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빼앗는자, 빼앗기는 자(2)
* * *
"……정말 그게 다야?"
살짝 실망한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순간 당황했다. 내가 뭘 잘못 부탁했나. 내가 부탁한 건 별것 아니었다.
요즘 신체 능력이 너무 급등하여 기존의 운동기구로 효과를 볼 수 없어서 이지아에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운동기구 몇 개에 마법을 걸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반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잠시 쓰다 말 것들이라 한두 달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지금 그녀의 수준이라면 중력 마법이나 과부하 마법쯤은 별거 아니니까.
이지아의 얼굴을 보았다.
기대했다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시선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조금 어색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잠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없는 것 같은데.'
무리한 부탁도 아니었다. 그냥 친구 사이였어도 해줄 수 있는 부탁 정도였다.
그러나 이지아는 뭔가 좀 불만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뭘 해줘야 할까. 여자를 달래는 일은 익숙하지 않은데.
케이크를 포크로 한입 크기로 잘라서 떠먹으며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지아? 여기서 뭐하니."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보랏빛의 머리가 보였다. 상아탑에서 자색?色의 칭호를 받은 파마의 마녀. 송라희.
송라희도 나를 발견했는지, 미약하게 경계심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별것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잘생긴 남자를 탐탁지 않아 할 뿐이니까.
"교수님? 오늘 강한자 교수님이랑 어디 간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강한자 교수님이 부상이 아직도 낫지 않으셔서."
광견과 부딪쳐서 부상을 입었으나, 저건 거짓말이다. 부상은 이미 요정 여왕의 힘으로 완쾌한 지 오래나, 애쉬를 좋아했다가 애쉬가 그를 이용했다는 것이 밝혀져, 침울해서 방안에 박혀 있을 뿐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마인 사태 때…크게 부상을 입으셨었지. 강한자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다고 하시더라. 요정 여왕님이 말씀하셨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동자에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바로 오시기는 힘드실 거야. 적어도…이번 학기가 다 끝나고 가능하시겠지."
"그렇구나…."
"흠흠. 아, 그렇지 뭐라도 사줄까?"
나는 슬쩍 이지아를 보았다. 이지아의 표정에서 더 먹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아뇨, 괜찮아요. 케이크 먹어서 배가 불러서요."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케이크까지 먹어서 배불렀다.
내 말에 송라희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남자가 좀 듬직한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비실비실한 몸으로 적게 먹으니까 그런 거야. 시우, 넌 많이 먹고 몸 좀 키워야겠다."
"시우 대인전 성적 최상위권인데요……."
"큼, 아무튼. 내 말은 남자답게 체격을 채우라는 말이었지."
그렇게 말하곤 할 말이 궁했는지, 송라희가 도도한 걸음으로 가버렸다.
***
시간이 흘러 어느새 중간고사 시즌이 왔다.
평소에는 떠들던 애들이 여기저기서 옹기종기 모여 책을 펴고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필기시험을 공부한다는 행위는 나와 거리가 먼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편하다는 건 아니지만.
"시우야, 나 노트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시, 시우야, 나 옆 반에 윤정인데 노트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처음 보는 얼굴과 얼굴만 아는 애들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노트, 곤란. 하면서 거절하고 싶지만, 주변의 눈치가 있었다. 주변을 슬쩍 보니 애들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 빌려주는 순간 내 노트는 여기저기 복사가 되겠지.
'솔직히 상관없는데.'
노트가 복사되든 말든 별로 상관은 없다. 내가 필기에서 만점을 받는 이유는 내 특성인 지식열람 덕분이니까.
내가 노트에 쓰는 건 별거 없다. 그냥 눈치 보다가 교수님들이 칠판에 써놓은 거 몇 개 끄적이고 심심해서 낙서를 좀 한 게 전부였다. 천수를 이용해서 낙서하니까 내가 원하던 장면을 그릴 수 있는 게 재밌어서 꽤 맛 들였다. 요즘 교수들의 눈초리가 안 좋아져서 자제는 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내 노트는, 어쩌면 필기 성적이 바닥을 기는 임나연의 노트보다 더 정리가 안 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아니, 필기만은 열심히 하니 임나연의 노트를 참조하는 게 더 도움이 되겠지.
"미안, 나는 노트에 적는 게 별로 없어서."
"아, 그래?"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 보는 얼굴과 얼굴만 아는 애가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내 자리로 향했다. 집요한 시선들이 몇 개 따라붙었다.
"저게 나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교수님들이 가르친 내용은 다 머리에 있다는 거냐. 진짜 정말 부럽네."
"그러게. 쟤 빼고 아카데미 역사상 필기에서 만점 받은 사람이 없으니까. 미래에서는 이미 노벨상 쓸어버릴 거라고 이미 난리더라고. 국뽕들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한 명이라고 하더라."
어마어마한 고평가였다. 나름 뻔뻔한 나이지만 이정도쯤 되면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맘속으로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저기……시우야."
임나연이 헤헤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 이름을 부른 이유가 너무 명확했다.
"그, 노트 좀 보여줄 수 있어?"
"미안, 노트에 필기한 게 거의 없어서, 내 노트는 도움이 안 될 거야."
"아, 노트 잘 안 써?…하긴 시우는 필기하는 거 별로 없긴 하더라."
임나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표정에는 실망이 깃들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나는 덧붙이며 말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물어보는 건 내가 아는 건 다 가르쳐 줄게."
"진짜? 고마워."
임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위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뭐 물어보면 항상 가르쳐 주긴 하였는데.
"대신 나도 나중에 도와줄게.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해."
만약 내가 부탁한다면 그 곤란한 일을 통째로 밀어 버릴 것 같은데.
지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잠깐 핸드폰을 확인했다.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곤 다 차단했으니, 나한테 중요한 인물한테 온 문자란 뜻이다.
확인해보니 김하린한테서 문자가 하나 왔다.
[나도 도와줄 수 있어?]
"……."
슬쩍 김하린이 위치한 곳을 보니 김하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든 물어봐. 보면 바로 알려줄게]
김하린의 톡을 받고 슬쩍 톡을 확인해보니 꽤 많은 톡이 와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노트 좀 빌려달라는 톡들.
톡을 쭉쭉 내리다가 독특한 톡도 있었다. 노트를 얼마에 살 테니까 노트 좀 달라는 얘기였다.
혹시나 하며 이름을 봤지만 역시나 처음 보는 이름이 있었다. 응, 차단. 나는 가볍게 차단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어느샌가 송라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들 중간고사때는……."
***
잿빛이 비치는 풍경이었다.
삭막한 회색의 콘크리트.
곳곳에 세월에 부식된 흔적이 있었고, 깨진 유리창 너머에 달빛이 흘렀다.
사람의 인적이 끊긴 건물. 재앙이라 불리는 몬스터가 지나간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곳은……'교단'이라 불리는 곳의 임시 은신처였다.
그곳에서 한 존재가 눈을 떴다. 나른하게 손으로 턱을 괴고, 왕좌같이 위엄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존재가 있었다.
보석처럼 찬란했지만, 어딘가 새빨간 피를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주여. 대적자를 찾았나이다.
텅 빈 공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천상의 마를 타고난 인간을 찾았나."
잠시 생각했다.
천상의 마.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특성이다. 마?에 관해서 절대적인 친화력을 얻는 능력.……그러나 어떻게 얻었을까. 본래 그 능력은 '마왕'이 타고나는 능력이거늘.
'마왕도 아닌 주제에.'
흥미가 있었다. 한 번 손을 섞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약하면 죽이고. 가능성이 있으면 살리고.
낮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둥그런 보름달이 구름에서 벗어나, 세상을 비추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핏빛의 장발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새하얀 피부와 몸 전체를 감싸는 검은빛의 옷에서 나오는 굴곡.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현세에 빚어낸 모습. 조용히 왕좌에서 일어나 달빛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여. 한 명이 아닙니다.
멈칫.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한 명이 아니라고? 무슨 소리지. 그녀는 답을 원하는 눈빛으로 목소리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무슨 소리지?"
미색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따라 목소리가 답하였다.
두 명입니다.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그리고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두 명이라. 조용히 그 숫자를 중얼거렸다. 핏빛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대적자.
곧 부활할 마왕에 대적하여 마왕을 다시 쓰러트릴 존재라 하였다.
마왕의 본래 힘을 아는 그녀로서는 흥미가 솟았다.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을 멸하는 힘. 그런 힘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무려 두 명이라.
"재밌네."
흥미가 솟았다. 직접 보고 싶어졌다.
"능력은?"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윤곽은 잡았습니다. 아마 이제 곧….
"잡설이 길다."
드러난 능력으로 봐서 정령과 관련된 능력인 것 같습니다. 십수 체의 정령을 사역하고 다루더군요.
"호오."
나지막이 감탄했다. 십수 체의 정령이라. 그것은 어지간한 중격의 영웅들보다 뛰어나다는 소리인데.
"위치는?"
히어로 아카데미에 있습니다. 보고드렸던, 천상의 마를 가진 존재와 쌍둥이임을 확인했습니다.
쌍둥이라. 그녀는 조용히 눈웃음을 지었다. 핏빛의 눈동자가 어느 한쪽을 직시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황했다. 그 위치는……히어로 아카데미가 존재하는 위치였다.
"그러고 보니 곧 시험이군.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실기 시험을 볼 때는 특별히 외부의 인물들에게 자신들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학교를 개방한다고 하였나."
목소리가 퍼졌다. 그 속에서 즐거움이 느껴졌다. 주인의 즐거움에 목소리는 즐거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강하고, 마왕의 후계에 어울리는 인물이나……너무 멋대로이기 때문이었다.
주여, 그건…….
목소리가 멈칫했다. 타고난 속성 지배력과 마나 친화력으로 상위 종족인 요정족들. 그리고 공간의 힘을 다루는 요정 여왕의 심복. 그 모든 것들은 그의 주인을 막을 수는 없지만…요정 여왕은 그 격이 다르다.
대적자를 제외하고 마왕을 해할 수 있는 인물을 꼽자면 그 수는 한 손에도 들지 않지만, 그 한 손에 드는 존재들은 너무 위험하다.
이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난 인물 중, 최강자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존재가 그 학교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암천??을 지배하는 중국의 공허족의 수장과 마법의 종주인, 미국에 존재하는 용왕. 그 둘과 함께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세계수와 공명하여 권능을 끌어다 쓰는 그녀의 능력은……터무니없이 위험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유로 말해도 그의 주인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죽는다면 고작 이 정도의 인물일 거라며 자조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물. 그 모습에 반해 그녀를 모시기로 맹세하였으나, 이럴 때가 되면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런 목소리를 향해 즐겁다는 듯, 핏빛의 눈동자가 휘었다.
"준비하라. 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