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방학(6)
* * *
김은정은 동글 끝에 다다랐다.
동글 끝에는 1km라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동공이 있었다.
‘침식화 상태가 심하군.’
침식화.
던전이 현실 세계를 침식하는 현상이다. 또는 S등급에 준하는 괴물이 가진 능력으로 현실 세계를 자신의 둥지로 만드는 현상이었다.
김은정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1km 동공의 절반을 차지하는 호수가 진동하고 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빠르게 나오고 있었다.
촤악.
물이 솟으며 거구의 몸체가 드러났다. 뱀의 꼬리. 인간의 상반신.
그 모든 게 너무나도 거대했다. 뱀의 몸체만 족히 100m는 넘을 것 같았다. 그 위의 상반신은 백자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노란빛의 눈이 번뜩였다.
사이한 기파가 피부를 찌를 듯이 압박했다.
그것이 김은정을 응시했다.
“20년쯤 됐으면, 나 혼자서는 못 잡았을 놈이군. 스스로 ‘진화’를 하고 있어.”
김은정은 태극검을 잡으며 생각했다.
괴물들 중에 이따금 그런 존재들이 있다. 아주 오래 살거나 어떤 ‘계기’로 인하여 옛 설화나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힘을 다루는 존재들이 되는 경우가 있다.
최근 들어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면 유럽 지역에 나타난 ‘수르트’였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인.
그것은 그리스라는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고, 13명의 영웅 중 3명과 최상격 10명을 잡아먹고 겨우겨우 죽일 수 있었다.
“후.”
김은정은 숨을 내쉬었다. 흑과 백의 번개가 토해지듯 파직거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여기서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한다. 김은정의 능력은 번개였다. 파멸의 번개. 태극지체로 이룬 그것은 파멸의 속성을 띄기 때문이었다.
이 근처는 바닷가.
그곳에서 그녀가 능력을 쓴다면 수천 단위는 우습게 죽으리라.
그렇지만. 이곳은 던전이다. 던전이 침식하고 있는 다른 공간이다.
김은정은 입술을 비틀었다.
***
“네노오오오옴!”
마인화된 마인이 소리치며 탁한 기운을 뿜어냈다. 꼴에 분노하는 모습이 퍽 웃겼다.
이곳에서 라미아를 깨운 다음 도망치는 그들로 인해서 이곳에서 족히 수천 명은 죽는 것으로 나온다.
수많은 프랑스 영웅들과 타국의 영웅들도 갈려 나간다. 수십에 달하는 선 속성의 영웅들이 죽는다. 그건 안된다. 그들은 후반부에 마족들과 피 터지게 싸워줘야 한다.
탁한 기운이 요동치듯 꿀렁이더니 이내 그것이 몸에 달라붙었다. 마치 촉수가 달라붙은 형체였다.
“비염.”
조용히 중얼거리자 보랏빛의 불꽃이 허공에서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뭐라 말할 비염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조용히 내 쪽으로 왔다.
나는 차분하게 내게 돌진해오는 마인을 바라보았다. 마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공기를 격하였다.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강맹했다. 속도도 오르고 근력도 강해졌다. 그러나 동료가 죽은 모습에 분노하여 투로가 투박해졌다. 아니, 투박조차도 아니라 단순무식, 그 자체였다.
천변을 꺼냈다.
원하는 것은 방패. 천변이 내 의사를 읽고 둥그런 라운드 방패로 바뀌었다. 방패로 몸을 가리며 비켜 맞았다. 그리고 다시 변환. 이번엔 단도. 단도에 보랏빛의 뇌광이 피어올랐다. 그것으로 마인의 팔을 찍었다.
푸확!
검은색의 피가 흩뿌려지며 마인이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쾅!
마인의 팔에서 보랏빛의 불꽃이 터졌다. 연습만 했는데, 실전에서도 꽤 쓸만하네. 비염은 내 마나를 공유한다는 것에서 생각해낸 연계기였다. 뇌광으로 상처를 내고 불꽃으로 터트린다.
[보라색 맛이 어때?]
비염이 말하는 걸 무시하며, 어검을 발동했다. 검이 한 자루에서 두 자루로 늘어났다. 빈손으로 검을 쥐고 뇌광을 발동했다. 보랏빛이 궤적을 그리며 마인의 팔을 난도질했다. 그곳을 다시 비염이 폭발시킨다. 쾅쾅폭발음이 동굴 안에 퍼졌다.
이걸로 오른쪽 팔은 못 쓰겠지.
“네놈은 결코 편하게 죽이지 않을 거다! 갈아서 씹어먹어 주마!”
눈이 돌아갔군. 나는 피식 웃다가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뭐, 저 마인이 더 분노할 곳도 없어 보였다.
마인이 다시 돌진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면적이 넓은 몸으로 그대로 들이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천변을 실로 변환했다. 천수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실을 마인의 관절 마디로 던졌다. 그와 동시에 광익을 폈다. 보라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외날개가 한순간 마인의 시야를 방해한다.
“큭! 잔재주를!”
허리를 숙이며, 발을 옆으로 빼며 회피했다. 그리고 실에 뇌광을 입혔다. 관절 사이사이에 매달린 실에 뇌광이 질주한다. 보랏빛의 뇌광이 마인을 태우고.
콰쾅쾅쾅!
비염이 상처에 폭발을 입혔다. 효과 죽이네. 나는 마인을 바라보았다. 마인의 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멍하니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나는 마인을 향하여 검을 들었다. 그리고.
푹.
목을 잘랐다. 데구르르. 목이 떨어지다가 이내 재가 되었다. 마인의 죽음은 이래 그랬다.
[드디어 끝났네. 그것보다 어때? 내 화력?]
“생각 이상인데. 엄청 좋았어.”
[그러니까 나한테 평소에도 좀 잘해. 막 정령계로 보내지 말고.]
“알았어. 앞으로 잘 할게.”
나는 광익을 전개했다. 보랏빛의 외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밖으로 나가서 햇빛을 받으니 마력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력 일부를 단처럼 만들어 비염에게 던졌다.
[땡큐. 계약자의 마력은 맛있어서 좋단 말이야]
“맛있어?”
[엉. 엄청 맛이 진해]
비염이 냠냠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 광경을 잠시 보다가 아래에서 마력의 파장이 솟아 오려는 것들을 봤다. 장난 아니네. 저긴 이미 던전화가 된 곳이라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없을 텐데.
[저긴 진짜 장난 아니네. 계약자, 우리는 저기 안에 들어가지 말자]
“그럴 생각도 없어. 아마 입구 근처에만 가도 죽을걸.”
최상격에 도달한 자들의 싸움은 그런 이야기였다. 그저 도시 밖에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 여파로 도시가 반파가 될 수 있는 존재들. 달리 그들의 별명이 걸어 다니는 핵병기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근데 계약자. 너 괜찮아?]
“뭐가.”
[아니 음양체라는거. 음과 양의 기운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너 요즘 음 쪽으로 치우치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좋은 지적이기는 했다. 임나연의 경우는 내 정기를 빨아먹을 생각을 하지만 이지아와 윤승하, 남다윤은 그래도 내 생각을 어느 정도 해준다. 채운 양기를 대신해 음기를 쪽쪽 빨아먹거나 양기를 보충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까지는 남다윤이 주는 먹을거리로 많이 버틸 수 있지만……슬슬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슬슬 그걸 얻어볼까.’
임나연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애매한 취급을 받았다.
대해 같은 마나. 큰 마나통이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그녀의 마나통은 어지간한 마법사들조차도 비교하면 초라해질 정도로 많지만……그 마나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래서 임나연을 마법사로 만들려는 시도가 많았다. 임나연, 넌 검보다 마법이 더 어울려. 이런 말을 하면서 임나연을 마법사로 만들려는 시도가 게이머들 사이에서 꽤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의 아이템이 발견된 후, 임나연은 1티어로 올랐다. 천년 빙정이라 불리는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을 이용하면 임나연이 빙속성의 마력을 개화한다.
그리고 특성, 영원을 개방하면 그때부터 임나연은 비로소 1티어로 상승한다.
음양체는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출력을 낸다.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 상태. 그 상태가 마력이 충만하든, 마력이 없든 상관 없다. 임나연은 공부는 싫어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꽤 좋으니까 빙정을 주면 알아서 음의 마력을 빼내겠지.
나는 상태창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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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시우
근력 : 20
민첩 : 20
체력 : 22
마력 : 20
고유능력 : 유아독존
특성 : 천의 가면(S), 지식열람(S), 천수(S), 음양체 (S), 변강쇠(A)
초기와 비교하자면 정말 괄목상대한 상태창이었다. 이제 능력치 하나만을 따지자면 입학할 때의 주인공들을 많이 따라잡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 한참은 이 상태로 지내야 하겠지만.’
히어로 아카데미 지부 내에 있는 비밀 수련장에서 버그가 통한다면 여기서 감각하고 눈을 개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늘을 굽어보는 눈(s)’이랑 ‘불가해한 감각(S)’은 모든 게이머가 만장일치로 무조건 얻어야 하는 스킬들이라고 입을 모으는 스킬들이다. 초반에 얻을 수 있으면서도 그 능력이랑 활용도는 후반에 가서도 굉장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장이 한 번밖에 안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해야 했다.
“끙.”
머리가 아팠다. 버그가 통한다면 1학년 때 바로 가서 얻을 수 있겠지만, 실수라도 실패하면 출입 불가한 페널티가 걸렸다. 그래도 천의 가면 때문에 어찌어찌 2학년이 되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꼬맹이.”
뒤를 돌아보니 김은정이 너덜너덜한 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옷은 가슴이랑 중요 부위만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저러니까 진짜 이쁘긴 하네.
“보아하니 쉽게 이겼나 보구나.”
“뭐, 무신의 제자니까요.”
너스레 떨며 말하자 김은정이 살짝 웃었다.
무신 혁월. 회귀자와 함께 지구를 지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지만, 김은정에게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멸망할 것 같던 세계에서 자신을 구해준 인물이었으며 무공을 가르쳐준 인물이다. 김은정은 혁월을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라기보다는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 혁월의 제자라면 그 정도는 기본이다. 아, 혹시 옷은 가지고 있니?”
“옷은 숙소에 가면 있는데요. 같이 숙소로 갈까요?”
“미안하지만 이 꼴이라.”
김은정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후드티가 가슴만을 겨우 가리고 있고 스키니진은 어지간한 짧은 반바지보다 더 짧았다. 저 정도면 거의 속옷이기는 한데.
“제가 마법을 좀 배웠거든요. 은신 마법 걸어드릴게요. 같이 숙소로 가요.”
“음……그럼 잠깐만 신세 좀 지겠다, 꼬맹이.”
나는 윗옷을 벗었다. 상체가 훤히 드러났지만, 어차피 바닷가라 그렇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투명화 마법을 쓴다지만 김은정은 여성이니까, 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녀에게 반소매를 건네 주었다.
“센스도 좋군. 인기가 많겠어. 아, 인기가 많으면 곤란한가. 꼬맹이 특성은 위험한 사람을 끌어들이니까.”
“……네?”
김은정이 갑자기 묘한 말을 했다. 내가 위험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고?
“음? 아, 미안하게 됐군. 이런 건 예민한 문제인데. 내가 너무 함부로 말했어.”
“아뇨, 그게 아니라……제 특성이 위험한 사람들을 끌어들인 다고요?”
“그래. 설마 모르는 거냐, 꼬맹이? 어디 시골구석에 있다가 왔으면 모를 만도 한데.”
김은정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꼬맹이, 네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그 가면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서 어두운 욕망 같은 걸 자극하지. 아마 꼬맹이, 네가 나중에 여자친구를 사귄다면 조심해라. 그 가면이 네 여자친구의 욕망을 불을 지피고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할지도 모르니까.”
“…….”
“표정을 보아하니 짐작 가는 부분이 몇 개 있는 모양이다. 꼬맹이, 절제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피임은 꼭 해라.”
어쩐지 너무 좋다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