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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53화 (53/298)

〈 53화 〉 빼앗는자, 빼앗기는 자(5)

* * *

그렇게 남다윤이 부모님하고 인사하고, 거리에 있기도 뭐해서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가려 했다.

"미안, 누나는 바로 가봐야 해. 사실 내가 시우를 보려고 잠깐 들른 거거든. 요즘 빌런들이 워낙에 성황이라…바빠서 시합은 못 볼 것 같아……."

"아뇨, 아뇨, 남다윤님이 공사다망하신 건 모두가 알고 있는걸요, 저희 아들을 응원하러 와주신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렇지, 시우야?"

남다윤의 말에 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런가요?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시우 아버님. 저보다…나이가 많으신데요."

"그, 그럴까요?"

아버지가 뿌듯해하며 웃었고, 엄마는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뿌듯함과 곤란함, 걱정 등이 담긴 눈으로 나와 남다윤을 바라봤다.

"……뭐, 요즘 나이 차 많은 커플도 있으니까."

조용히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말에 남다윤이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는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고.

그렇게 남다윤은 원숭이에게 사인을 해주고 길을 떠났다.

우리는 잠깐 모이다가 그냥 결투장으로 향했다.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아있지만, 넉넉하게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뭐.

***

"사람이 정말 많은걸."

윤승하가 나른하게 말했다. 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 근처는 사람이 가득했다. 약 5,000여 명의 관중을 소화해낼 수 있는 경기장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가득해 발을 딛기도 힘들 정도였다.

핫도그 매점에서 핫도그가 있길래 몇 개 주문해서 일행들에게 나눠줬다.

"나는 안 먹을래."

원숭이가 거절했다.

보아하니 윤승하에게 단단히 꽂혀서 이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근데 윤승하는 그런 취향이 아닌데.

"승하는 복스럽게 먹는 여성이 좋데. 그리고 핫도그 엄청 좋아한다."

"잘 먹겠습니다, 오빠."

태세 전환이 참 빠른 녀석이었다. 근데 복스럽게 처먹는 게 아니라 게걸스럽게 처먹고 있었다. 입가 주위에 소스를 묻히면서 먹자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하하, 하며 난감하게 웃는 윤승하를 잠깐 바라보았다.

백옥같은 피부.

찰랑거리는 은발에, 능력을 각성하면서 새로 얻은 눈 덕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남자가 봐도 이쁘장하게 생겼다. 어지간한 여자애들조차 그의 옆에 서면 빛이 바래리라.

실제로 저 외모 때문에 동성애 취향인 남자 빌런들에게 많이 노려졌었다.

물론 난 남자를 노릴 생각은 없지만.

"아, 생도분들은 이쪽으로 와주세요."

그렇게 경기장에 도착하니 관계자가 안내했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정문 옆에 통로가 있었다.

"그럼 아들, 파이팅~!"

엄마의 격려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잘해보겠다고 답했다.

"승하 오빠도 힘내세요!"

……나는?

뭐, 기대도 안 했다.

정말로.

고릴라의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차례대로 들어갔다.

관계자가 안내해준 장소는 꽤 넓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이지아랑 임나연, 한종우가 있었다. 강한남도.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 가지 무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도 있고.

"저 무기들은 뭐야?"

"아, 저것들? 혹시 생도 중에서 무기에 이상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걸어둔 거래."

내 물음에 이지아가 답해주었다.

슬쩍 눈대중으로 보니 광이 나고 손때가 묻은 흔적이 없었다.

전부 신품이었다.

"이거 한번 휘둘러봐도 되나요?"

"네, 됩니다."

손을 뻗어 도를 집었다. 그렙감이 좋았다. 균형감도 좋았고. 손으로 날을 슬쩍 두들기자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명백한 상등품이었다.

땅의 요정족, 흔히 말하는 드워프들이 만든 물품이라 그런 것이겠지.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단도 열 자루를 집었다. 단도를 넣을 수 있는 벨트가 구비되어 있어서 챙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뭐야, 단도도 써? 그런 잡스러운 무기들은 상승의 경지에 이르는 건 도움이 안될 텐데."

윤채린이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승의 경지.

검기성강의 경지를 뜻한다. 모든 영웅이 꿈꾸는 경지의 일종.

이 경지에 드는 순간 대우 자체가 달라진다. 한명 한명이 핵병기에 비견되며 한시간도 안돼서 도시를 초토화할 수 있는 걸어 다니는 핵병기들.

하나의 무기만을 파더라도 그곳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많은 무기를 사용하려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테지.

"나는 원거리 공격이나 중거리 공격이 없어서 말이야."

단검 하나를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번에 누구랑 싸울까.

가장 베스트는 쌍둥이 용사와 은수아가 아닌 상대였다.

내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천수를 활용한 기예다. 학생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고, 상격의 영웅들과도 견줄 수 있는 기예. 남다윤이 말했으니, 그것은 확실하겠지.

그러나 기예라는 게 만능은 아니다. 내게 가장 취약한 부분은 기예로도 어쩔 수 없는 압도적인 '힘'.

그 힘을 가장 잘 다루는 것은 윤채린과 은수아다.

윤승하 역시 까다롭다. 정사와는 다르게 무예를 익히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까다롭다. 별 무리가 머무는 눈은 공격을 회피하기 좋으니까.

가장 좋은 상대는 지금 시점에서는 이지아 정도. 임나연도 나쁘지 않았다. 한종우는 꽤 까다롭지만, 어떻게든 되긴 하다.

'체력이 20이니까.'

장기전으로 가서 어떻게든 갑옷을 벗기고 쓰러트린다. 그러려면 파괴력이 좋은 도끼나 대검도 나쁘지 않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반대쪽 벽면에 달린 전광판에서 삐­삐­거리는 기계음이 나기 시작했다.

[제1경기장 결투]

[윤채린vs은수아]

오, 시작부터 괜찮았다.

윤채린과 은수아.

무인과 마검사의 대결.

마법을 다루며 칠색검을 휘두르는 은수아가 파워 싸움은 위이나, 은수아는 싸우는 법이 윤채린과 비교하면 매우 부족했다.

파워 하나로 압도적으로 찍을 수 없는 것이 윤채린이고.

윤채린하고 은수아가 터벅터벅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은수아를 시작으로 임나연, 이지아, 윤승하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났다. 임나연은 다시 한번 이지아랑 매칭되었고, 윤승하는 다른 반에 있는 학생이랑 매칭되었다. 그렇게 내 주변 지인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이글거리는 시선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한종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종우라. 첫날 부터 기 빨리게 생겼네.

한종우의 패거리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한남부터 시작해서 이름은 모르나 얼굴이 익숙한 7명이 보였다.

벌써부터 기 싸움 하기 귀찮아서 근처 의자에 앉았다.

"너 벌써 한종우랑 싸워? 입학하고 나서 중위권애랑 싸우고, 한 달 뒤, 강한남을 이기고, 중간고사에서 한종우랑 싸운다고? 무슨 힘을 숨기고 들어왔어?"

앉아 있더니 누군가 말을 걸었다. 탁한 금발이 보였다. 적당히 잘생긴 미묘한 얼굴. 까만색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얼굴은 물론 이름도 알고 있다. 윤승하로 플레이 하게 되면 그의 친구 역할로 나오며 온갖 정보를 물어다 주는 귀중한 정보 요원이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정한서라는 인물이 정보단체인 연화花를 이끄는 길드 장의 사촌의 7번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열하니 진짜 묘한데.'

한국에 있어서 인맥은 중대한 문제였다. 정한서가 가진 능력도 나름 뛰어나고. 나중에 김호동을 데리고 연화로 끌고 가 공훈을 나름 인정받기도 한다.

가족이 재계 1위 회사의 회장의 하나뿐인 외동딸인 임나연이라던가, 한국을 대표하는 길드의 길드 마스터의 아들인 한종우에 비해 손색이 있지만……저 둘이 말도 안 되는 배경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름이……정한서였지?"

"오, 내 이름도 알고 있어? 내가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건가. 아니면 그냥 전교생 이름을 다 외워놓은 거야?"

"전자라고 해둘게."

내 말에 정한서가 유쾌하게 웃었다.

"아차,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응, 얼마든지."

정한서 특유의 화법이었다. 내가 묻는 것을 답해주면 나도 나중에 보답해주겠다는 식의 화법. 나로선 손해 볼게 거의 없는…….

"정말 궁금했는데 말이야……. 그 소문 진짜야?"

"소문?"

"요즘 애들한테 퍼지고 있는 소문 말이야."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의 하나인 '그 화법'을 시전하는 정한서였다.

정한서는 무슨 엄청난 이야기라도 하는 듯, 자세를 낮추며 귀 근처까지 와서 이야기했다.

"그, 네가 임나연하고 이지아하고 양다리를 걸쳤다는 이야기 말이야. 요즘 그런 소문이 돌고 있거든. 이지아랑 임나연이랑 둘이서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목격돼서­"

"뭔 헛소리야."

말을 끊으며 이야기했다.

한종우가 있는 방향에서 이글거리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절대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지.

그렇게 앉아 있자니, 전광판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제1경기장 결투]

[한종우vs이시우]

***

불꽃이 이글거리며 주변을 달구었다. 대지가 요동치며, 바람이 날카롭게 사방을 할퀴고, 독이 자욱하게 퍼진다. 그 광경을 붉은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꽤 하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돌렸다. 은발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그의 주위에는 다양한 정령들이 있었다.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 형상의 도마뱀, 바람이 뭉쳐져 만들어진 매. 보랏빛의 이족 보행을 하는 개구리.

대상의 본질을 보는 그녀의 시뻘건 눈이 소년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주변에 별 무리 같은 것이 그를 탐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방벽도 견고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을 훑었다. 1경기장 옆에 있는 2경기장.

콰아아아­

주변의 공간이 어그러졌다.

그 중심에는 일곱 빛깔로 빛나는 칠색의 검이 있었다. 빛바랜 백발. 황금으로 빛나는 금안이 보였다. 은수아. 상아탑의 후계자. 그녀도 요주의 인물 중 하나였다. 만약 제대로 성장한다면 마왕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그에 대적하는 인물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휘날리는 금발에 자신과 같은 붉은 빛의 눈동자.

윤채린이 중얼거렸다.

천마신결, 소수마공.

섬섬옥수 같은 팔이 새하얗게 빛났다. 팔을 휘저어 그녀에게 향하는 흑염을 지우기 시작했다. 칠색을 휘두르자 검은빛의 광선이 은수아의 움직임을 견제한다.

칠색을 휘두르며 공간 채로 도려내지만, 저 광선들은 한 수, 두 수 따위가 아닌 십몇 수를 내다 보고하는 공격. 조금씩 은수아의 움직임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저 두 사람은 학생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당장 전선에서 활약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아쉽네."

그러나.

혈마는 아쉬웠다. 공간을 뒤흔드는 강력한 이능이지만 주인이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녀가 보기에는 은수아는 저 칠색검에 휘둘리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좀 더 정교하게, 다양하게 응용했을 텐데.

혹은 검주의 어검처럼 검을 다룬다던가. 칠색의 출력이 확연하게 떨어지겠지만, 저 정도쯤 되는 출력을 가진 이능이면 한번 스치는 것만으로도 중상을 입힐 수 있다.

혈마는 눈을 돌려 윤채린을 바라보았다. 공격 하나하나가 정교했다. 상대의 수를 제한하고, 자신의 수를 늘린다. 몇몇 움직임은 자신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움직임도 있지만, 자신도 배울 점이 몇 개 있었다.

혀로 입술을 핥았다. 싸워보고 싶었다.

'……힘을 개방하는 순간 바로 목숨이 위험해지겠지만.'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반 관중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사방에 요정족들과 정령들이 넘쳐흘렀다. 하늘에도 존재하고, 땅속에서도 존재했다. 인파 속에서도 존재했고.

…저들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요정 여왕이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았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달아오른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저들이 좀 더 여물었을 때…….

"하아."

그때가 기대돼서 참기 힘들었다.

들뜬 숨을 내쉬며 윤채린과 윤승하를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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