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비틀림(4)
* * *
“앉아도 된다.”
나지막이 이야기했지만, 귓가에 또렷하게 들렸다. 자연스러운 울림. 티타니아의 특성을 떠올렸다.
고즈넉한 방안.
중앙에 소파와 의자 등에 30명가량 되는 학생들이 조심스레 앉았다.
나는 눈에 띄기 싫어서 구석 쪽으로 앉았다. 그러자 오른쪽에 윤승하가 왼쪽에 임나연과 이지아가 앉았다.
‘…….’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슬금슬금 들었다. 그란데힐이 내 쪽을 보며 소리를 내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
뭔가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요즘은 피임하고 다니니까, 괜찮긴 하다.
중간에 콘돔에 구멍을 뚫거나, 임신약을 먹는 척하고 몰래 버리는 것 때문에 기겁하기는 했지만.
“편히 앉아라. 그란데힐. 마실 거랑 주전부리 좀 내오려무나.”
“네, 여왕님.”
티타니아가 여상하게 말하자 그란데힐이 고개를 숙이고 다과를 가지러 가져갔다.
“얼마 전, 중국에서 빌런 한 명을 잡으려다가 빌런들이 집단으로 연합해서 중국 정부와 협회하고 크게 싸웠다.”
티타니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빌런 연합과 정부의 싸움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게 번졌지. 약 한 달간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갈 정도로 말이다.”
그 말에 중국 학생 일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렸다.
샤오메이가 살짝 찔러준 말로는 싸움이 길어진 이유가 정부에 빌런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공직자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빌런 연합에게 뇌물을 받은 이들이 빌런과 관련된 정보를 지웠다. 샤오메이가 이를 갈며 그자들을 대부분 축출할 거라 얘기했다.
“그 탓에 민간에는 정말 큰 피해가 있었다. 많은 건물이 무너졌지. 인명피해는 그래도 괜찮았다. 대부분 공허족들과 그들의 언데드 수하들이 막아주었거든.”
티타니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 말에서 묻어나온 아주 미약한 혐오의 감정이 있었다.
요정족은 자연에서 태어난 종족. 섭리를 거스르는 공허족을 혐오한다.
‘그래도 공허족 정도 되면 말은 통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교단’은 그런 것이 없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마왕의 부활.
마왕은 세계를 부수고, 악마의 영토로 삼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은 수없이 죽어 나간다.
마왕이 온전히 부활하고,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인간들은 ‘사육’되고 ‘가축’으로 전락한다.
그전에 본보기로, 대륙 하나가 날아가고 인류의 수가 100억에서 10억 아래로 떨어질 정도로 무차별한 학살이 진행된다.
‘그럴 리는 거의 없지만.’
어지간한 트롤러가 아니면 플레이어들은 어느 정도 정해진 ‘루트’를 타면 어지간하면 용사는 마왕을 쓰러트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재산적 피해가 무시무시했지. 중국이 자랑하는 북경 무림 학교도 덕분에 무너졌다. 어차피 협업으로 같이 활동하려 했던 겸, 그들을 이리로 부른 것이란다. 혹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있니?”
학생들이 머뭇거렸다.
특성으로 학생들의 감정들이 느껴졌다. 경외, 존경 등의 감정들이 느껴졌다.
감히 자신이 요정 여왕에게 질문할 수 있냐는 듯 머뭇거렸다.
“그럼 다들 바쁘기도 하니, 이만 해산할까?”
“네.”
내가 재빠르게 말하자, 주변에서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티타니아는 나를 귀엽다는 듯, 한번 보고 웃더니 우리를 해산시켰다.
“아차, 시우는 잠시 남고.”
“……?”
티타니아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의아해하며 일어나려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이 다 나가고, 티타니아가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느긋하게 그란데힐이 준 차의 냄새를 맡고, 한입 마셨다.
“긴장할 필요 없다. 잠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그녀가 고아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무엇을 물어보려는 걸까. 나는 아직 그녀의 신경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았는데.
‘혹시.’
비염이 문제인가. 나는 나와 계약한 정령을 떠올려 보았다.
심상찮은 혈통이기는 했다. 윤승하가 아껴주라는 말도 했었고. 자신과 계약하려는 계약자들 대부분 고만고만하다는 소리도 했었다.
아니면 다른 문제.
내가 너무 빌런들을 잘 찾아다녀서.
혹시 빌런측에 첩자라고 생각되어서인가?
‘음…….’
내 특성, 천의 가면으로 정보를 읽는 것을 막는 것은 알고 있다. 최유나가 나에게 그러했고, 요정 여왕도 나를 보자마자 드물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으니.
그렇다면 최악인데.
만약에 그녀가 무력행사를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물어보실 것이?”
나는 조금 긴장한 채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내 물음에 생긋 웃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그랬다. 다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초록빛이 물든 푸른색의 눈빛이었다. 세계수와 동화되어 세계 그 자체를 느끼고, ‘신위’를 얻었던 절대자의 눈빛.
“혹시 반려는 정했느냐? 여자가 주변에 많아서, 고민스럽긴 하겠지만, 혹시 마음에 끌리는 여성이 있느냐? 그렇다면 잠깐 귀띔만 해다오. 아니, 아니다.…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도 좋지. 그, 그래도 혹시 이어지면 누구와 이어졌는지 귀띔은 해줄 수 있느냐? 임나연과 이지아…솔직히 조금 궁금해서 그렇다. 헉…혹시 윤승하가 끌리느냐? 나, 남자와의 사랑이라니. 남사스럽긴 하지만…….”
“…….”
영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잠깐 내가 잘 못 들었나 싶을 만큼.
‘진짜 주책이네.’
나는 눈을 감았다.
티타니아.
파워 인플레가 어마어마하게 일어나는 후반부에서도 활약하는 인물이었다.
초중반에는 문자 그대로 치트키 그 자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만 있으면 어지간한 던전은 다 뚫어버릴 수 있고, 빌런들이 닥쳐도 그냥 티타니아 근처로 쫄래쫄래 도망치면 되니까.
중국에 거주하는 공허족의 왕이나 미국의 거주하는 용들의 왕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그들 전부 나설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이계에서 지구로 넘어오기 전, 마왕과 싸웠기 때문이다.
격렬한 상처를 입어 아직도 회복 중이라는 설정이 있기 때문이다.
용왕은 죽음 직전까지 갔었고, 티타니아는 등과 배를 가로지르는 끔찍한 흉터가 있다. 공허족은 오른쪽 팔과 왼 다리를 잃었다.
회복을 위하여 그녀는 항시 세계수 근처에 있어야 했다. 또 한, 세 명이 뭉쳐도 큰일이었다. 마왕의 심복, 거악巨?이라 불리는 이들 역시 만만찮기 때문이다.
마왕의 부활 날을 기대하며 서로를 견제하면서 행동하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면 거악 역시 힘을 합칠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카데미를 세웠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껏 지구에 와서 아카데미에 갇혀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정 여왕의 취미가 후원이지.’
웹 소설, 게임, 만화 등. 폭은 넓다.
그녀는 가상의 세계에서 세계를 바라보았다.
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요정족들만 만들 수 있는 차와 약초는 바깥에서 무수한 공급을 원하고 있다.
이뿐만은 아니다.
정령을 이용하여 만든 정령 무기는 밖에서 수억에서 수십억을 호가한다. 요정족 중, 땅족인 드워프가 만든 드워프제 무기랑 방어구는 돈이 없어서 못사는 게 아니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서 못살 정도로 비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몇 다리였지.’
아카데미에서만 임나연, 이지아가 있다.
김하린도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반의 아이들 모두 알고 있다. 반에서 가끔 나에게 살갑게 말을 거는 주제에 다른 남자들이 김하린에게 말을 걸면 차갑게 대하니까.
윤승하도 요즘 계속해서 나한테 달라붙고 있다. 여자 쪽에서는 그와 관련되어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데려온 김시연도 있고. 은수아도 꽤 가깝게 지냈다.
……이런 건 흥미로울 만 했다.
나는 티타니아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내가 역최면에 당했다거나 하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란데힐만 아는 모양인 것 같다.
‘나중에 손보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아직은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학업…좋지. 학생의 본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학업이니. 그러나 가끔은 숨을 돌려도 되지 않을까?”
“숨은 알아서 돌리고 있습니다.”
아니, 나의 경우는 알아서 돌려지는 게 아닌가.
“알아서 돌리고 있다고? 그, 그렇구나. 윤승하에게 마음이……..”
“제 취향은 여성입니다.”
“…….”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는 도망치듯 교장실을 나왔다.
***
게임 속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기말고사 실기는 랜덤이다.
랜덤 중에는 던전, 결투, 던전 탐사, 서바이벌 등등. 그 가짓수는 정말 다양하다.
“다음 주부터는 기말고사 실기가 시작된다. 다들 몸 관리 열심히 해라.”
강한자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를 많이 했다.
“넌 준비 잘했어?”
옆에서 김하린이 물어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랜덤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상위권은 갈 테니까.
“하린이, 넌?”
“나는 이번에 엄청 올라갈 것 같아. 필기는 시우가 많이 도와줘서 엄청나게 올랐으니까. 실기는 뭐…광익으로 어떻게든 될 것 같아.”
김하린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하긴 하린이는 다른 건 몰라도 능력만은 강하니까.”
정한서의 친구인 친구 A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친구 A의 말에 김하린이 냉담하게 말했다.
“고마워.”
“…….”
“그럼 실기는 기대해도 될까?”
“물론이지. 필기는 시우가 이끌어줬으니까, 실기에서는 나도 힘낼게!”
김하린이 화이팅 포즈를 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친구 A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기말고사가 정해졌다.
학생들끼리의 결투. 이번에는 외부 참관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지.’
상대를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마 윤승하, 윤채린, 은수아 저 세 명 중 한 명이 될 것 같은데.
“악! 왜 내가 아야네랑 싸우는데!”
“와, 진짜 상성 최악이네.”
“어? 근데 이번에 중국에 온 애들도 같이 시험 보네?”
“와, 중국 애랑 김하린이랑 싸우는 거야?”
중국 학생들이 있다고? 나는 의아해하며 결투 쪽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있네. 나는 내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찾을 필요 없다.”
약간 어색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샤오메이의 동생인 리 뭐시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상대는 나 리 타오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