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빼앗는자, 빼앗기는 자(8)
* * *
나는 김하린을 바라보았다.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카락. 머리카락과 같은 분홍빛의 눈동자와 입술.
김하린을 바라보니 김하린이 볼을 붉히며 얼굴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뭐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그게……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부끄러운 말을 하는 듯, 그 나이대의 풋풋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하는 것이 지금 가식임을 안다. 가면으로 느껴지는 감정, 김하린의 본래 성격을 알고 있는 유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온갖 괴롭힘을 참지만 그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 졸렬한 성격.
“어떤 이야기인데.”
슬쩍 시간을 보았다. 한시가 아까웠다. 빨리 탑 매의 완결을 향해 달려야 하는데……!
“여기서 하기는 좀…그렇고.”
김하린이 머뭇거리다가 잠깐 뜸을 들였다.
“둘이서 이야기하자.”
***
삭막한 풍경의 부실이 보였다.
기본적으로 요정족들이 관리해주고,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지원해주지만, 아무것도 들이지 않아서 삭막한 교실. 벽 이외는 보이지 않았다.
“미안……부실이 좀 초라하지?”
초라한 게 아니라 아예 있는 게 없는데.
“아냐, 나도 이런데 뭘. 깔끔해서 좋아 보이는데.”
“그럼 다행이고.”
김하린의 말투가 적응이 안 되는데.
그것보다 나는 궁금했다. 김하린이 이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요즘 신경을 잘 못 써줬다고 그러는 건가. 중간고사 필기시험 때 물어보는 건 꼬박꼬박 다 답해줬는데.
“물이라도 줄까?”
아니, 필요 없다. 빨리 기숙사에 가고 싶었다.
“응, 부탁할게.”
그렇게 말한 뒤, 김하린이 물을 가져왔다. 나는 물을 한 컵 마셨다. 시원한 청량감이 몸을 감쌌다. 물을 마신뒤 김하린을 바라보았다. 김하린이 촉촉한 눈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시우야 할 말이 있는데…….”
“응, 말해봐.”
김하린이 그렇게 말하고는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보랏빛과 핑크빛이 소용돌이치는 화면이 보였다.
최면 어플……또 너냐.
나는 눈에 힘을 풀며 고민했다. 왜 나한테 최면을 거는 거지. 나는 한종우를 꺾으면서 내가 강해진 것을 증명했다. 그 과정이 내가 영웅의 일원이었던 존재의 특성을 가졌음을 어필했다. 탐욕스러운 거래. 상대에게 마력과 정신력을 더하고, 특성을 빌려오는 힘을…….
‘아차…!’
그것으로 정신계 계통의 마인들을 잡으려고 했으나, 다르게 말하자면 최면 어플이 나한테 더 잘 통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속으로 경악해 하고 있었을 때 김하린이 나를 바라보았다.
“걸린 건가?”
김하린이 손을 가져다가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미동 없는 눈동자. 눈을 찌르려는 시늉을 한번 해서 놀랐지만, 표정을 그대로 만들어놔서 다행이었다. 이 사이코패스 같은 년……!
어쨌든 내 반응에 김하린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부터 임나연과 있을 때, 김하린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째서……?’
“사실 당신은 임나연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김하린을 사랑하지만……현실적인 문제로 임나연과 사귀고 있습니다. 임나연이 가진 배경, 그녀가 가진 권력……그것들이 무서워서였겠죠. 당신의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녀의 고백을 당신은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
‘이건 너무…….’
“당신은 점점 임나연보다 김하린이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감정은……임나연과 있을 때, 가장 강렬해집니다. 임나연과 손을 잡으면 김하린이 겹쳐 보이고, 같이 데이트를 할 때, 즐겁다는 감정을 느끼면, 김하린이 겹쳐 보입니다.”
김하린이 핑크빛으로 빛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요. 사실 당신은……이시우라는 사람은 김하린을 사랑하고 있던 것입니다.”
눈이 요사스럽게 휘었다.
***
……뜻하지 않게 김하린의 음습함을 확인했다.
김하린이 임나연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임나연이 좋아하는 남자를 채갈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에 김하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최면은 어플을 이용해서 끄면 되나.”
그렇게 몇 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슬쩍 나를 바라봤다. 핸드폰 화면에 어플 종료로 어플을 나가는 것을 보고 눈에 초점을 돌렸다.
“어라? 나 방금까지…….”
나는 최면에 풀린 척을 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만족스럽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다행히 속아 넘어간 것 같다.
“괜찮아, 시우야? 방금전에 잠깐 기절했었는데. 어제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그런가….”
무리했더라. 어제 유아독존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무리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좀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 빨리 기숙사로 향할 수 있을 테니까.
“미안, 내가 어제 한종우랑 대련할 때 좀 무리했나 봐.”
“그럴 만도 하지……상대가 한종우였잖아.”
내 말에 김하린이 덧붙였다.
슬쩍 김하린을 바라봤다.
광익의 소유자인 그녀가 마음먹고 한종우랑 붙으면 싸움은 굉장히 일방적으로 끝난다. 광익을 펼쳐 광익의 깃털을 사용하는 빛의 폭격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중하급의 마법에 필적한다.
거기다가 광익은 딜레이 없이 펼쳐진다. 시전시간이랄것도 없이, 즉각적으로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있다. 1초만 줘도 한순간에 상공 100m 위에 뜨는 것이 김하린의 광익이다.
물리법칙도 무시해서, 방향 전환도 즉각 즉각 되어 잡기가 매우 까다롭다. 속도가 빠르면 보통 번개 속성이나 광속성을 이용하지만, 김하린은 위에 두 속성의 힘을 흡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게임에서는 민첩을 올려 감각을 올리고, 명중률을 올리는 아이템들을 이용해서 잡아야 하지만.
‘그래도 까다로워서.’
굉장히 까다롭다. 본체도 싸움을 어느 정도 하는 편이다. 은수아나 윤채린처럼 미친놈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한종우나 임나연만 되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미안, 내가 너무 많이 붙잡았지?”
“아냐…근데 할 말이란 게 뭐야?”
“아, 그게…….”
김하린이 잠깐 머뭇거렸다. 얼굴에 홍조를 띠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 잊어버렸네. 시우, 네가 기절한 게 너무 놀라가지고.”
“그래. 그럼 난 피곤해서 먼저 가볼게.”
“응. 잘 가.”
김하린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흔들며 기숙사로 향했다.
***
다음 날.
대부분의 학생이 결투장에 있었다. 여기저기서 요정족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수를 소환하는 만큼 관객들의 안전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시험은 교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약한 점을 파악해서 그 학생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괴수를 소환한다. 까다로운 괴수라고 해봤자 학생 수준에 맞추고, 냉정하게 살피면 이길 수 있는 정도의 괴수.
“다들 오늘 시험은 알다시피 괴수를 사냥하는 시험입니다. 괴수를 소환하는 만큼 위험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만약 목숨이 위험할 것 같다면 항복이라고 외치거나 그것도 아니면 손으로 땅을 두 번 치면 요원들이 바로 구조에 들어갈 겁니다.”
저렇게 말은 하지만 실제로 위험한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색빛의 생머리의 큰 귀와 갈색의 피부가 인상적인 여성이 보였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도적과 관련된 기술을 가르쳐 주는 교수. 특징으로는 요정족에서도 희귀한 다크 엘프족이며 그림자 정령을 다룬다.
반대쪽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스로리 차림이 인상적인 팔뚝만 한 요정도 있었다. 학교의 이인자……는 아니지만 한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요정족이다.
“이번 시험을 위해서 상아탑에서 특별히 모셔온 분이 있습니다. 다들 박수로 맞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자, 결투장의 끝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이 주르륵 나오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색깔. 짙은 남색의 로브를 쓴 마법사들이 주르륵 몰려 있었다. 그 가운데에 한 여자가 있었다. 요염한 눈빛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상아탑에서 저와 같은 색을 부여받은 마법사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남색’의 색이 상징하는 것은 ‘소환’. 그 소환 학파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김춘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저 가스나가 뒤지고 싶나.”
송라희의 소개에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춘자의 말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촌스러운 이름에 주변에서는 웃음을 참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상아탑에서 ‘남색’을 수여받은 사라로니아 킴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사라 킴이라고 불러주세요. 다들 잘 부탁드려요.”
김춘자가 웃으며 말했다.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여러분들은 저희가 소환하는 환수를 상대할 겁니다. 저희가 소환하는 것들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희가 일반적으로 소환하는 환수들은 본능만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거기다가 저희의 환수들은 디스펠에 대한 항마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역 소환을 한다고 바로 역 소환 되지 않으시니 이 점 주의해주세요.”
김춘자의 친절한 설명에 모두가 네, 라고 크게 답했다. 김춘자는 학생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방긋 웃었다.
“그럼 시험 방식에 대해서 가르쳐 드릴게요. 저희가 소환하는 환수를 쓰러트리면 추가로 점수를 드리지만……그렇다고 해서 학생분들은 환수를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능력을 갖춘 환수에게 얼마나 ‘잘’ 대응하느냐를 집중적으로 볼 겁니다. 시험은 한 번에 삼십 명의 학생씩. 싸움에 배정된 시간은 총 30분입니다.”
김춘자의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중 어느새 다가온 임나연이 보였다. 슬쩍 한종우를 보니 한종우가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원숭이 한 마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이건 이것대로 싫은데.
어쨌든 임나연이 슬쩍 다가와서 귓가에 속삭였다.
“시우야, 괜찮아? 어제 좀 무리했잖아.”
“응, 어제 푹 쉬어서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나는 미리 봐둔 김하린의 위치로 시선을 향했다.
이쪽을 보던 김하린이 더없이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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