다. 릴리의 소녀, 엘리스와 장미의 왕자, 나탈은 그럴 가치가 있다.
“마, 맙소사, 진짜 이시우였어!”
“후후! 저게 내 미래의 라이벌!”
……장미의 왕자는 안 친해져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내 파티는 여자들을 위주로 구성했기에 쟤는 별로 필요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아니다. 고작 저 정도로 나탈을 포기할 수 없다. 릴리의 소녀, 엘리스가 집단전에 특화되어 있다면, 나탈은 소규모 파티에 특화되어 있다.
다만 흠이라면 윤채린에게 고백했을 때의 말이 떠올라서 흠이었다.
윤채린. 걱정 마라. 나는 설사 네가 남자였다 하더라도 너를 사랑했을 테니까.
라는 대사였다. 그래서 장미의 왕자. 릴리의 소녀, 백합의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승하.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설사 당신이 여자였다고 한들 저는 당신을 사랑했을 거예요.
하지만 윤승하는 엘리스와 이어지는 엔딩은 없었다. 물론 윤채린도 나탈과 이어지는 엔딩은 없다.
“이야, 신입! 머리도 존나 좋은데, 무력도 장난 아니네? 진짜 나중에 협회에 오면 꼭 우리 팀에 와라? 안 오면 은정 언니 데려가서 압박 팍팍 넣을 테니까!”
한가인이 활발하게 웃으며 왔다.
“꼬맹이, 훌륭한 검격이었다. 독학이라고는 하나, 과연 이라는 소리가 나올 일격이었어. 스승이 참으로 기뻐하겠구나.”
김은정이 야구모자를 고쳐 쓰며 살짝 미소를 짓고는 칭찬했다.
나는 김은정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김은정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한가인과 유키나, 비서 누나도 바라봤다. 나탈과 엘리스도 보았다. 이들 모두 5년 뒤, 벌어질 사건에서 모두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김은정의 목에 검을 겨누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대사를 읇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리석구나. 아직도 정에 휘둘리는 모습이. 너는 내가 심혈을 기울인 몇 안 되는 성공작이었거늘.
회귀자의 동료. 김은정이 아빠라고 생각하는 혁월이라는 존재에게 말이다.
***
“뭐해, 오빠?”
원숭이가 문밖에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옷가지를 모두 아공간에 넣고 있었다.
“준비.”
“준비~. 아, 그렇지. 오빠는 벌써 개학이었지? 이야, 방학이 고작 일주일도 안되는 데다, 한번 놀러 갔다 온 다음 바로 협회로 끌려가서 출근하더니 벌써 개학이 온 거야~?”
원숭이가 입을 열심히 놀렸다. 뭐, 나도 사람인지라 방학 동안 쉬고 싶은 적이 많았다. 근데 협회 일도 은근히 꿀이라서. 저번처럼 출동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거기다가 김은정의 팀은 순찰 같은 것도 잘 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일이 터지면 바로 출동할 수 있게끔 상시로 대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은정의 팀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들의 팀은 위험 등급이 높은 임무만 배당된다.
그러니까 나는 협회에서 일할 때, 김은정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으며 협회 내에 있는 연습실에서 거의 훈련만 주야장천 했다.
‘평일과 다르게 거의 없기는 했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 완전 먹구름이 끼었네~. 개학이라서 그런가~.”
후, 안 되겠다. 어른으로서 그동안 참아줬지만, 이제 슬슬 기강을 잡아야 할 때가 왔다.
“용돈 1개월 압수.”
“오라버니이이이이!!”
그러게 누가 깝치래.
달려드는 고릴라를 무시하고 거실로 나섰다.
“벌써 가려고? 저녁이라도 여기서 먹고 가지.”
“저녁에 애들하고 만나서 먹으려고요.”
“아, 그러고보니 이……나연이가 있었지?”
아버지가 어색해하며 임나연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임나연의 회사에서 부모님 두 분 다 일하시니까.
“네.”
“그래, 잘 다녀오고. 공부는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되네. 너무 힘들면 전화하고. 알았지?”
“네. 밥은 어머니가 해준 것보다 맛없지만, 그래도 참아볼게요.”
“어머, 얘도 참.”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집을 뒤로하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안 그래도 요즘 어떻게 체력을 늘려야 할까 걱정이었는데.
정면을 바라보았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에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핸드폰을 보여주는 여성이 있었다. 요정여왕의 오른팔. 공간계의 속성을 가진 요정족. 은수아는 그녀를 나찰의 마녀니, 수라나찰의 아수라니 하는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지만, 그녀는 대단한 힘을 가진 요정족이다.
메이드 복 차림의 그란힐데가 나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최면을 걸고 있습니다. 왜 저한테만 이러시는 거지요. 다른 여성분들에게는 그렇게 잘 대해주셨으면서.”
“그야……그란데힐 님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근데 진짜 어떻게 아셨지요? 설마.”
“요정여왕님을 보살피는 업무를 위해 잠깐 은신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학교에서 버젓이 유물을 사용하는데 설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줄 아셨습니까?”
임나연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구나.
“설마 모두 엿보신 겁니까?”
“모두는 아닙니다. 그저……임나연 님이 이시우 님을 최면을 걸었을 때부터.”
“…….”
“그러니 최면에 걸려주십시오. 이시우 님은 이제부터 여장이 취미가 됩니다.”
“…….”
암담했다. 천의 가면의 페널티가 상상 이상이었다. 설마 요정족의 충실한 종복까지 자극하다니.
“여장이 취미는 좀 그렇지 않나요?”
“취미란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즐긴다면 그 또한 취미가 될 수 있지요. 암, 그렇고 말고요.”
“아니, 너무 음습한…….”
“저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닙니까.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애인이 있는 이시우 님을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고.”
김하린의 최면도 봤구나.
“그저 사진 몇 번만 다시 찍어보면 안 되겠습니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외로 이게 이시우님의 취미가 될 수 있을지. 여기 이시아 님을 위한 메이드 복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혹시 메이드 복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하긴, 노출이 심하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이 수녀복은 어떠신지요.”
진짜 어지럽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