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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61화 (61/298)

〈 61화 〉 동상이몽(4)

* * *

김시연과 밥을 먹고 훈련실로 들어왔다.

훈련실에는 이미 여러 학생이 들어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정말 부지런하네.’

나는 저 때 뭐 했더라. 고등학교에서 시험 기간에만 공부하고, 시험이 끝난 한 달 정도는 친구들과 피시방으로 달려갔던 것 같은데.

슬쩍 학생들을 보고 있었는데 임나연이 보였다.

임나연이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임나연의 비서 격인 최유나도 나를 보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따라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엄청…달라지셨네요.”

최유나가 감탄하듯이 내 육체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번 경기 때 멀리서나마 바라보기는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다르긴 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최유나가 내 팔뚝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팔뚝을 조물조물하며 호오, 호오 거리며 감탄했다. 옆에서 임나연이 그것을 부러운듯한 눈빛으로 힐끔거렸다.

“굉장히…좋은 영약들을 섭취하셨군요.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체력이 굉장히 올랐어요. 이 정도면 좀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해도 되겠군요.”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퍽, 무서웠다.

“오늘도 임나연 님의 훈련실을 이용하러 오셨나요?”

“……네, 신세 좀 지고 싶어서.”

“하긴 이 정도 육체라면 어지간한 기구로는 훈련도 힘들겠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임나연의 훈련실로 이끌었다. 임나연도 자연스럽게.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 거야?”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남자답게 생긴 호감형의 얼굴. 강한남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나랑시시우가사귄다고?”

임나연이 볼을 붉게 물들며 말했다. 옆의 최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최유나였다. 여기서 가장 성숙하니 가장 냉정하게…….

“두 분이 결혼을 약조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었구나.

그러고 보니 묘하게 임나연을 대하듯 나에게 깍듯하게 대하던 최유나였다. 다 이유가 있었다.

“난 이지아랑 사귀는 줄 알았는데.”

“양다리 아니었어?”

강한남 주변의 남자애들이 속닥거리며 얘기했다.

내 사회적 인식은 이대로 괜찮은 건가.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기숙사로 가는 길에 미리 준비해둔 피자 두 판을 들고 갔다. 19인치에다가 토핑을 많이 올려놓아서, 자주 이용하는 피자 가게였다.

기숙사 방에서는 보랏빛의 고양이를 껴안고 오이 맛 사이다를 훌쩍거리는 윤승하가 보였다. 슬쩍 옆을 보니 이미 3캔의 깡통들이 옆에 놓여 있었다.

“오늘도 훈련하고 온 거야?”

“응, 그 보라색 고양이는 정령이야?”

푸른빛을 띠는 보라색의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중력을 다루며 나중에는 인력과 척력까지 다루는 사기 정령. 윤승하가 주력으로 다루는 정령 중 하나였다.

“응. 이름은 보라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윤승하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야옹­하고 보라가 울었다.

“피자 사 왔는데 먹을래?”

“피자? 어떤 거 사 왔는데.”

윤승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피자 두 판 중 하나를 꺼냈다.

“하와이안 피잔데. 내 것 사는 김에 한 판 더 시켰어.”

“진짜? 나, 이거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윤승하가 반색했다. 솔직히 나로서도 하와이안 피자는 별로 내 돈으로 시켜 먹기는 좀 그랬는데, 취향이라니 이해해줘야지.

내가 고른 피자는 페페로니였다. 피자는 역시 페페로니지.

그렇게 피자 한 조각을 먹고 있을 때, 보라가 폴짝­하고 뛰더니 나한테 뛰어올랐다. 가볍게 점프해 어깨를 타고 머리 위로 올라왔다. 신기하게도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보라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그러게…….”

나는 정령의 특징을 떠올렸다. 정령 친화력이 있으면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든가, 혹은 내 마력이 마음에 들었다거나.

정령력은 없다. 그건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 안됐을 때, 확인해본 결과니까. 그렇다면.

‘후자인가.’

음양체의 마력이 마음에 든 건가. 나는 마나를 가느다랗게 뽑았다. 보랏빛이 마나가 파직거리며 손에서 실처럼 기다랗게 뽑혔다. 머리 위로 올리자 보라가 만족스럽다는 듯, 야옹 하고 울며 그것을 먹었다.

“마나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렇게 말하며 윤승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라가 내 마나를 냠냠거렸다. 내가 바닥에 앉으니, 보라가 내 무릎을 꾹꾹 누르고는 그곳에 앉았다.

나는 잠시 보라를 바라보았다. 나는 개가 더 좋은데 고양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승하야.”

“왜?”

내가 부르는 소리에 피자를 우물거리며 윤승하가 나를 바라보았다.

“주말에 시간 있어?”

“주말에? 응, 금, 토, 일 다 괜찮아.”

“나랑 어디 좀 갈래? 둘이서.”

“……둘이서?”

윤승하의 반응이 굼떴다. 조금 묘한 반응이었다. 왜지? 나는 떨떠름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둘이서 던전 좀 가자.”

“……던전?”

“응, 거기가 정령들이 많이 있거든. 나 혼자로는 좀 힘들 것 같아서.”

“혼자서 힘들다고? 저번에 종우랑 싸울 때 봤는데, 시우가 힘들면 나나 채린이도 힘들걸. 그렇게 강한데.”

윤승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에 쓰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단기 결전에 특화되어있거든.”

뇌령신공도 그쪽에 특화되어있고.

음양체 역시 한순간 출력을 내뿜는 데에 특화되어있다. 던전의 보스 하나만 있다면 문제는 없지만, 장기전이나 몬스터들이 많은 던전은 힘들었다.

앞으로 갈 던전은 당연히 후자이며, 보상도 괜찮은 곳이다.

“그래서 장기전은 좀 불리해.”

“몬스터들이 많이 나오는 던전이겠네.”

“응, 그래서 너한테 가자고 한 거야.”

내 말에 윤승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나에 대해서 잘 아는구나.”

윤승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야 당연했다. 내가 엔딩을 본 것만 해도 수십번이었다. 윤승하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부터 시작해서 그가 가지게 될 능력, 미래 모든 걸 알고 있다.

……이야기하다 보니까 굉장히 변태가 된 것 같은데……나는 윤승하에게 별 마음은 없다.

“뭐, 너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 다른 애들은 어느 정도 소문이 나 있었지만, 너희들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나서 말이야."

내 말에 윤승하가 순간 흠칫했다.

“던전 정보는 확실한 거야?”

“응. 확실해.”

윤승하가 말을 돌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던전은 빌런들에 의해 3학년 1학기 입학식 때 공략된다. 그러니 미리 공략해야하는 던전 중 하나였다. 정령검은 빌런들에 손에 의해 어둠의 정령왕을 사역하는 존재에게 넘어가는 물건이니까.

“내가 아는 사람한테 받은 거거든.”

“아는 사람이라면…혹시 검주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다윤을 계속해서 팔아먹는 것도 좀 그랬지만……가장 확실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에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윤승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해.”

윤승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승하가 잠깐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윤승하와 악수를 하며 생각했다.

‘윤채린도 좀 도와줄 때가 됐는데.’

아직은 별로 친하지 않으니까 좀 그랬다. 무엇보다도 윤채린은 나랑 성향이 잘 맞지 않으니까.

순수한 악동에다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만…사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랑에 진심인 여자다.

‘윤채린의 배드 엔딩 중에 남캐와 경쟁을 두는 히로인의 배를 칼로 가를 전적이 있을 정도로.’

피가 묻은 채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일러스트는 호불호를 심하게 탔었다. 밤에 보면 조금 섬뜩할 정도로.

그러나 순애 앤딩으로 넘어가면 그녀는 달랐다. 누구보다도 로맨티스트인 여자.

‘로맨티스트가 맞나?’

그 정도면 정신병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극단적이지만……뭐, 커뮤니티에서도 그렇고 자기도 그렇다니 로맨티스트가 맞겠……지?

우웅.

그때 핸드폰 소리가 들렸다. 전화가 왔나. 핸드폰 이름을 확인하다가 나는 잠깐 굳었다.

김하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

김하린.

윤승하로 플레이하면 어떤 루트를 따르느냐에 따라 중반부 악역으로 될 가능성이 있는 주연이었다.

윤채린은 둘 중 하나였다. 윤채린한테 수작을 부리는 걸 걸려서 윤채린한테 뒤지던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빌런이 되던가.

좋아하는 것은 이쁘고 아름다운 것.

보석을 선물해주면 호감도가 올라간다. 집이 가난한 터라 돈 되는 일은 은근 밝히며 선함을 싫어한다.

나는 김하린의 정보를 되새기며 복도를 걸었다. 부실의 한 쪽에 김하린이 창틀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한쪽을 보았다.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분홍빛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얼핏 보면 청순해 보이지만 한쪽에서 보면 묘한 요염함이 그녀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내가 미쳤지. 고등학생보고 요염함이라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옅게 홍조가 띄었다. 입술은 평소보다 좀 더 진한 핑크빛이었다.

침을 삼켰다. 화장까지 해서 진짜 이뻐 보였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김하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야 전화까지 하고.”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김하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부탁? 무슨 부탁인데.”

내 말에 김하린이 상체를 살짝 숙였다.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려는 듯,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사실 이거 비밀인데……다음 주부터 수업 내용이 조금 바뀌거든. 조로 활동한 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반이 100명이니까 4, 5명 정도로 나누지 않을까?”

정확하게는 5명으로 나누고 20개의 조로 활동한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귀 밝은 애가 있어서.”

호동이구만.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이 있었다. 실연의 상처로 이때 즈음 김호동의 해킹 실력이 쭉쭉 올라갔다고.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나랑 같은 조가 되고 싶다는 거야?”

“응.”

김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녀가 건넨 제안은 굉장히 좋았다. 조를 짤 때 상위권들로만 구성하면 온갖 페널티를 받아서 성적순으로 고루고루 받아야 된다.

순위권이 낮으면서 여차하면 최상위권과 견주는 전투력을 가진 김하린이 조에 들어온다면 환영할만했다.

‘중간에 마인이랑도 싸우니까.’

이득밖에 없지만, 조금 꺼림직했다. 임나연이랑 내가 사귀는 사이라고 착각하면서 자기를 좋아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동기는 임나연에 대한 질투니까.

임나연 앞에서 김하린하고 눈빛을 주고받고 애정행각을 벌인다라.

‘그럼 임나연이 질투하려나.’

그리고 김하린과 임나연의 관계도를 동시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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