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암투(3)
* * *
나는 빠르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윤승하는 어느새 씻고 왔는지 촉촉한 머릿결을 자랑하며 윤채린과 있었다. 우리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주변에 누가 다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윤채린이 자기 키만 한 대검을 들고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나는 그녀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보았다. 게임 속과 똑같은 대검이었다.
“왜? 신기하냐. 이 가녀린 팔뚝으로 이런 검을 드는 게?”
“…….”
나는 그녀의 말을 적당히 무시하며 윤채린의 검을 생각했다. 파천검무. 그것의 특징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검을 들었다.
“대련을 빙자한 과외니까, 나는 최대한 방어만 할게. 열심히 덤벼봐.”
윤채린이 오연하게 말했다.
“그럼 다들 준비됐지?”
“응.”
“어.”
“시작!”
윤승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돌격했다. 윤채린이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대검을 휘둘렀다. 둔중한 움직임. 무형의 기같은것이 나를 서서히 옭아매는 것을 느꼈다.
후웅!
검이 바람을 가르며 나에게 향했다. 피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슬쩍 패링을 응용해서 검을 맞대었다. 정면 승부는 하지 않는다. 비스듬히 세워서 튕기는 느낌으로.
그러나 검이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지 않았다. 윤채린의 압도적인 근력과 기교 탓이었다. 슬슬 패링이 안 먹힐 때도 되었지.
‘아예 쓸모 없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힘을 적당히 흘릴 수 있었다. 만약 이 기술이 없었다면 나와 윤채린의 싸움은 한합만에 끝났을거다.
윤채린의 근력은 나보다 족히 배는 높으니까. 감각도 나보다 날카롭고, 속도 역시 내 속도를 가볍게 웃돈다. 마력 양은 말할 필요도 없고. 본래라면 싸움조차 성립하기 힘들지만…내가 윤채린과 싸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기교.
후웅! 후웅!
검을 휘두르며 내 공간을 좁혀갔다. 무형의 기가 공간을 좁혀왔다. 몸의 움직임이 처음부터 조금 ‘둔해’졌다. 그녀가 지닌 파천검무의 특징이었다.
무형의 기로 상대를 압박하여 디 버프를 걸어 움직임을 제한시킨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내 특성이 어느 정도 해소해 주니까. 정신적 능력이었다면 아예 안 걸릴 수도 있었지만.
챙!
검으로 나를 짓이기려는 검을 비스듬히 쳐내며 흘린다.
검을 겨룰수록 그녀가 나에게 가르쳐주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잡기??.
다르게 말하자면 요령이었다. 무기를 어떻게 더 쉽고,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요령.
“흡!”
속도를 높인다. 몸속의 마력을 팽창시키듯 돌렸다. 음과 양의 마나가 격렬하게 부딪치며 순간적으로 마력이 솟았다.
음양체의 능력 중 하나. 음의 마나와 양의 마나를 순간적으로 부딪쳐 거기서 나오는 반발력으로 신체 능력을 부스트 할 수 있다.
아주 조금. 윤채린보다 아주 조금 느리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근력은 기교로 메꾼다. 속도는 얼추 비슷하다.
눈에 힘을 주었다. 내 공격을 막는 윤채린의 기술을 훔친다. 윤채린이 천마신결을 쓴다면 순식간에 결판이 나겠지만, 이것은 가르침을 주는 대련이다. 천마신결을 쓸 수 없다.
윤채린의 표정을 보았다. 여유로운 표정이 점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팔찌를 이용해 검을 집어넣고, 아공간에서 창을 꺼냈다. 검은 제법 배웠다. 남다윤도 있고.
이번엔 창이다. 창을 내질렀다.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는 창을 윤채린이 대검으로 막았다.
탕탕탕탕!
찌르고, 찌르고, 찔렀다. 찌르면서 영웅들이 창을 사용하면서 이해가 안 되었던 동작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가 희대의 재능 충이라는 것은 아니다. 천수의 활용과 무언가 배울 때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가면의 활용이었다.
“이, 이 괴물 같은…!”
윤채린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윤채린이 보여주는 잡기들을 훔쳐야 했으니까. 검으로 창을 상대하는 법, 발의 움직임, 몸의 자세, 관절의 움직임,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 방법 등등
대련을 하면서 조금씩 밀리면서도 윤채린은 자기가 내뱉은 말을 어기지 않았다. 어떻게 싸움을 편하게 할지에 대해서 그녀는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재밌네.’
윤채린의 과외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재밌기도 했었고. 창을 한 번 더 내질렀다.
그 순간 윤채린의 손이 새하얗게 발광했다.
나는 좀 당황했다. 저건 천마신결이었다. 그것도 상위권에 해당하는 소수마공. 방어만 한다고 하지 않았나?
천마신결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뇌령을 자극했다. 뇌령이 보랏빛의 번개를 토해냈다.
파지직!
보랏빛의 뇌광이 창날에 씌워졌다. 섬섬옥수 같은 새하얀 손과 보랏빛의 뇌광이 부딪쳤다. 그리고.
창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나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윤채린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돼서 그랬어.”
시간? 나는 기숙사 끝에 걸려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짜로 곧 등교해야 할 시간이었네.
“재밌었나 보네. 시우, 네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
윤승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웃고 있다고 내가? 윤승하의 말에 얼굴을 살짝 만졌다. 진짜로 입가가 씰룩이고 있었다. 멍하니 굳어서 서 있자, 윤채린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런 재능 충 새끼! 그걸 한 번에 거의 다 가져갈 줄은 몰랐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눈빛을 보내려다가 참았다. 뭐가 됐든 그녀는 지금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준 스승이 아닌가. 물론 무력도 무섭기도 했다.
“씻을래?”
“나도나도.”
윤승하가 물었다. 윤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씻는다고? 여기서? 순간 멍했다가,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승하가 약식으로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고 나와 윤채린을 씻겨줬다.
***
아침은 학생들이 북적거리는 복도지만 오늘따라 조금 한산했다.
“오늘따라 묘하게 한산하네.”
“그러게.”
실기 성적은 떨어지지만, 필기 성적은 뛰어나, 임나연 조에 운 좋게 속하게 된 시몬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뭐,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킁킁.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냄새를 맡으며 감탄했다.
그렇게 시야 끝에서 세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환한 금발과 은발. 그사이에 낀 검은색의 소년. 세 명의 소년·소녀가 교복을 입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와, 쟤낸 언제봐도 그림이네.”
당당하게 걷는 금발의 소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소년과 살짝 냉정해 보이는 소년이 보였다.
상아탑의 후계자를 제치고 수석과 차석을 차지한 윤승하와 윤채린이었다. 그리고 필기 만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점수를 가지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계속해서 강해져, 결국 한종우까지 이긴 이시우.
시몬은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과 한 조인 이설이 그들을 몽롱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시야의 끝이 이시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씨발.’
내심 마음이 있던 여자가 저런 표정을 보니 기분이 뭐 같았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윤채린과 윤승하는 질투조차 나지 않았지만, 이시우는 질투가 났다. 날 때부터 잘난 얼굴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가 될 거라 평가받는 두뇌.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이대로라면 문제없이 상격까지 올라갈 거라 평가되는 무력까지.
하나라도 있으면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날 때까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지만, 그는 그 세 가지를 모두 가졌다. 내심 성적으로 그를 앞질렀었던 시몬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다행이라면 시몬은 자기 주제를 알고 있었다.
임나연과 이지아가 내심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소년이다. 거기다가 학년 수석과 차석인 윤 쌍둥이와도 친분이 깊어 보인다. 괜히 어쭙잖게 질투에 눈이 멀어 헛짓한다면 한국에서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
“와, 진짜 시우는 엄청나게 잘 생겼다. 시우는 나중에 아이돌같은거 해주면 안 되나?”
“아이돌? 쟤 내는 영웅으로 활약하고 광고만 해도 평생 먹고 살 돈은 그냥 마련할걸.”
이설의 말에 탁한 금발에 햇빛에 살짝 탄 갈색피부를 가진 남성이 끼어들었다. 정한서의 친구였다. 여기저기 친한 척을 자주 하는 애였다.……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설에게 집적거리는 소년이기도 했다.
“그, 그런가?”
“그러고 보니 설아, 저번에 약속했던 거 어때?”
“어? 그거 농담 아니었어?”
“에이~난 설이같이 귀여운 애한테는 진심이라고.”
정한서의 친구 A가 설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몬은 당황해하며 이설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했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시몬은 무언가 뱃속을 쿡쿡 찌르는 것을 느꼈다. 친구 A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것이 느껴졌다.
“조심해. 앞 좀 보고.”
살짝 나른한 목소리. 후광이 비추는듯한 얼굴이 보였다. 이시우였다.
“미, 미안해.”
시몬의 사과에 이시우는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이설이 옆에 있는데.
‘아씨, 가오 상하게.’
시몬은 황급히 옆을 바라보았다. 이설이 몽롱한 표정으로, 눈에 하트를 띄운 것 같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이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 시우, 옆에 차석이랑 수석 아니야? 인맥 장난 아니네~.”
친구 A가 이시우를 보며 뭐라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시우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몬은 눈이 떨렸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나를 쳐다보는 거지?
“아직인가. 하긴, 애쉬가 일찍 죽었으니.”
이시우가 자신을 유심하게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 거지.
“저, 저기 시, 시우야.”
“어…………이설이지?”
“어,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설이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이시우랑 이것저것 얘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녀가 다른 남자를 몽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갈색빛의 머리카락에 청순가련한 얼굴과 반대되는 말도 안 되는 큰 가슴을 가진 소녀와 분홍빛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가슴 짱 커…근데 저 둘이 왜?’
시몬은 궁금증이 도졌다. 저 둘이 어딜 함께 가는 거지? 시몬이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저 ‘능력만을 좋게 타고난’ 김하린과 황금 세대 중에서도 마법에 한하자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이지아였으니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쩌면, 자신이 히어로 아카데미에 온 목적을 실행할 수 있겠다.
시몬은 궁금증에 거리를 슬쩍 벌리며 이지아와 김하린이 들어간 반으로 향했다.
품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귀마개같이 생긴 아티팩트를 쳐다보았다. 히어로 아카데미에는 거르고 걸러서 뛰어난 학생들을 모집한다. 그 학생들의 약점을 ‘우연히’ 잡게 되면 기업에 팔아 그것으로 거금을 당길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몬은 항상 그것을 품속에 지니고 있었다.
시몬은 이지아와 김하린이 들어간 방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했다.
그리고 약 10분 후, 시몬은 밖으로 향했다.
시몬의 앞에 이설이 왔다.
“시몬! 뭐해! 빨리 가자, 게리가 찾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이설은 시몬의 안색을 보고 당황했다.
“왜, 왜 이리 하얘? 괘, 괜찮아? 당장 보건소에 갈까? 아니다, 당장 게리한테 몸 안 좋다고 얘기하고 병원으로 가자.”
이설은 당황해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병원이라는 소리에 시몬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품속에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것을 들키면 자신의 인생은 끝이다.
“괘,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어.”
툭.
그렇게 말하며 반으로 돌아가려다가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귀마개같이 생긴 아티팩트. 그것을 황급히 주우려 했지만 주울 수 없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시몬을 구속하고 있었다.
“재밌네.”
갈색 머리를 한 청순가련한 소녀가 웃음을 띠며 시몬 앞에 나타났다.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