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축제(2)
* * *
“후, 귀여운자식. 멀리서나마 검주님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따라오더니.”
윤채린은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어깨가 하늘에 닿을 만큼 우쭐거렸다.
나는 윤채린을 잠깐 한심하게 보고는 벨을 눌렀다.
“야, 야. 잠깐만! 나 아직 준비 안 됐어!”
대체 뭐가 준비가 필요하단 것인지.
벨을 누르자 딩동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단정하게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빛의 단발머리. 호수를 연상시키는 푸른색의 깊은 눈이 나를 보더니 환하게 휘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 온다고 꽤 단정한 옷을 입었다. 하얀색의 블라우스에 정장용 검은색 치마.
날 보고 환하게 휘운 눈이 옆에 윤채린을 보더니, 순간 험악해졌다.
“시우야 옆에 있는 분은 누구셔?”
“뭐, 뭐야! 너 검주님을 알고 계셨어?
“옆에 있는 애는 반 친구인 윤채린이요. 얘 말로는 협회에서 다윤이 누나랑 대련권을 얻었다는데.”
“아, 얘가 걔야?”
남다윤이 지긋이 윤채린을 바라보았다.
“다윤이 누나는 주말마다 내 검을 봐주는 분이지.”
“다, 다윤이 누나? 그, 그것보다 트……검을 가르쳐 주신 분이 남다윤님이었구나! 어쩐지 검이 너무 정석적이더라!”
“반 친구?”
“누나, 여기 선물 사 왔어요. 누나한테 어울릴 것 같은 브로치.”
특별한 거 없는 수수한 브로치였다. 나비 모양의 브로치. 그런데 남다윤이 내 선물에 환하게 웃었다.
“고, 고마워.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남다윤이 쑥스러워하면서 가슴 쪽에 찼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었다.
옆에서 윤채린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내, 내 검주님이……?”
라는 둥의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여, 여기 저도 선물을 사 왔어요! 검주님한테 어울릴 것 같은 화장품이에요! 코발트색 립스틱인데, 이게 요즘 엄청나게 히트하는 상품이래요!”
“……그래, 고맙구나.”
나는 떨떠름해 하며 윤채린의 선물을 받는 남다윤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훈련할 거야?”
내가 윤채린에게 물었다.
“나? 나야 하면 좋지. 하, 하지만 그전에 집 좀 구경할 수 있을까요…? 제, 제가 진짜 검주님의 팬이거든요!”
“안방만 출입하지 않으면 나야 괜찮은데.”
“지, 진짜요? 호, 혹시 사진도 가능할까요?”
“응. 사진 찍을 거면 나중에 검사 맡고가. 혹시 민감한 것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넵, 감사합니다!”
윤채린이 신나하면서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찍기 시작했다.
“아앗! 이, 이건 검마가 들고 다니던 마검 페르헤? 이거 설마 진짜인가요?”
“아니, 모조품이야. 진짜는 협회에서 들고 갔거든. 페르헤는 너무 위험해서.”
“하긴……그건 일반인도 잘못 잡으면 대량학살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니까요. 사람의 피를 취해서 혈마술과 신체 능력치를 올리니, 잘못하면……헉, 저건 검마녀의 마령인???!”
“…그걸 알아봐? 검마녀는 괴수를 위주로 잡아서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하지만 검마녀는 괴수를 잡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죽이는걸 원하잖아요. 자신이 찜한 괴수를 다른 영웅들이나 헌터들이 잡으려 하면 그들을 죽이고 괴수를 사냥해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엄청 유명하죠.”
나는 남다윤이랑 윤채린이 의기투합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유심하게 보았다.
혹시나 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현재 내 특성은 남의 특성을 카피하는 능력이라고 알려졌지만, 남다윤은 다르다. 나랑 성행위를 하는 사람과 특성을 나누는 종류로 알고 있으니까.
특히나 나는 이지아의 능력과 임나연의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편이었다. 둘의 능력이 워낙 좋아서.
‘그리고 요즘 정령까지 계약했으니.’
윤채린은 눈치가 없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 귀의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만약 내 생활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 끔찍한 미래만이…….
‘솔직히 난 상관없을 것 같은데.’
나랑 관계를 맺는 여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혈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나는 근처에 소파에 앉아 계속 떠드는 윤채린과 남다윤을 보았다.
“뭐야, 우리 시아 이 언니가 검주님을 차지해서 기분 나빠서 계속 앉아있는 거야?”
“시아?”
“아, 시우 별명이에요. 제가 지어줬어요. 이번에 이시우가 우리 학교 축제에서 여장을 담당했는데, 이쁜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가 지어줬어요.”
“시우가 여장이라고?”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다윤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여장한다는데 좋게 볼 리가…….
남다윤이 핸드폰으로 어딘가로 전화했다.
“나 히어로 아카데미 축제가 열리는 17일에 스케줄 비울 거야. 알아서 말해줘. 뭐? 그때 대통령님과 만찬이 있다고? 그게 지금 중요해?”
중요한 일이다. 엄청 중요한 일이었다.
***
남다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뺀 다음, 우리는 훈련장으로 내려왔다.
“우와 정말 크네요. 재질도 엄청 좋고. 역시 검주님 정도 강해지려면 집에서도 항상 훈련해야 되는 거군요!”
윤채린이 저런 말을 하니까 굉장히 어색했다. 항상 자신감 넘치는 애가 저런 행동을 하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근데 넌 진짜 검주님이랑 계속 훈련하는 거야?”
“응.”
“……검도 직접 배운 거고?”
“어.”
“하……그런 건 이 언니한테 빨리빨리 말했어야지.”
“안 물어봤잖아.”
“……그걸 어떻게 알고 물어봐. 그, 그리고 내, 내가 저번에 했던 말 비밀로 해줄 수 있지?”
“한 번만 봐준다.”
“감사합니다, 언니.”
“말할까?”
“감사합니다, 오빠.”
“그래.”
윤채린과 콩트를 하고 있자니 뒤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남다윤을 바라보자 서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너무 내버려 뒀나. 근데 윤채린이 앞에 있을 때, 남다윤과 가까이 있는 건 이상하니까 어쩔 수 없다. 오늘 밤이나 내일 열심히 몸으로 달래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지니 밤이나 내일 노력해야지.
검을 들고 윤채린은 남다윤과 대련을 시작했다. 윤채린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몰라서 가늠해보기 위한 대련이었다.
“대충 어느 정도 수준이야?”
“중격은 넘을 것 같은데.”
“……쟤 이제 17살 아니야?”
“네. 근데 쟤가 좀 특별해요.”
“협회가 나한테 부탁한 이유를 알 것 같네.”
내 말에 남다윤이 윤채린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련이 시작되었다.
시작되자마자 윤채린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천마신결의 소수마공.
대련을 관람하는 나에게 으슬거릴 정도의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대단하네.”
남다윤이 짤막하게 감상을 내놓자, 윤채린이 헤벌쭉 웃으며 돌진했다.
남다윤에게 손을 뻗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손이 남다윤의 검에 부딪혔다.
까아앙!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다윤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윤채린이 공격했다. 주먹 쥔 왼손을 폈다. 손 마디마다 반으로 굽혔다.
천마신결
마룡격
용의 발톱같이 손에 날카로운 기가 응축되더니 윤채린이 휘두를 때마다 짐승이 할퀴고 간 흉터 같은 검은색의 기가 주변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파멸적인 양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남다윤이 차분하게 그것을 보더니 검을 휘둘렀다. 방어에서 공세로 넘어갔다. 그것을 보며 윤채린이 활짝 웃었다.
남다윤의 검이 은은한 빛을 뿜었다. 남다윤이 검을 한번 휘두르자, 실타래 같은 것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윽고 구름이 되었다. 은은한 빛의 구름. 그러나 파멸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구름과 검은색의 기가 충돌했다. 구름이 뭉게뭉게 덩치를 불리며 검은색의 기를 흘렸다.
극단적인 유?.
그것이 느릿하게, 윤채린에게 향했다.
윤채린을 그것을 보며,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하얀색의 빛과 검은색의 기가 엉퀴었다. 검과 손이 마주할 때 충격파가 퍼지며, 그것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둥그런 원형의 모양으로. 강제로 뭉쳐놓은 하얀 빛과 검은빛이 반발한다.
유능제강이라는 말이 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흘린다.
그러나 윤채린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윤채린의 삶과 기억은 강함으로 모든 것을 부수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역대 천마들의 기억.
그것을 간직하는 윤채린은 다른 사람들이 부드러움을 이기기 위해 다른 것을 배울 때, 그녀는 한 가지만을 연마했다.
압도적인 강함 앞에는 부드러움 따위는 소용이 없다.
윤채린이 모은 구체가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였다. 음의 기운과 양의 기운. 그것을 반발시켜서 만든 기술.
천마신결
오의
파천멸겁륜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기를 끌어올리며 긴장했다. 저건, 아직 미완성의 것이었다. 그저 기술로만 내놓은 물건. 여러 가지 단점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시전자조차도 해를 끼치는 것이었기에.
이것을 완성하는 것은 윤채린이 2학년에 올라야 가능했다.
하지만 상대는 남다윤이었다.
“후.”
남다윤이 조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남다윤을 바라보았다.
영웅들은 상격에 경지에 들면, 흔히 세상이 달라진다고 표현한다.
직업에 따라 다르지만, 무인들은 육체와 정신, 기를 합일하여 만들어진 경지에 이르면 중국에서는 절대의 경지라고 표현한다.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르는 경지. 이전의 경지에 이른 존재가 열 명이 덤벼도 웃으면서 싸울 수 있게 된다.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무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하나였다.
스스로가 정한 법?으로 세계를 바꾸는 경지.
천둔검법
여의신검
차르르르륵!
어검이 시야를 빼곡하게 채웠다.
천수로 가늠해보니 대충 숫자는 800자루 남짓. 그것들이 사방에서 윤채린에게 날라갔다. 어떤것은 쾌속하게, 어떤것은 부드럽게, 어떤것은 현란하게.
그리고 싸움이 끝났다.
***
“이야, 역시 검주님한테는 손도 못 대었네요.”
윤채린이 연무장 바닥에 벌러덩 누운 채 해맑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윤채린은 다치지 않았다. 무언가 벌어지기 전에 남다윤이 윤채린을 제압했었으니까.
남다윤은 윤채린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충 느껴지는 감정이 기대니까, 칭찬해달라는 건가. 아니면 호들갑 떨면서 멋있다고 칭찬해줘야 하나.
마치 30대 남성이 자신에게 관심 있는 여고생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뭔가 비유가 이상한데.’
아무튼 오늘 여기서 뭘 더하기는 그른 것 같다. 그걸 눈치챘는지, 윤채린의 동공이 떨리고 있었다.
“아, 죄송함다. 제가 중간부터 너무 흥분해서 날뛰어서…연무장을 좀 어지럽혔는데…….”
어지럽힌 정도가 아니었다.
“아, 괜찮아. 어차피 협회에서 지원받는 거라서.”
“아하. 그러면 다행이네요. 아무튼 시우야, 이 언니가 미안하게 됐다. 내가 내 특성 때문에 가끔 폭주를 하게 되거든.”
“괜찮아. 승하한테 들었어.”
나는 뒷정리를 대충하고서는 윤채린을 한 손으로 들고 거실까지 끌고 갔다.
“으어어, 땡큐!”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윤채린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점심인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앗, 그러네. 여기에서 뭐 시켜 먹게? 나 돈 없는데 나중에 임무같이 하는 거로 땜빵 될까?”
“……내가 할 거니까 걱정 마.”
“네가? 너 요리도 잘해? 하긴 머리가 좋으니까 잘하겠다.”
나는 요리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메뉴를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회복에는 역시 고기라는 생각에 고기 요리를 골랐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쉐프의 소스를 만들고 조리법을 배합하니 요리는 금방 완성되었다. 애초에 천수가 있으니 실패할 염려도 없었다. 맛을 보니 꽤 만족스러웠다.
“와, 미친. 진짜 맛있겠네.”
“승하가 말 안 했어? 나 요리 좀 한다는 거 못 들었어?”
“어. 나쁜 기……놈. 자기 혼자 맛있는 거 먹으려고 조용히 있었나 보네.”
윤채린이 양념 갈비 한 점을 집으며 말했다. 그리고 한 점 집어먹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시아야, 언니랑 결혼할래? 내가 평생 물 안 묻히게 해줄게.”
옆에서 남다윤이 살벌하게 노려보는것도 모르는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