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암투(2)
* * *
“꺅, 지아야!”
임나연이 살갑게 이지아를 안았다. 이지아도 살포시 웃으며 임나연을 안았다. 결국, 둘은 같은 조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조보다 하위권을 더 많이 받아야겠지만, 그래도 한자리 등수 두 명이 하는 것보다는 페널티가 적고 뛰어난 전사와 마법사는 어디를 가서든 조합을 짜기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면 조원을 이렇게 정하면 될까요?”
중상위권의 성적을 가진 게리가 임나연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깍듯하게 물었다. 종이에는 학생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같은 학생이라기보다는 부하 직원이 상사를 대하는 태도였지만, 그의 태도에 주변은 아무런 의아함도 가지지 않았다.
임나연의 배경 때문이었다. 히어로 아카데미가 ‘평등’을 추구하는 학교라지만, 신분의 차이가 너무 컸다. 초강대국인 나라에서 재계 1위를 차지한 회장의 외동딸은 그러한 의미였다.
그렇기에 게리는 성적순으로 뽑으면서도 임나연에게 순종적인 인물들로만 구성했다. 대부분 전위와 후위인 자신. 전위는 임나연에게 맡기고 중위는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뛰어난 마법사인 이지아, 후위는 중상위권 궁수인 자신.
이것만으로도 상위권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구성하면 남은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최하위권 순위의 인물들로 구성해야 되지만, 게리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실기보다는 필기가 뛰어난 인물들로 구성했다.
“응, 그렇게 하자.”
임나연이 종이를 한차례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게리는 맘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임나연의 기준에 합격한 것 같다.
“그러면 바로 제출하고 오겠습니다.”
게리가 깍듯하게 임나연에게 인사하고 하위권 두 명을 데리고 교무실로 향했다. 임나연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아냐, 게리네 부모님이 나연이 회사에 다녀서 그래.”
임나연이 한마디만 하면 그날로 게리네 부모님은 그대로 실직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저리 조심하는 것이고.
“그러면 어쩔 수 없고.”
임나연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시우가 있는 방향이었다. 임나연의 눈이 잠깐 몽롱하게 풀렸다. 누가 봐도 한눈에 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눈빛. 그 모습에 이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나연아.’
이지아는 잠시 죄책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임나연은 모르겠지만……이시우는 자신을 좋아한다.
그것은 최면으로 확인한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확인하였을 때.
이지아는 그때 고백하려 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시우한테는 미안하지만…….’
이시우랑 사귀면 정말로 행복할 거다. 잠깐의 데이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뜨고, 세상이 다르게 보였으니까. 지금도 저번처럼 카페에 가서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무언가를 같이 먹고 싶고, 영화에 가서 달달한 멜로 영화를 보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이시우라는 사람과 사귄다면 자신은 이시우만을 생각할 거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좀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 이시우랑 사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적이었다. 마도 명가인 본가에서 자신을 압박해도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힘.
다행이라기는 뭐하지만……이지아의 아버지는 ‘마법사’로서 자신을 증명한다면 큰 걸림돌은 아니다. 인생을 가문과 명예에 치중한 마법사 가문이 만들어낸 무언가다. 이지아의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문이 명예롭게 성장만 하는 것에 인생을 내걸은 망령이니까.
‘이대로 반 학기만 지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심장에서 느껴지는 힘을 조용히 느끼며 생각했다. 이지아는 자신의 언니와 자신의 사촌을 떠올렸다. 마법사적 재능 하나
재능이 없단 이유로 경멸 어린 눈으로 보는 언니. 자신의 몸을 보며 음흉한 시선을 하던 사촌.
그리고 이지아는 고개를 돌렸다. 분홍빛의 머리카락의 소녀가 웃으며 이시우를 치켜세우는 광경이 보였다.
이지아는 아까 전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역시 시우는 엄청 성실하네~.
그럼 시우가 이번 학기에는 힘드니까, 방학 때 나도 데려다줄 수 있어?
남자를 추켜세우면서 은근슬쩍 여행 이야기에 자기 자신도 끼었다.
‘완전 여우네. 해보자는 건가?’
한두 번 해본 짓이 아닌 자연스러운 화법이었다.
임나연이랑 있으면서,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지아는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려다가 이시우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쿡쿡 찌르는 악의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옛날 미모 하나로 나라를 무너트렸다고 전해지는 달기의 외모가 저러할까. 남녀 가리지 않고 홀릴 것 같은 압도적인 외모. 저 외모를 바라보면 어지간한 화조차도 바로 진정할 수 있을 거다.
시우의 얼굴을 보니 조금 진정됐다. 이지아는 김하린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외모. 옅은 화장기의 얼굴과 분홍빛으로 반들거리는 입술.
아담한 체형의 가녀리면서도 화려한 외모.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그녀에게 보였던 음침한 인상은 이제 없었다. 화려한 외모로 바뀐 김하린은 현재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청순가련함이 자신이라면, 김하린은 화려함이니까.
‘시우가 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최면을 걸었을 때, 속마음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나를 좋아한다는 말.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떴다. 조용히 그것을 억누르며, 이지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강해져야 했다.
이지아가 이룬 성취에 만족하였을 때. 그때는. 잠시 상상을 하곤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 행복했다. 이시우와 손을 잡고 길을 걷는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할것 같다.
‘그리고 나연이도 시우랑 이어줘야지.’
사랑하는 남자를 공유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렸지만……그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명가에서 자란 이지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부감이 덜했다. 능력 있는 남자라면 부인을 여럿 들여도 괜찮은 시대이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이지아랑 임나연의 배경을 합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임나연에게는 미안하지만…이시우나 이지아에게는 임나연의 존재는 필요했다. 대부분은 얼씬도 하지 못할 압도적인 배경. 그 배경으로 이시우에게 꼬리칠 여자들을 미연에 방지한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이시우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파는 것조차 방지할 수 있다.
미래를 생각했다. 아직은.
아직은 참을 수 있다.
고개를 돌려서 분홍빛 머리의 소녀를 담았다.
자신의 남자를 보며 아주 환하게 웃는 소녀를.
***
오전 5시.
평소처럼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옆구리에 무언가 폭신거리는 감촉이 있음을 느꼈다.
‘뭐지.’
고개를 돌리니 보랏빛의 고양이가 몸을 말고 옆구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쳐다보자 야옹하고 얕게 울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보랏빛의 번개가 파직거리며 둥근 구체를 만들었다.
그것을 보며 기쁜 듯 그르릉하고 울고서 그것을 받아먹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등을 쓰다듬어주자 보라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일어났어?”
고운 미성에 잠깐 몸이 멈칫했다. 핑크빛 바탕에 여러 가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을 입은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윤승하가 보였다.
방금 일어났지만, 떡진 머리가 아니었다. 찰랑거리는 은발. 새하얀 피부에 호숫가를 연상시키는 푸른색의 눈.
“응.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아, 혹시 내가 깨웠어?”
“아니, 오늘은 트레이닝이 있거든.”
그렇게 말하곤 옅게 웃었다.
“트레이닝?”
“응, 채린이가 몸 좀 단련해준다고 해서. 그런데 어디 가?”
지갑하고 아공간 팔찌를 챙기니 윤승하가 물었다.
“잠깐 강한자 교수님한테 볼일이 있어서.”
“그래?”
모자는 쓸까. 거울을 보니 고민이 사라졌다.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머리가 떡이 안 져서. 윤승하 만큼은 아니지만, 떡은 지지 않았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로 가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슬슬 아공간도 얻었으니, 무기들을 받을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아공간 팔찌도 등록할 겸.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아티팩트의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종류의 것은 교수들한테 허가를 받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했다.
기숙사 문을 넘어, 널따란 운동장으로 나오니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 강한남을 이끌고 뜀 걸음을 하는 강한자가 보였다.
‘하필 오늘인가.’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랜덤으로 저 열혈 교수가 나와서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훈련을 같이 하며 도와줄 때가 많다.
이러면 끝날 때까지 같이 훈련해야 할 것 같은데. 조금 고민하다가 내게로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윤채린이었다.
“아침부터 어디가? 복장을 보니 트레이닝하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강한자 교수님한테 무기를 좀 받을 생각이었는데. 그냥 트레이닝 해야 될 것 같네.”
“무기? 그러고 보니 넌 창과 검, 단검을 썼었나.”
윤채린이 잠깐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한테 배워볼래?”
“……뭘?”
“내 무공은 안되고…아, 안된다는 게 가르쳐주기 싫단 건 아니야. 내 천마신결은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익힐 수 없는 무공이거든.”
알고 있다.
천마신결이 일반적인 무공들과는 틀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천마신결.
그것은 윤채린의 근간을 다루는 무공이기에 그녀를 제외하면 누구도 익힐 수 조차 없는 무공……아니, ‘권능’이니까.
“하지만 다른 건 가르쳐 줄 수 있지. 칼, 도, 활, 도끼는 물론이고 편과 주먹부터 발을 다루는 법까지. 난 그 모든 걸 지금의 너보다는 자신 있거든.”
윤채린이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한판 붙자고 하려고 하는 건가.’
는 아닐 거다.
아직 나는 뇌령신공의 오의를 바깥에 내놓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걸 썼으면 이미 윤채린이 한판 뜨자고 엉겨 붙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를 키워서 먹겠다는 건가.’
아마 자신을 이길 가능성이 보이는 나를 키워서 제대로 한판 붙어보고 싶다는 것 일터다.
그렇지만 조금 고민되었다. 윤채린은 사람을 굴리는 것에 능하다. 내년에 1학년에 입학하게 될 신입생 중에 윤채린이 몇 수 가르쳐주는 인물이 나타난다.
‘공주’라는 칭호를 가진 인물인데 몇 수를 가르쳐주는 것만 해도 정말 악랄하게 굴렸다. 임나연의 부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유나가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인다면 윤채린은 그 극한마저 넘어서 정신론을 주장하며 더 혹독하게 굴린다.
‘실제로도 효과가 있고.’
실제로 효과가 없다면, 윤채린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이 어처구니없는 훈련은 꽤 효과가 좋았다.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면 그것마저 딛고 일어선다. 그것이 바로 윤채린의 지론은 정말 먹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재능이 있을까. 재능이 없는 자가 윤채린의 훈련을 받는다면 그저 고꾸라질 뿐인데.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유아독존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채린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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