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축제(3)
* * *
“그럼 저는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윤채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다윤이 윤채린을 보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잘 가.”
나도 같이 윤채린을 배웅해줬다.
“……근데 넌 왜 안가냐?”
“나는 뒷정리해야지. 그리고 다윤이 누나한테 배울 것도 있고. 저녁도 만들어주고.”
“저, 저녁까지 해준다고? 저 여기에서 저녁까지 먹고 가도 될까요?”
윤채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남다윤이 윤채린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찮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도 있잖아.”
“……쩝.”
윤채린이 입맛을 다시며 꾸벅 인사하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슬쩍 뚱한 표정을 짓는 남다윤을 바라봤다. 아까 윤채린이 물 묻히지 않겠다는 이상한 말을 한 뒤부터 저렇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시우도…나 같은 사람보단 어린애가 더 좋지? 한 살이라도 더 어린 게?”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린 여자가 좋기는 한데, 윤채린과 남다윤의 외모는 그리 차이 나는 게 아니었다. 무공을 익혀 탱탱한 피부에다가 탄력 있는 몸을 가진 남다윤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남다윤과 윤채린, 둘을 놓고 비교하자면, 그건 취향의 문제였으니까.
“아뇨, 저 채린이보다 누나 좋아하는데.”
“……거짓말.”
“진짠데.”
토라진 목소리가 조금은 화사해졌다.
나는 남다윤을 뒤에서 껴안았다.
남다윤의 몸이 멈칫했다.
“저 누나 좋아하는데.”
“거, 거짓말…다, 다른 남자들은 다 한 살이라도 어린애를…….”
“저 연상 취향인데요.”
“…….”
남다윤이 내 말에 진짜? 라는듯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남다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윤아, 사랑해.”
“…….”
“어라, 누나 괜찮아요? 누나?”
내가 사랑해를 말하자 남다윤이 완전히 굳었다. 내가 몇 번 누나라고 부르자 그제야 얼굴이 붉어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시우야.”
“네.”
“나 진짜 많이 참으려고 노력했거든…나, 진짜 진짜 노력했어. 시우랑 몸 섞은 후에 시우만 생각하면 몸이 항상 뜨거워져도 주말 생각하면서 참았는데.”
뭐지.
뭔가…뭔가 불안했다.
나는 남다윤의 눈을 살폈다. 눈 안에 하트 마크가 그려진 듯 나를 사랑스럽고……정열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다윤이 내 몸을 벽으로 밀쳤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츄읍, 누, 누나 바, 방안에서.”
“싫어.”
남다윤이 그렇게 말하며 내 상의를 그대로 찢어버렸다.
“시우가 누날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오늘은 절대 안 재울 거야.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내일 모래 일찍 학교에 가도 괜찮지? 누나가 잘 말해놓을께.”
아직…4시도 안 됐는데…?
그리고 나는 그날 천국에 갔다 왔다.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히어로 아카데미의 축제를 시자악~~~~하겠습니다~~~~!
학생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훈화로 시작되었다.
먼저, 축제를 위해 고생하신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있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훈화는 보통 따분하지만, 히어로 아카데미는 달랐다.
우선 교장의 외모가 흔히 말하는 눈이 멀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그녀가 대한민국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구국의 영웅 중 한 명이니까.
그래서인지 바깥에서 온 방송국 카메라들 대부분이 교장 선생님에게 향했다.
영웅에게 중요한 것은 많습니다.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목숨을 노리거나, 원한을 가진 영웅을 죽이기 위해 테러도 서슴지 않는 빌런들을 퇴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도시로 침입하여 시민들에게 위험을 가하는 괴수들을 퇴치하는 것 역시 중요하죠. 하지만 영웅들도 사람입니다. 쉴 때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무리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히어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쉬는 것도 영웅에겐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표를 위해서 쉴 때 쉬고, 싸울 때 열심히 싸우는 그런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재미있게 노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구국의 영웅. 요정족을 이끄시는 요정 여왕님의 한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굉장히 공감을 많이 하게 되는 좋은 훈화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아, 진짜 교장 선생님 훈화는 한 시간 동안 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레알. 늙다리 영감들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진짜 장난 아니야. 집중도 확 되고.”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들보다, 나는 빨리 가서 집에서 쉬고 싶었다.
남다윤에게 주말 동안 짜인 것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원기 회복에 좋은 것들을 많이 먹었음에도 그랬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특제 정력제까지 먹었음에도, 남다윤에게 모조리 빨렸다.
“괘, 괜찮니, 시우야?”
“……어. 괜찮아.”
윤승하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답했다. 윤승하가 생각보다 세심하고 예민해서 이런 거에 자주 상처받거나 했다.
대충 대답이라도 하는 날에는 자기가 뭐 잘못한 게 있나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냥 현자타임에 빠졌거나 윤승하의 변태적인 성벽에 환상이 좀 깨지는 정도였을 뿐인데.
“시우야, 정말 괜찮아? 안색이 진짜 창백해 보이는데…….”
어느새 다가온 임나연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저 멀리, 단상에서 요정 여왕이 눈을 번쩍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훈련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 어제 좀 무리를 했더니 좀 힘드네.”
그렇게 대꾸하니 윤승하와 임나연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지만,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남들 눈에 보기엔 나는 훈련광이었으니까.
그럼 이제부터 축제를 시작하겠습니다.
***
첫 번째는 축구였다.
축구 종목에는 한종우 패거리가 잔뜩 들어갔다. 왜냐하면 한종우가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운동장 근처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광성자의 아들인 한종우를 찍기 위해서 온 것도 있었고, 영웅 지망생들이 하는 축제는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밌기 때문이다.
한종우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축구공 위에 발을 올리고 그 주변에 패거리들이 그를 둘러싸고 각자 포즈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찍는 여자아이 한 명.
근데 그 포즈가 묘했다. 쟤 맹구단이었어?
한종우 파이팅!
잘생겼다 강한남!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축구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옛날에 봤던 소림축구 이상이었다.
빠른 애들은 100m를 4 초안에 주파하는 애들 있고, 다릿심이 뛰어난 애들은 골대에서 공을 찼는데 골을 넣을 정도였다.
콜라를 마시면서 구경하고 있던 와중에 임나연이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시우는 오늘 뭐 준비한 거 있어?”
“……준비?”
“응. 다른 애들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던데.”
임나연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하면 나도 하겠는데 여장은 좀…….
“열심히는 해볼게.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우울하게 말하자 임나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시우야, 나 장기자랑 때문에 준비할 게 있어서 이만 가볼게. 있다 봐.”
임나연이 슬쩍 일어나며 어디론가 향했다.
와아아아아!!!
크게 환호성이 일었다.
슬쩍 보니 한종우가 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하고 있었다. 근처 지나가는 판매상에게 팝콘 하나를 사고 축구를 구경하고 있을 때, 내 왼쪽 자리에 샤오메이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샤오메이가 부채를 쥐고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축제 기간 동안은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기에 그녀는 검은색의 챠파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 틈새로 맵시 있는 다리가 눈에 띄었다.
“네. 무슨 일로……?”
“저번에 주신 물건이 제 예상보다 너~무 반응이 좋아서요. 혹시 더 만들 수 없을까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재료도 재료지만 만드는 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리는 물건이라서……단기간에 많이 못 만드는 물건이에요.”
“진짜로요?”
샤오메이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받고 싶은 게 있는데.”
“어머, 받고 싶은 게 있으시면…혹시 제 마음?”
샤오메이가 웃으며 다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순간 혹했지만, 다행히 어제 한껏 짜인 덕분에 현자 타임 상태라 바로 거절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거요.”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은밀하게 말했다.
“블랙마켓 입장권이라던가.”
“……꽤 난감한 걸 주문하시네요.”
“제가 대신 많이 만들어드릴게요.”
“……콜. 이자 까치 쳐서 돌려 드릴게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시간 안 되시면 주식으로 주셔도 돼요.”
내 말에 샤오메이가 옅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준비는 잘하셨나요? 이번에 여장하신다던데. 여자애들이 엄청~기대하고 있더라고요.”
“…….”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인 장기자랑 대항전이 나왔다. 각 학생이 자신 있는 것들로 점수를 매겨서 하는 축제인데 보통 노래와 춤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윤승하의 여장을 시켰는지, 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모를 여장이라는 것이 추가되어 내가 여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여장에 관해서 준비를 거의 안 했다. 내가 대체 왜 여장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준비했지.”
히히, 하고 웃는 윤채린과 기대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윤승하가 보였다.
“이 언니가 우리 시아를 위해서 집에서 화장품들을 싹 쓸어왔다는 말씀.”
윤채린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왜 다 쓸어왔을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즐길 수도 없을 것 같지만, 피할 수도 없으니 나는 팔을 벌렸다.
그러자 윤승하랑 윤채린이 시시덕거리며 반 여자애들과 함께 나를 여장시켰고.
“……외모 뭐야.”
“와, 나 나름 외모에 자신 있었는데 시우를 보니 자신이 없어졌어.”
“꺅, 사진! 이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해!”
여학생들이 나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윤승하는 침을 삼키고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무슨 이상한 변태 플레이 같은걸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가 어울리는 미녀가 보였다. 키가 아주 컸지만, 비율이 압도적이어서 나름 봐줄 만 했다. 키 덕분에 여자로 안 보일까 생각했는데, 바뀐 외모는 그것조차도 커버해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우리 시아 꽃 따러 가는 거야? 채린이 언니랑 같이 갈까?”
“…….”
말없이 한숨을 쉬고 화장실로 향했다.
긴장했는지 화장실을 빠르게 찾다가 나는 문득 한 여성을 마주하게 되었다.
회색빛 머리카락과 메이드 복이 인상적인 여자. 요정족 여왕의 그림자이며, 오른팔인 그란데힐.
“…….”
그녀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동공이 느껴졌다.
“그란데힐?”
“……호, 혹시 시우님입니까?”
그란데힐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다. 그란데힐은 윤채린이 둘밖에 없는 GL 루트에 속하는 여성이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따른다. 상대방 여성도 윤채린을 좋아하는 동성애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그란데힐을 바라보았다. 첫사랑을 보듯, 사랑에 빠진듯한 표정을 하는 그란데힐을.
“…….”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