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협회
* * *
우리는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나는 김은정을 힐끔거렸다. 붉은색의 눈동자와 푸른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천의 가면은 이 세계에서 누구도 가지지 못한 특성이다. 지식 열람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도 천의 가면을 일부 꿰뚫는 것은 저 눈 때문이다.
저 눈은 훗날 태극안으로 진화한다. 다만 대부분의 분기점에서 김은정은 그 전에 죽는다. 게이머 중 누구도 살리지 못했지만……나는 우연한 방법으로 그녀를 살릴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버그인 것 같기는 한데.’
어떤 아이템 때문이었다. 그 아이템을 노린 적이 주인공을 노리다가 시간이 끌렸기 때문에 살았었다.
나는 힐끔 김은정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긴, 힘들었을 거다. 한 시간 가량 미친 듯이 싸우고 왔으니까.
최상위 격에서 체력에 자신 있는 존재들이 싸우면 하루는 물론 칠주야를 미친 듯이 싸울 수 있지만, 김은정은 단기전에 매우 강하다. 그런 김은정이 한 시간 동안 싸운 거면 오래도록 싸웠다고 볼 수 있다.
“다 왔어요.”
“빠르구나.”
핸드폰 앱으로 택시 결제를 마치고 우리는 임나연의 별장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는 마법을 풀어도 되겠지. 나는 김은정에게 걸린 마법을 풀었다.
“여기에선 두 명 빼고 다 여자라 괜찮을 거예요.”
“그래? 주변에 여자가 많구나.”
“…….”
나는 김은정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마주친 인물은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한산했다. 나는 김은정에게 옷가지들을 챙겨주었다. 남자가 입는 옷이지만 김은정이 입으니 보이시한 느낌을 주는 패션으로 바뀌었다.
꼬르륵.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뭐,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간단하게 요깃거리라도 만들어드릴게요.”
“……어지간한 건 다 잘 먹는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사용인들이 꽤 있었다. 나는 미리 만들어진 요리를 챙겨갔다. 김은정은 은근 많이 먹으니까 새우 볶음밥 2인분이랑 고기 등을 이것저것 챙겨서 갔다.
“고맙구나.”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김은정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가실 거에요?”
“그래. 슬슬 협회로 돌아가야지. 미뤄둔 일이 꽤 있으니까. 부하들에게 미뤄두기는 했지만, 내가 해야만 하는 일도 있고.”
김은정이 일어났다.
“아, 바래다 드릴게요.”
“음? 굳이?”
“핸드폰이랑 지갑도 없지 않으세요?”
“……아.”
김은정이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하긴, 어지간하면 부관을 챙겨서 부관이 다 챙겨줬겠지만, 지금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럼 실례 좀 지겠다, 꼬맹이.”
“네.”
나는 검은색 반소매 티를 입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겼다.
김은정을 워프 게이트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보자.”
“네. 그때 뵐게요.”
***
나는 어깨를 풀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 여행에서 푹 쉰다는 계획은 결과만을 말하자면 완전히 실패했다. 항상 내 정기를 노리며 남자라며 같은 방을 쓰자고 들어오는 윤승하가 가장 큰 문제였고, 바깥으로 나가면 이지아나 김하린, 임나연이 나를 노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좀비같이 파라솔에 누우며 체력을 쉬는 것에 집중하였다.
“으어어어어.”
옆에서 정한서가 좀비 같은 신음을 내며 쓰러져 있다.
정한서는 은수아랑 윤채린과 같이 노느라 저렇게 되었다. 은수아랑 윤채린은 사이좋게 바닷가에서 쓰러져 있고.
“하, 나 이번 주말에 쉬어야겠네. 생각 이상으로 너무 빡빡한데…?”
“은수아와 윤채린이잖아. 쟤 내 페이스에 맞춰서 노는 게 이상한 거지.”
“그렇지?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정한서가 살짝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윤채린한테 쯧쯧, 허약한 녀석 같으니. 라는 말 한마디를 들은 뒤에 계속 저러고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한차례 피었다. 몸이 조금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뒤로 갔다. 다름이 아니라 바비큐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용인들이 있지만, 일반인들이라서 내가 거들 겸 도와주러 갔다. 사람이 많으니까 통 두 개를 중앙에 두고 그 위의 가마솥 뚜껑을 가지고 왔다. 왜인인지는 모르지만 있었다.
“비염.”
[아니, 이럴 때만 내 이름을 부른다고?]
비염이 어이없어했지만, 보라색의 불꽃을 만들어줬다. 어둠이 내려앉은 장소에 보라색 불꽃을 보니 괜히 감성적으로 변했다.
“오, 뭐야. 오늘 저녁은 바비큐야?”
“아까 임나연이 한다고 했잖아.”
윤채린이 반색하자 은수아가 타박했다. 쟤낸 뭔가 이번에 엄청 친해진 느낌이네.
“고기는 우리 시야가 굽는 거야? 그러면 이 언니는 맛있게 먹어줄게.”
“맛있게 먹어. 내가 구울 테니까.”
전생에도 그랬다. 친구들이나 군대에 갔을 때, 고기를 굽는 것은 내 몫이었다. 다른 애들이 하면 뭔가 좀 답답하고 그래서.
처음은 빨리 먹을 수 있는 차돌박이와 삼겹살을 고르고 뚜껑 위에 올렸다. 불이 가장 샌 중간에서.
“김치랑 콩나물도 같이 굽자.”
“좀 있다가. 기름이 좀 나오면.”
윤채린을 제지하고 고기를 싹둑싹둑 잘랐다. 비염의 화력이 워낙에 꽤 샌 탓에 금방금방 익었다. 그리고 이제 김치와 콩나물을 올리니 어느새 임나연이랑 이지아, 윤승하가 오기 시작했다.
“뭐야, 시우가 고기 굽는 거야? 맛있겠다.”
윤승하가 웃으며 말했다.
“왜? 시우 요리 잘해?”
“……응. 엄청나게 잘해.”
임나연이 말하자 윤승하가 살짝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삼겹살 다 익었다. 빨리 와서 먹어.”
내 말에 임나연이 근처에서 젓가락을 집어 한 점 먹었다.
“맛있다. 시우가 구운 거라 더 맛있는 것 같아.”
그건 아닐 걸.
나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인원이 많아지면서 고기가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고기를 구우면서 몇 점 먹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자, 앙.”
처음에는 윤승하가 쌈을 싸줬다. 고기와 쌈장과 상추. 정석적인 조합이었다.
“시우는 남자니까 고기 잔뜩 쌌어!”
“고기만 너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채소를 좀 많이 쌌어.”
그다음에 임나연과 이지아가.
“우리 시아, 언니가 주는 쌈이야. 자, 아해보렴.”
“너 거기에 뭐 넣었냐.”
“아까 채린이가 고추랑 마늘 잔뜩 넣더라. 시우야 그거 먹지 마, 지지야.”
“야! 윤승하!”
윤채린이 쌈을 싸다 준다거나.
먹지는 않았지만.
돼지기름에 김치랑 콩나물이랑 송이버섯도 올렸다. 삼겹살에는 송이버섯이 국룰이지.
나는 고기를 열심히 먹는 윤채린에게 송이버섯 한점을 올려줬다.
“하, 시아야. 이 언니는 버섯 같은 것은 안 먹는단다. 천마는 한 마리의 사자처럼 고고한 법. 채식 같은 것은 먹지 않아요.”
“사자는 무리를 지어서 행동하는데?”
“이 언니가 그렇다면 그렇다는 거야!”
윤채린이 송이버섯을 다시 뚜껑 위에 올려다 놓았다. 그래, 고기나 많이 먹어라. 먹는 게 남는 거다.
나는 윤채린의 접시에 고기를 놓아주고는 한 점 입으로 넣었다.
술 한잔이 떠올랐다. 맥주 말고 소주로.
히어로 아카데미 학생은 성인으로 취급 받는 데다가 여기는 임나연의 별장이라 소주 한 병쯤은 문제 없을 것 같지만. 왠지 그러기 싫었다. 뭐라고 해야 될까.
저 애들한테 나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이기 때문일까.
물대포를 맞고 주먹을 부들거리는 은수아. 그것을 보며 깔깔대는 윤채린. 정한서가 은수아를 막으러 뛰어갔고, 윤승하가 한숨을 쉬며 윤채린한테 갔다.
김하린이 몸을 부들거리며 고기를 먹으러 나오고 있었고.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임나연.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치는 이지아.
뭔가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콜라를 한잔 홀짝였다.
***
협회 건물은 과연 웅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 그곳의 본점은 독특하면서도 화려했다. 협회의 건물은 특이하게도 8층까지 밖에 없지만, 그 크기는 웅장했다. 건물 하나하나가 최소 20m 이상은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협회에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체험 때문에 왔는데요.”
“아, 히어로 아카데미의 학생이셨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시우라고 합니다.”
내 말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잠깐 컴퓨터로 조회를 하더니 이내 눈이 커졌다.
“알겠습니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여기 카드로 출입하실 때와 나가실 때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카드는 체험 마지막에 돌려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시우 학생은 7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나는 카드를 받고 입구에서 카드를 찍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비서 복 차림의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이시우 씨 맞으십니까?”
“네.”
“김은정은 현재 급한 회의가 생기셔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대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비서가 그리 말하며 나를 김은정의 방으로 안내했다. 김은정의 방은 생각보다 화려한 장식품이 많았다. 남다윤처럼 무기나 그런 것들을 둔 게 아니라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잔뜩 있었다.
김은정은 사치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의 팀원들은 다르다. 오히려 김은정에게 사치를 권유하는 편이었다.
나는 슬쩍 책상을 둘러보다가 종이 뭉치가 보였다. 종이에는 여러 가지 수식들이 있었는데, 대충 보니까 어떤 연구 자료인 것 같았다.
덜컥.
“오, 나영이 언니 하이!”
“다들 안녕하세요오.”
“오셨습니까.”
활기찬 목소리와 어색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일본풍의 옷을 입은 여성과 흰색 가운을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오, 얘가 걔야? 은정 언니가 어떻게든 잡으려던 히어로 아카데미의 루키가? 안녕, 반가워. 난 은정 언니의 팀 일원인 한가인이라고 해.”
“저는 요시무라 유키나라고 해요. 혹시 곤듀님 맞으세요?”
유키나가 나를 올려보며 반짝이는 눈으로 보았다. 설마 그 영상을 봤던 건가.
“곤듀님? 그건 또 뭐야?”
“그러고 보니 이거 뭐예요? 마력 회로 직렬 구조를 병렬 구조 방식으로 바꾸는 것 같은데.”
“오, 그걸 알아봐? 학생 수준에서는 이해하기도 어려울 텐데. 하긴 너도 머리가 좀 좋지. 이번에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이론 부분에서 만점 받은 천재였으니까.”
화제 돌리기에 성공했다.
나는 지식 열람을 이용해서 정보를 슬쩍 풀려다가 멈칫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데. 예상이지만 이 방식으로 마법을 쓴다면 효율이 최소 배 이상은 늘 것 같았다.
원작에서는 이런 게 안 나왔는데. 그렇다면 못해도 5년 뒤에 풀릴 지식이라는 이야기다.
나중에 이지아에게 슬쩍 알려줄까. 명당에 등록하면 돈을 벌 수 있어서 좋겠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다. 빌런들에게 풀려나면 빌런들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근데 이거 굳이 처음부터 수식을 이렇게 꼬을 필요가 있을까요?”
“후후. 역시 아직은 햇병아리구나. 이걸 처음부터 수식을 꼬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수식이 아예 꼬여서 마법이 불발된다고.”
한가인이 귀엽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이걸 말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걸 말해주면 그녀의 연구 성과는 눈에띄게 늘어날것같은데.
'말해주지 말자.'
그녀가 전당에 등록하기라도 한다면. 만약에 그것이 마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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