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동상이몽(6)
* * *
워프를 이용해서 부산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건만 주변에 사람들이 은근히 있었다. 살짝 산발된 머리를 보니 밤을 새운듯하다. 주변의 여자들이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반짝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슬쩍 들춰 맸다. 던전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데다가 윤승하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는 입장이라 돈이 없었기에 물건을 챙기는 건 내가 하기로 했다.
포션 위주로 챙겨서 생각보다 돈이 많이 나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말 아침인데도 여기저기 노점이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밥도 먹지 못했다.
배도 출출한데, 여기서 밥이나 먹을까.
“밥이나 먹을래?”
“배고파?”
“가면 배고프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윤승하를 보았다. 윤승하는 잠깐 고민하는 듯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뭘 먹을까.”
이른 아침이라 가게 문을 연 곳이 별로 없었다. 먹을만한 게 맥모닝이나, 버거킹, 국밥, 김밥천국. 윤승하는 국밥을 싫어하니 여기서 국밥은 제외하고. 빵 종류를 좋아하니 햄버거 가게가 좋겠지.
“버거킹이나 맥모닝 먹을래?”
“맥모닝?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맥모닝 먹자.”
“먹어본 적 없어?”
“응, 용돈 받으며 살고 있으니까. 학교 다닐 때는 엄마가 밥해줬고, 기숙사에서는 아침이 꼬박꼬박 나오니까.”
“그래? 그럼 한번 먹어보자. 내가 사줄게. 네 취향에 맞을 거야.”
여자처럼 아침에는 빵 종류 같은 걸 좋아하는 윤승하니까 취향에 맞겠지.
맥도날드로 발걸음을 옮기니 시선이 더욱 늘었다.
와, 미친. 야야, 방금 지나간 남자 둘 봤냐?
어? 어어. 나 방금 눈멀뻔했잖아. 무슨 얼굴에서 후광이…….
쟤내들 걔내 맞지? 히어로 아카데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이야, 우리도 유명인사가 됐네.”
“그러게… 아카데미 학생들은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다 네가 잘 생겨서 그렇지.”
내 말에 윤승하가 조금 쓰게 웃었다.
“그것보다는 임팩트 아닐까? 시우가 종우와 싸울 때 엄청 임팩트 있었었지.”
“나보다는 네가 더 화려했지. 아시다시피 나는 학교에 입학했을 때, 실기는 거의 꼴찌였으니까. 그런데 3개월도 안 돼서 한종우를 이겨서 그렇지, 화려함으로 따지면 윤승하나 윤채린, 은수아가 최고였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니 어느새 맥도날드에 도착했다. 맥도날드에 도착해서 디럭스 브렉퍼스트를 세트로 두 개 시켰다.
카드로 계산하고 메뉴를 받고 구석에 앉아 자리를 잡으니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금발이 찰랑거리는 붉은 홍옥을 가진 소녀, 윤채린. 그리고 그 옆에 웬 느끼하게 생긴 소년도 있었다. 양쪽의 귀와 입술에 피어싱을 박은 불량해 보이는 소년. 반소매 너머에 팔뚝에 십자 형태의 문신도 있었다.
딱 봐도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
‘겁화.’
내가 탐냈던 능력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가 느끼한 눈빛으로 윤채린을 보고 있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보았다.
그가 내 쪽을 바라보자 윤채린도 나를 바라보았다.
“어, 뭐야. 너희 왜 여기 있어? 승하 넌, 약속이 있다면서……아항, 그런 거구나.”
윤채린이 나랑 윤승하를 보더니 다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거 맞는 것 같은데~. 이 누님한테까지 숨기고 말이야, 짜식.”
윤채린이 윤승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흐흐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이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
느릿한 중저음의 목소리. 겁화, 한지율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악수하며 적당히 인사했다.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독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한지율 선배 맞으시죠? 2학년의 마법사로 유명하신 선배라 기억하고 있어요.”
“어, 맞아. 너도 엄청 유명하던데.”
한지율이 느릿하게 말했다.
“나도 결투를 보았을 때 엄청 놀랐어. 이시우, 네가 머리 좋은 건 알았지만, 실기는 그냥 상위권이라고 들었거든. 기교가 굉장히 특출나지만, 신체 능력이 낮아서… 네가 종우를 이길 줄 몰랐는데.”
“뭐, 운이 좋았죠.”
적당히 얼버무리자, 도대체 어떻게 이겼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강한 호기심과 호의가 느껴졌다. 나는 한지율을 바라보며 그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한지율은 한종우의 사촌이다.
무협지나 판타지에서 흔히 나오는 고위 가문처럼 한씨 가문은 직계와 방계로 나뉜다. 그 모든 것은 광성자의 고집 때문이다. 자신의 핏줄만이 자신을 이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물.
‘더 정확히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한지율은 한종우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증오하면 증오했지.
“근데 채린이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나? 나는 잠깐 선배랑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이 있다고 부산까지 와?”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윤채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윤승하가 남자 주인공이라면, 윤채린은 여자 주인공.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 역시 공략 대상이 있다. …이따금 어처구니없게 여자도 공략하지만, 보통은 남자들이 꼬인다. 한지율 역시 그녀의 공략 대상에 들어가 있다.
‘집착하는 선배 포지션이었지.’
윤채린은 한지율을 동정하며 한지율을 도와 한씨 가문의 적폐를 나름 완화한다. 그 과정에서 한지율은 윤채린에게 반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남자들이 윤채린에게 관심을 보일 때 독사같이 콱, 물어뜯으며 견제한다.
자세하게는 모른다. 윤채린을 플레이할 때 호쾌해서 재밌긴 했는데, 남자들이 꼬이는 게 퍽 싫어서 플레이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한 80시간 정도밖에. 아마 천마신결과 관련된 일 때문에 왔는데 그게 사실 허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 그것 때문이야?”
“……응. 뭐, 그렇지. 허탕만 쳤어.”
윤승하가 그 화법을 펼치고 윤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쓸쓸하게 웃었다.
“어제부터 싸돌아다녔다가 마인만 잡았지 뭐야.”
“그럴 것 같았어.”
윤승하와 윤채린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한지율이 내게 다가왔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탐색하는가 싶더니, 슬쩍 말했다.
“혹시 윤채린에게 관심 있어?”
관심이야 많다. 그녀는 세상을 구할 여자니까. 마왕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세계에서 두 명뿐인 존재.
“아, 그러고 보니 없겠구나. 너는 임가의 임나연이랑 사귀니까.”
“……제가요?”
“아니야?”
내가 되묻자 윤승하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윤채린은 히죽거리며 윤승하를 툭툭 치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잘해봐라고 말한 것 같은데.
“…….”
어쩌면. 윤승하는.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의심했었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는 팬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썰어서 입에 넣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선배도 잘 가세요. 월요일에 보자.”
***
나와 윤승하는 빠르게 산을 올랐다.
산 근처에는 마물들이 가득했다. 판타지에서나 볼법한 고블린, 가끔 오크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여기서 오크 부락도 생겼었지.
트롤도 이따금 보였는데 트롤들은 비싼 개체라서 발견되자마자 여기저기서 헌터들이나 영웅들이 도살해갔다.
그렇게 몬스터들을 피하고 산길을 걸었다.
‘여긴 정말 익숙하네.’
다른 던전들은 보았을 때, 생각이 났다면 여기는 초입부터 익숙했다. 실제와 게임하고 조금 달랐지만, 덕분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산 중턱에 나무와 풀들이 우거진 길. 조그마한 틈새 같은 것이 보였다.
“여기야.”
“확실히 발견하기 힘들어 보이네.”
“아, 이거 받아둬.”
“이건 뭔데?”
“도핑약이야 모든 능력치 올려주고, 마나 감응력을 올려줘. 혹시 모르니까 위험하면 바로써. 부작용은 마나 탈진이니까 위급할 때만 써.”
“……알았어. 고마워. 잘 쓸게.”
윤승하가 느릿하게 답했다.
그리고는 꽃의 정령과 나무의 정령을 소환했다. 틈새를 벌리고 그곳으로 들어간 다음, 틈새를 다시 덩굴과 식물들로 덮었다.
틈새는 비좁았지만, 점점 더 넓어지더니 이내 터널만 한 크기가 되었다.
내가 앞장섰다. 윤승하는 내 뒤에. 원작보다 무예가 낮고, 정령술이 강한 윤승하가 내 뒤에서 정령들을 소환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검을 하나 뽑았다.
스릉. 서늘한 소리가 들렸다.
10분 즈음 앞으로 나아갔을까.
저 앞에서 불빛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마력을 눈에 집중하니 보였다. 작은 도마뱀 같은 것이 불에 휩싸여 있었다. 화령火?이었다.
“내가 처리할게.”
내가 나서기도 전에 윤승하가 나섰다. 허공에서 물이 뭉쳐지더니 그것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기다란 채찍으로 변하더니 그것이 휘둘러졌다.
***
화령을 기점으로 수많은 정령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령, 지령, 풍령 등 사대 원소를 기초로 한 몬스터들. 약한 몬스터들은 윤승하가 주로 맡았다. 나는 조금 강한 놈들을 맡았다.
예를 들어 눈앞에 있는 타오르는 늑대인간 같은 놈들.
파지직!
몸속의 뇌령들이 번개를 토해냈다. 보랏빛의 번개가 검을 따라 뇌광光을 만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한 번에 마력을 폭발하시키듯 돌진했다.
뇌광을 두른 검으로 플레임 웨어울프의 목을 노렸다. 타오르는 손으로 검을 막았다. 서걱. 웨어울프의 흉악한 손이 허공으로 솟았다.
번쩍. 뇌광이 번뜩였다. 좀 더 빠르게. 연격을 이룰수록 더 빠른 쾌검으로 전환된다. 손목부터 시작해서 팔, 목이 허공에 떴다.
그러나 이놈들은 이걸로 죽지 않는다. 그들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코어를 부수지 않는 이상 몸이 다시 자라난다. 재빠르게 목부터, 사타구니까지. 몸을 양단했다. 양단된 몸에서 타오르는 심장이 보였다.
콰직.
손에 보랏빛의 뇌광을 두르고 그것을 으깨듯, 부쉈다. 그러자 타오르는 늑대인간의 형상이 파스스 하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역시 대단하네.”
윤승하가 감탄하며 나에게 걸어왔다.
“이정도야 뭘.”
나는 쓰게 웃으면서 답했다. 윤승하는 바로 전에까지 화수풍지의 령들을 10마리가량 잡고 오는 길이었다.
괴물들을 처리하고 쭉 걸어가니 거대한 동공이 보였다. 동공의 끝에는 돌벽이 보였다. 막다른 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기믹으로 퍼즐을 풀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돌벽으로 향했다. 돌벽 근처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돌들이 있었고, 돌벽에는 기이한 문자가 쓰여 있었다. 이계의 언어로 이루어진 문자들. 나는 정보열람으로 그것을 해석했다.
바람에 사로잡힌 망령.
만년설에 갇힌 정령.
세 개의 하늘을 떠받드는 자.
게임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필 이계의 언어로 이루어진 기믹인가.”
윤승하가 골치 아프다는 듯 말했다. 이계의 언어로 이루어진 기믹들은 대체로 까다롭다. 언어만 알면 간단하게 풀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그 언어를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것만 존재하는 던전이 존재하는데, 그곳도 빨리 클리어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긴 나오려면 아직 꽤 걸리니까.
그래도 게임을 플레이 할 때는 그림이 그려진 돌들이 7개도 안 돼서 풀기 편했는데 현실에서는 수백 개나 되었다. 달갑지 않은 현실 보정이네.
‘내가 아니었으면 시간 엄청나게 잡아먹었겠네.’
나는 주위에 떨어진 돌들을 헤집어서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진 돌들을 찾아내었다.
“독수리가 그려진 돌이랑 고래가 그려진 돌, 만세를 하는 인간이 그려진 돌을 찾음 돼.”
“……바로 안 거야?”
“응.”
“……진짜 대단하구나. 이 계의 언어도 알고.”
윤승하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반짝거렸다.
사실 치트키를 쓰고 있는 건데. 나는 괜스레 부담스러워서 윤승하를 재촉했다.
윤승하가 정령들을 움직이자 돌들을 1분도 걸리지 않고서 찾았다. 역시 정령술은 편해 보이네.
그것들을 차례대로 돌문에 비어있는 홈에 끼워 맞추자, 돌문이 반응했다.
드르륵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돌아가더니 돌문이 아래로 내려가며, 통로가 드러났다. 나는 돌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도핑약를 꺼내고 그것을 입에 넣었다.
통로 너머, 왕좌 같은 곳에서 형형색색의 정령들로 이루어진 기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보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