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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72화 (72/298)

〈 72화 〉 윤승하

* * *

던전 실습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마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여기저기서 교수들이 던전으로 난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마인을 잡았다고?”

회색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인이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모르지만, 마도학 부문에서 인기 있는 강사였다. 강의도 잘 하는 데다가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은수아가 이솔렛이 죽은 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타다만 재 같은 것이 남아있었는데 사악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확실하군.”

교수가 유심히 그것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의 죽음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마인이 죽으면 시체는 저렇게 타다만 재를 남긴다. 그것도 불길함을 풍기는 가루 같은 것들을.

“이건 내가 보관하겠다. 너희가 가지기엔 너무 위험한 거든. ”

교수가 품에서 손수건 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것이 커지며 재를 한 번에 감싸더니 작은 묶어진 주머니처럼 만들어졌다.

저 재들은 보통 요정족들에 의해 정화될 것이다.

“안 들킨 것 같지?”

“들켜도 뭐라 하지 않을걸.”

은수아의 말에 적당히 받아쳤다. 은수아는 내 말에 씩­웃으면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빛을 잃은 일각수의 껍질과 이솔렛이 들고 있던 아티팩트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어떻게 나눌까? 혹시 필요한 물건 있어?”

“나는 필요한 게 없는데.”

탐나는 게 별로 없었다. 마법사가 아닌 무인인 내가 대지의 묵주나 화령의 팔찌로 공격하는 것보다 내가 공격하는 게 파괴력 면에서는 더 세니까.

다양한 속성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양한 속성을 필요로 하는 던전은 은수아랑 윤승하를 데리고 가니 문제도 없다.

일각수의 껍질은 굉장히 탐나지만…저렇게까지 색을 잃었으니 쓰기도 힘들었다. 다시 재충전하려면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나도 탐나는 건 별로 없는데. 하린이 넌 어때?”

“……나?”

갑작스레 김하린한테 넘어갔다.

“응, 마지막에 도주하는 마인을 잡았잖아. 너 아니었으면 아마 피해자가 나왔을걸.”

내가 덧붙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잡을라 하면 잡을 수는 있었겠지만, 꽤 골치 아팠을 거다. 중간에 다른 학생들이라도 만나면 학생들이 안전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던 노릇이었고.

“그럼 저걸로 할게.”

대지의 묵주를 가리켰다. 좋은 선택이었다. 은수아가 대지의 묵주를 김하린에게 주고, 나에게 일각수의 껍질을 넘겨주었다.

“이거 받아. 너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어, 고맙다.”

떨떠름해 하면서 껍질을 받았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씩하고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아티팩트 쓴 거 비밀로 해줘라.”

“그 변하는 무기?”

“어.”

나는 혹시나 해서 말했다. 다들 눈치가 있으면 말 안 하겠지만, 아무래도 은수아에게 그걸 기대는 건 좀 힘들었다.

“알았어.”

“그리고 이따가 교수님들에게 말할 때…”

“오케이.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지?”

“알았어.”

장로를 쉽게 족치기 위해 나랑 은수아랑 김하린은 조금 말을 맞췄다. 김하린도 대지의 묵주를 얻은 것과 내 호감을 살려고 열심히 장단을 맞추었다.

그 뒤로 우리는 던전을 나섰다.

***

나랑 은수아 김하린은 마인을 잡았다는 일 때문에 교수들에게 여기저기 불려갔다. 다른 건 아니고, 그냥 마인에 대한 일이었다.

“전 자색의 마녀 이솔렛이었다고? 그래도 다행이네, 걘 마법 부수는 건 잘했지만, 성취는 그냥 그랬거든. 그래도 강함으로 따지자면 위에서 세는 게 더 빠른 마법사인데 잘 해결했구나.”

말과는 다르게 송라희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덕분에 큰 사고가 나지 않았어. 다른 교수들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이번 평가는 미루지만, 그래도 너희는 점수가 많이 나갈 거야.”

송라희가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꼬고는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너무 커서 상아탑주 님에게도 보고가 올라갈 거야. 사태가 사태인지라 다들 입막음하려고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할거고, 피해자도 없으니 사회에는 퍼지지는 않겠지만……다들 입단속 좀 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것은 아니야. 어느 정도 보상이 있을 거야.”

“그리고 이번 건에 대해서 따로 할 말이 있는데요.”

“뭔데?”

“아까 이솔렛과 싸우면서 이솔렛이 묘한 말을 했었거든요. 저희를 죽이면 자기는 다시 상아탑에 복귀할 수 있다고.”

“……뭐?”

나랑 은수아는 던전에서 말을 맞추었던 것을 이야기했다.

“그때는 상황이 다급해서 데릭 교수님한테는 말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이상하더라고요. 저를 암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상아탑의 복귀를 노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

“상아탑의 장로급 이상인가.”

송라희의 눈이 찌푸려졌다. 송라희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진짜 뒷방 늙은이 새끼들이 주제 파악을 존나 못하면서 욕심은 드럽게 쳐 많네, 씨발.”

작게 중얼거렸지만, 민감한 내 귀에는 꽤 잘 들어오는 대사였다.

송라희가 잠깐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정리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상아탑에서 색깔을 받았다고 해도 하위의 색이거든. 아마도 나선 사람들은 사대 원소의 색 중 하나인 적색과 갈색일 텐데…일단 상아탑주 님에게 보고는 내가 해둘게 혹시 더 할 말은 있니?”

송라희의 말에 내가 살짝 손을 들었다.

“혹시 보상은 저희가 택할 수 있나요?”

“글쎄 잘 모르겠네. 내가 주는 게 아니라서. 아마 교감님이나 교장님이 고르실걸.”

교장 선생님이면 대박이고 교감이라면 꽝이었다.

교감은 쩨쩨하니까.

“그럼 더 할 말 없지?”

“네,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하면서 나왔다. 굳이 밉보이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다름이 아니라 마인이 대놓고 나타났다는 뜻은 히어로 아카데미에도 첩자 같은 것이 이미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야근 확정이라는 소리였다.

***

교수들에게 추궁당하고 송라희 교수에게 시정 청취까지 당한 우리를 어두운 하늘이 반겨줬다.

단련실도 문을 닫아서 오늘은 훈련하기도 글렀다. 굳이 하자면 할 수는 있지만 효율도 잘 안 나와서 오늘 하루도 쉬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근처에 배스킨라빈스로 들어가서 한 통을 큰 것으로 샀다. 내가 좋아하는 민트 초코와 엄마는 외계인을 꾹꾹 눌러 담았다.

‘오랜만에 야식도 먹을까.’

쉬는 김에 푹 쉬어야지. 사실 야식이라는 말도 이상했다. 이미 시간은 8시.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배달 앱에서 평점 좋은 순으로 고른 다음 족발을 하나 시켰다.

서민의 음식을 가장한 귀족 음식. 메뉴 몇 개를 추가하니 5만 원이 넘었다.

윤승하가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하고 나도 좋아하기는 했지만 비싸긴 비쌌다.

어쨌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기숙사에 들어가니 때마침 수건으로 몸을 가린 윤승하가 샤워실에서 나왔다.

‘……어?’

빠르게 평온의 가면을 써서 태연한 척을 연기했다.

윤승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잠깐 바라본 체로 굳어 있었다.

여리여리한 하얀 피부. 가냘픈 몸.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가 샤워하고 나면 가리는 수건의 모양이 달랐다. 수건으로 몸을 통째로 가린 모습이 보였다.……윤승하는 역시 여자였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아니, 근데 왜 저런 차림인 거야? 그러다가 윤승하의 취향이 떠올렸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실컷 목욕하고 얇은 옷차림으로 방에서 뒹구는 희한하기 그지 없는 취향이.

“버버버, 벌썻 와, 왔구나. 교, 교수님들과 하는 며, 면담은 끄끝났어? 어, 엄청 느, 늦게 올 듯이 이, 이야기하더니 어, 엄청 빠, 빨리 왔네.”

고민하던 찰나에 윤승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왔지. 송라희 교수님이랑 얘기하고 아이스크림 사 왔는데도 좀 빨리 왔네. 네가 좋아하는 맛이 뭔지 몰라서 아무거나 골랐는데, 체리 좋아해?”

“아, 아이스크림? 나, 나도 좋아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좋아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얼굴이 굉장히 빨개졌다.

“배고파서 족발도 시켰어. 혹시 족발 좋아해? 시키다 보니까 좀 많이 시켰는데 같이 먹을래?”

“어, 엄청 조, 좋아하지!”

내 말에 맞장구치면서 태연한 척을 하지만 윤승하의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그럼 난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지아나 임나연처럼 큰 가슴에 글래머를 좋아하지만……윤승하를 보니 머리에 피가 쏠리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가히 취향마저도 바꾸는 미美였다.

나는 진정시키기 위해서 TV를 틀었다. 마침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내 심장이 이상해…분명 너는 남자인데,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네가 다른 남자를 보면 가슴이 아파. 아무래도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 네가 남자든 뭐든…상관없어. 나랑 사귀자, 윤승하.

……남장여자가 주인공인 드라마였다. 심지어 이름이 윤승하였다. 나랑 윤승하는 그대로 굳었다. 나는 재빠르게 채널을 돌렸다. 다행히 뉴스였다. 뉴스면 안심이지.

­오늘 새벽,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피해자는 윤 모 씨며 그녀는 생계를 위해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남장을 하여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쁜 남자인 척하면서 남성들에게 돈을 받았었는데요. 그러다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충 남장한 여자가 보추짓을 하며 돈을 벌다가 여자였다는 사실이 들켜서 팬에게 칼에 찔려 중환자실로 가게 되었다는 뉴스가 뜨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되었다.

남장여자라는 드라마가 얼마 없는 데다가 하필 이름이 윤승하이며, 뉴스를 틀었더니 남장을 하여 돈을 빨아먹던 스트리머 윤모 씨가 칼에 찔리는 뉴스가 나오는 게? 아니 남장을 할꺼면 여자들 돈을 먹지 왜 남자들 돈을 빼먹은거야?

아니, 나올 수 있다고 쳐도 내가 TV를 틀었을 때 연속해서 나오는 게….

“…….”

“…….”

윤승하는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멈춘 상태였다. 수건으로 그대로 몸통만을 가린 채, 갈아입을 옷을 화장실에 들고 가기 전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요, 요즘 이상한 사람들이 마, 많네.”

“그러게.”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쌌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되지.

“그, 그러고 보니 가, 같은 남자끼리인데!”

그때 갑자기 윤승하가 거의 소리 지르듯 이야기했다.

고개를 돌리자 수건을 획 던진 윤승하가 보였다.

그러자 밋밋하게 약간 부풀어 오른 가슴이 보였다. 흔히 말하는 AAA컵. 윤승하는 남자보다 작은 가슴의 소유자였다. 얼굴이 빨개진 체, 눈이 초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팬티는 입고 있었다. 남자들이 흔히 입는 트렁크가 아니라 하얀색의 삼각팬티였다.

“오, 옷을 가, 가, 갈아입는데 화, 화장실에서 갈아이, 입는 것도 이, 이상하지?”

그렇게 말하며 울상짓는 표정을 지으며 하늘색의 반소매를 입었다. 바지는 검은색의 반바지.

변명하는 말이 혹시 자기를 여장남자로 의심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것 같은데……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몰랐어도 윤승하가 벗어 던진 수건을 보고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겠는데, 같은 남자끼리라도 화장실에서 갈아입는 경우도 있었다.

“…….”

“…….”

그리고 묘한 분위기가 우리를 감쌌다.

족발이 배달올 때까지 계속.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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