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동상이몽(2)
* * *
기숙사에 저편에서 정령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불을 날름거리는 불꽃의 도마뱀. 이족보행을 하는 보랏빛의 개구리. 형체 없는 드래곤 같은 무언가. 사방으로 번지려는 폭발을 정령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정령 군주가 날뛰는 건가.”
“…….”
몇 번을 들어도 오그라드는 이름이었다.
슬쩍 정령들이 날뛰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나로 강화된 시야가 윤승하가 하얀색의 정령체를 연신 공격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면 별문제 없겠네.
다만 문제라면 기숙사가 망가지는 것들인데……솔직히 말하자면 내 알바는 아니었다.
나는 이 이벤트를 알고 미리 안전한 층에 자리를 잡았었으니까. 주역들도 저기와는 별 상관없고.
“야야, 저기 봐. 정령들이 날뛴다.”
“아악! 저기 내 방인데!”
……여기저기서 얼굴만 아는 이들이 절규하는 것을 빼면 말이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윤승하는 소리音의 정령을 머지않아 제압하고 그것을 사역할 것이다. 그것을 느꼈는지 은수아가 옆에서 역시 정령 군주. 라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상아탑주 님에게는 그냥 네가 보고 느낀 대로 이야기해줘.”
“……정말?”
이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은수아. 나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탑주는 세상을 위해서 움직이는 선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까. 물론 권력과 힘이 강한 사람들이 으래 그렇듯이 그는 중반부에 죽는다.
상아탑의 원로들과 그를 시기하는 색깔들이 그를 시기해서 죽인다……거나 하는 암울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그는 이제 너무 늙어 자연사로 죽는 것일 뿐이니까.
나는 은수아를 바라보았다. 상아탑주가 늦게 발굴한 만큼 은수아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상아탑주는 은수아를 엄하게 키웠다. 그 반대급부로 은수아는 자라나면서 자유를 동경하며, 불량스러움을 고수했다.
윗단추를 풀어 가슴골이 살짝 보이는 패션. 마이의 소매 부분을 허리춤에 묶어 둔, 복장.……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는 잘 하지 않고 일본에서 하는 패션이지만, 애니에 영향을 많이 받은 그녀로서는 저게 이상하지 않을 거다.
“그럼 난 갈게.”
은수아를 뒤로하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
파지지지직!
보랏빛의 번개가 사방으로 튀었다. 엿가락처럼 시간이 늘어나며 주변의 배경이 사진으로 찍은 듯,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진짜 더럽게 마나를 잡아먹는 스킬이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마나 통이 꽤 커졌는데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극도로 짧았다. 약 10초 정도만을 유지했을 뿐인데, 마나가 벌써 반 토막이 나버렸다.
마나가 절반으로 줄어들어서 상태를 해제했다. 번개가 멎었다.
“으그그그극.”
몸에 부하를 주는 스킬이라 몸 전체가 뻐근했다. 기지개를 켜자 몸 전체가 풀리는 감각을 잠깐 만끽하였다.
몸을 풀다가 핸드폰에 문자가 온 것을 깨달았다.
샤오메이에게서 온 문자였다.
[요청하신 물건 전부 보냈어요]
나는 통장 잔액을 힐끔 보았다. 전생에는 정말 상상하지 못할 큰돈들을 만졌는데, 어느새 텅 빈 통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도 언제 한번 채워 넣어야 하는데…….
한숨을 쉬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스텟복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남은 잔액을 확인했다. 억 단위의 돈이 증발해 있었고, 십만 원 언저리의 돈이 남아 있었다.
‘돈 나올 구석을 좀 찾아야겠는데.’
정보를 팔까. 나름대로 이름값이 있어서 슬슬 사줄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지금 밝혀지지 않은 몬스터가 또 누구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에 맞춰둔 알람이 울렸다.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기숙사가 모종의 사고가 일어나 대부분 못쓰게 되어 급한 대로 잠시동안 공동으로 숙소를 이용하겠다는 문자였다.
윤승하는 누가 될까.
원작에서는 정한서랑 같은 기숙사로 배정되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자리를 정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은 한산했다. 시험이 끝난 여파였다. 다들 어디로 놀러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훈련장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휴식도 중요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한식란에 갔다. 잡채와 부대찌개. 장조림과 김치를 고르고 구석진 곳에서 학식을 먹다가 내 근처로 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김하린이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의 홍조가 드리우며 내 근처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같이 먹어도 될까?”
나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하린이 환하게 웃으며 내 앞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깨작깨작.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김하린이 내게 건넨 최면의 종류를 떠올렸다.
나와 임나연이 사귀고 있고 착각하고 임나연에게서 나를 빼앗으려고 한 종류의 최면. 당연하게도 김하린은 나에게 애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마 동기도 단순하겠지. 그냥 임나연이 꼴 보기 싫어서. 나는 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될지 생각해 보았다.
“시우, 요즘 엄청 유명하더라.”
“그래?”
“응. 필기시험 만점이라서 안 그래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이번에 한종우랑 대련하면서 여러 특성을 썼잖아. 그래서 다들 시우 특성이 뭔지 생각하다가……한 가지 특성을 떠올렸거든.”
분홍빛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나는 김하린의 물음에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될지 고민하는 거였다. 거짓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고…….
“아, 미안. 내가 너무 실례했지. 특성 같은 것은 원래, 비밀인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콘 셀러리를 한 스푼 뜨며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 기숙사가 반쯤 반파된 거 들었어?”
“어. 하린이 넌 괜찮아?”
“응, 내 방은 피해가 없더라.”
내 말에 김하린이 히히 웃으며 답했다.
“기숙사가 반쯤 반파된 거 윤승하가 정령이 공격하는 거 막으려고 그랬다고 들었는데.”
“응. 기숙사 옥상에서 다른 학생이 정령을 소환하려다가 마법진을 개조했는데, 중위의 정령이 나타나서 그거 막으려고 했다더라……. 그 정령을 막다가 기숙사가 반쯤 반파되었대. 그래서 당분간 기숙사를 공동으로 쓰겠다고 했더라.”
“응, 나도 들었어. 남는 인원은 2학년이나 3학년 학생들이랑 같이 쓴다고 했나?”
“잘 모르겠네. 애들이 말하는 거로 2인이 아니라 3인, 4인까지 넣을 수 있다고도 해서…….”
3, 4인이라. 친구들끼리라면 재밌기도 하겠지만…….
‘난 친구가 없는데.’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겠지만. 게임에서 2인실로 배정받게 된다. 그 와중에 윤채린은 2학년 기숙사로 가게 되고, 거기서 2학년 수석이랑 마찰을 빚고 그와 싸워서 천마데스킥을 각성하게 된다.
이후의 정사를 생각하며
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기숙사에서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 문자를 보니 기숙사 인원이 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숙사는 2인실로 되는 모양이네.”
“응. 나는……은수아랑 같이 쓰네.”
저런 은수아는 생긴 거에 비해 진짜 곱게 자라서 방 정리를 할 줄 모르는데. 나는 김하린을 잠시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고 누구와 공동으로 쓰게 될지를 확인했다. 한종우 파벌만 아니면 좋겠는데. 한종우 본인도 껄끄러웠다.
정한서 정도만 되도 훌륭한 룸메이트인데.
불안함과 두려움을 안고 문자를 확인했다.
[이시우 학생은 윤승하 학생과 배정되었습니다]
주인공이었다.
***
“…….”
설마 나랑 같이 생활할 줄 몰랐는데. 나는 내 기숙사 문 앞에서 캐리어를 들고 있는 윤승하를 보았다.
“안녕.”
윤승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어색해서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여보냈다.
“미안, 좀 어지럽지?”
“아니, 이 정도면 엄청 깔끔한 편인데. 윤채린은 발을 들이기도 힘들 정도로 방을 어지럽혀서.”
윤채린을 자연스럽게 디스하며 윤승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힘들었구나.
나는 쓱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방. 침대는 하나뿐이었지만 침대를 들일 공간 자체는 확보되어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솔직히 1인실로는 말도 안 되게 커서.’
평수가 1인실 주제에 24평이었다. 보통의 학교라면 2층 침대를 들이고 10명씩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크기. 청소하는 게 귀찮겠지만, 마법 용품이 그걸 해결해줘서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불만은 별로 없었다. 이것도 일시적인 거고 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1인실을 쓰게 될 테니까.
“편하게 앉아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그냥 있기 뭐해서 일어나서 냉장고로 향했다.
“뭐 마실래? 음료수도 있는데.”
“물로 부탁할게.”
윤승하의 답에 나는 콜라 한 캔을 냉장고에서 빼고, 컵 하나를 들고 물을 따른 윤승하에게 건넸다.
“고마워.”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색했다. 하긴, 기숙사를 지키기 위해서 정령을 막았다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숙사를 반파시킨 원인이 윤승하니까, 저런 반응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옷은 있어? 빌려줄까?……속옷은 좀 곤란하지만 반팔이랑 반바지는 꽤 있어.”
얼마 전에 택배로 반팔 여러 개를 시켜서 옷은 별로 문제는 없었다. 속옷이 문제지.
“……아냐, 괜찮아. 다행히 서랍은 멀쩡하게 있어서, 옷은 문제없어.”
그렇게 말하며 윤승하가 오면서 들고 온 캐리어를 가리켰다.
“그럼 다행이고.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니, 지금은 별로 필요한 게 없네.”
그 후로 대화는 거의 단절되었다. 조금 거북해서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서 마나 연공을 시작했다. 보통 연공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건들면 위험해서 어지간히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지 않지만……같이 있는 룸메이트가 윤승하니 문제는 없었다.
사실 윤승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아예 하지 않을 시도였으나 이것 또한 행운이겠지.
“운이 좋군.”
“……응?”
내 혼잣말에 윤승하가 반응했다. 어느새 윤승하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분홍빛의 잠옷이었다. 분홍빛 잠옷의 여리여리한 몸.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에 사파이어를 닮은 푸른빛의 눈동자.
……위험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위험했다.
“시우는 신경이 굵네.”
“……뭐가?”
“마나 연공 말이야. 내가 악한 마음을 가지고 널 건들면 어쩌려고.”
나는 잠시 윤승하를 바라보았다.
윤승하는 용사다.
선의 길을 걷는 주인공. 악?을 알면서도 선?을 행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다. 그 길은 구불구불하고 가시밭길로 가득 차 있지만……윤승하라는 인물은 어떤 루트를 타도 그 길을 향했다.
그렇기에 그는 주인공이다.
“아무한테나 하지 않아. 너니까 믿고 하는 거지.”
“어?”
윤승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