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방학(2)
* * *
프랑스로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워프 게이트는 정말 편한데.
나지막이 감탄하자 프랑스 워프 게이트 직원이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뭔가 이상하네. 프랑스라고 하면 엄청나게 멀게 느껴지는데 이렇게 금방 오니.”
윤채린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방금 운전사 아저씨가 도착했다네. 우리도 나가자.”
임나연이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임나연을 따라서 밖으로 나가자 묵빛의 광택을 자랑하는 리무진이 보였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10M가량의 길쭉한 리무진이었다.
리무진의 운전석에서 운전자가 내려서 임나연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문을 열었다.
“우와.”
윤채린이 조용하게 감탄했다. 얼굴에서 부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을 지었다.
“가자, 애들아.”
임나연의 말에 우리는 뒷문으로 향했다.
“짐은 저한테 주십시오.”
“저희 짐이 좀 많은데…….”
윤승하가 머뭇거리자 운전자가 방긋 웃었다.
그가 손뼉을 짝하고 치자 일행이 들고 있는 짐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염동마법이었다. 척 보기에도 초급 염동마법이었지만, 운전기사가 염동 마법을 익힌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안쪽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끝자리에 앉아 내 옆에 공간이 오른쪽만 남는 자리.
푹신한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자리를 잡자, 자연스럽게 임나연이 내 옆쪽 자리에 앉았다. 이지아랑 김하린이 사이좋게 그 옆자리에 앉았다.
윤승하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옅게 웃었다. 좀 부담스러운데.
“목마르면 뒤에 서랍에서 음료수 꺼내 마셔도 돼.”
임나연의 말에 나는 서랍 같은 것을 열었다. 그러자 음료수가 종류별로 나를 반겼다. 제로 콜라가 있으려나. 제로 콜라를 찾다가 제로 펩시가 있었다. 제로 콜라는 역시 펩시지. 옆에 오이 맛 사이다도 있어서 그걸 꺼내고 윤승하에게 던졌다.
“승하야, 받아.”
“응?”
윤승하가 얼떨결에 내가 던진 오이 맛 사이다를 받았다. 옆에서 정한서가 표정을 찌푸렸다.
“아니, 시우야. 너무 한 거 아니냐. 저런 맛대가리 없는 사이다를…….”
“오, 마침 목이 말랐는데, 고마워.”
정한서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윤승하가 캔을 따서 그것을 마셨다. 사방에서 경악에 찬 표정으로 윤승하를 바라보았다.
“응, 오이 맛 사이다, 좋아할 수 있지…….”
정한서가 말꼬리를 흐리며 윤승하를 두둔했다.
“그렇지? 너도 한번 마셔볼래? 굉장히 맛이 특이해”
“아, 아냐, 난 사양할게.”
윤승하가 반색하며 다른 오이 맛 사이다를 꺼내려고 하자 정한서가 말끝을 흐리며 거절했다.
별장에는 금방 도착했다. 별장이 있는 장소는 독특했는데, 바닷가 위에 지어져 있었다. 바닷가 위에 목재로 다리 같은 것을 만들고, 그 위에 ㄷ자 모양으로 꺾인 4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저건 별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작은 성에 가까웠다.
“……저게 별장이라고?”
“응. 조금 작기는 한데, 그래도 잠깐 지내니까 괜찮지?”
임나연의 말에 다들 어이없어하며 임나연을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임나연의 의견에 긍정한 건 은수아 뿐이었다.
“괜찮네.”
은수아는 저래 보여도 배경 하나로 따지면 임나연에게 꿇리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이상할 게 없다.
세상 모든 마법사가 모인 집단인 상아탑의 후계자는 그런 위치였다.
“자리는 4층만 빼고 아무 데나 자리 잡아도 되. 4층은 가족이랑 친척들 방이라서.”
“오케이. 가장 전망 좋은 3층 자리는 내 것.”
윤채린이 그렇게 말하며 별장으로 뛰어갔다.
그와 반대로 나는 느긋하게 걸어갔다. 전망이 좋은 자리보다는 이동이 간편한 1층으로 자리 잡아야지. 전망 좋은 곳도 좋지만, 나는 편의성을 우선시했다.
1층으로 향하자 2층으로 향하려는 걸음들이 대거 멈칫했다.
“시우는 1층에 자리 잡을 거야?”
이지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하는 자리는 맨 끝자리니까.
“그럼 나랑 같이 쓸래? 여기는 좀 커서 부담스러운데.”
윤승하가 웃으며 말했다. 좀 큰 게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여행은 철저히 쉴 거다.
빌런은 내일 출몰하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빌런을 잡고 내일 모래는 느긋하게 있다가 집으로 갈 거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 여행에서 절대로 착정을 당하지 않을 거다……!
“같이 쓸 거면 2층이나 3층으로 가야 해. 거기에 가족실이랑 부부실이 있거든. 요기는 다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
임나연의 말에 윤승하가 2층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럼 우리 2층은 어때?”
“아예 가족실로 잡을래? 이런 기회에 남자들끼리 우정이나 다지자고!”
정한서가 말을 보탰다.
“미안, 난 시우랑 같이 쓰고 싶어서.”
“…….”
윤승하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이 틈에 짐을 들고 끝방 자리를 잡았다. 방에 들어가고 짐을 대충 풀었다. 준비한 게 몇 개 없어서 짐을 푸는 건 금방 끝났다. 비염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된 게 나를 짐을 푸는 데 쓸 생각을 하는 거야?]
어이없어하는 비염을 무시했다. 하지만 정령은 편한걸. 그렇게 대꾸하자 비염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계약자라서 봐준다]
비염을 정령계로 보내고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평범하게 검은색 반바지에 하얀 외투 하나를 걸쳤다. 여기에 파란색 튜브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신발장에 막대 사탕이 있어서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여성 진들은 수영복 입고 이것저것 준비한다며 꽤 늦을 거다. 나는 바깥에 나가서 파라솔 위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밖을 보니 왜 여기에 별장을 지었는지 알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런 것에 나름 무딘 나인데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고개를 돌리니 메이드 복 차림의 여성이 나에게 물었다.
“혹시 마실 거 있나요? 블루 레모네이드 라던가.”
“네,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물컵 병에 블루레몬 에이드가 담겨서 왔다. 위에는 레몬이 꽂혀 있었고, 얼음도 잔뜩 있었다.
한입 살짝 마셔보니 맛이 굉장히 진했다.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렇게 멍하니 있으니 차례대로 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정한서였다. 짧은 삼각팬티에 옷 위는 래시가드를 차림이었다.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웬 삼각팬티?”
“남자는 삼각팬티라고. 시우는 아직 모르는구나.”
존나 때리고 싶네.
후,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정한서는 정보 셔틀이다.
그걸 생각하니 좀 괜찮아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선크림을 안바르고 왔네.
“나 선크림 좀.”
“아, 맞다. 나도 바르고 왔네. 나 좀 빌려주라.”
“응.”
마시던 음료수를 놓고 다시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으로 들어오니 검은색 비키니를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친 김하린이 보였다. 뭔가 당황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잘 어울리네. 엄청 이쁘다.”
“웬일로 다 칭찬이야. 고마워.”
김하린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걸어오다가 뭔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툭.
콘돔이 떨어졌다.
“…….”
“…….”
“어, 음. 이, 이건 그, 바, 방안에서 호, 호기심에…….”
“뭐, 호기심에 챙길 수도 있지.”
김하린이 목소리를 떨며 이야기했다. 나는 김하린의 행동에 굉장히 감동했다. 콘돔이라니! 여자 쪽에서 피임을 생각하고 있다니!
앞으로 김하린에게 잘해주자. 그러다가 김하린의 성벽이 떠올랐다. 강간을 당하면 좋아하는 성벽.
‘…….’
잘 해준다는 건 도대체 뭘까.
어찌 되었든, 이번 여행에서라도 잘 대해주자.
김하린은 새하얀 피부가 빨갛게 물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좋을 테니까.
갑자기 사춘기 때가 떠올랐다. 친구가 장난삼아 주머니에 넣은 콘돔을 모르고 세탁실에 넣다가 어머니가 옷을 뒤질 때 콘돔이 툭 튀어나왔을 때가.
‘으음…….’
어쨌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선크림을 찾았다. 마법이 걸려 있어서 비쌌지만, 그래도 햇빛을 거의 차단해준다는 리뷰에 산 선크림이다. 아기 피부는 유지해야지.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밖으로 나가자 이지아와 임나연이 보였다.
둘 다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이지아는 새하얀 비키니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임나연은 노란빛의 오픈 숄더 프릴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오…….”
내가 조용히 감탄하자 임나연은 조금 부끄러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어때 시우야?”
“이뻐. 지아는 평소보다 청초해 보이고 나연이는 엄청 사랑스럽네.”
“시우도 엄청 다르네. 외투 안에 있는 신체가…….’
이지아가 야릇한 눈으로 내 복근을 바라봤다. 임나연의 시선도 내 복근으로 향했다.
“뭐, 뭔가 야하네.”
임나연이 내 복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런 관심은 싫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 진도를 나가서 종일 할 생각들을 하니까 문제지.
“오, 뭐야. 벌써 다 나와 있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찬란한 금발을 흩날리며 검은색의 래시가드를 입은 윤채린이 계단에서 히죽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조금 뚱한 표정에 은수아가 내려오고 있었다.
은수아는 검은색의 비키니에 나풀거리는 반투명한 검은색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머리에는 화려한 꽃도 있었고.
“이야, 나 깜짝 놀랐다니까. 우리 수아, 벗고 보면 엄청 대단…….”
“아, 진짜!”
윤채린이 히죽거리며 말하자 은수아가 드물게 화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은수아도 프로필 상의 가슴 사이즈가 D였지. 평소에는 압박붕대 같은 걸로 가려서 벗기고 보면 은근 대단하다는 설정이 있었다.
근데 왜 가슴 압박붕대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우리 시우……신체는 좋구나.”
“얼굴도 대단하지.”
윤채린의 말에 피식 웃으며 받아치자 윤채린이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옆에서 은수아나 이지아, 임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 다들 기다리고 있으셨던 거에요?”
마지막에 갑자기 나한테 끌려왔던 아야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야네는 프릴 원피스 형태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저러니 진짜 공주님 같네.
“응, 이제 슬슬 나가자. 애들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린이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런 비장한 표정을 짓는 거야?”
일행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니 정한서가 씩 웃으면서 공을 들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자리를 잡아놨던 자리로 앉았다. 느긋하게 앉다가 저 멀리서 익숙한 느낌이 났다.
이 느낌은 저번에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기니 저 멀리서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그러다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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