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마인(5)
* * *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마나를 다 쓰면 오는 탈력에 주저앉았다. 거기다가 가면을 여러 겹 쓰니 반동이 심했다.
마지막에 광견이 무식하게 힘으로만 공격해서 다행이었다. 패링으로 받아칠 수 있으니까.
나는 광견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체는 사라지고 타다만 재 같은 것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인은 죽으면 시체를 남기지 못하고 저렇게 재가 된다.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실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운동기구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있었고, 시설 중 절반이 반파되어 있었다. 창문 쪽은 윤채린과 광견의 싸움 여파로 완전히 뚫려 있었고. 좀 미안하게 됐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공간이 일렁이는 것 같은 현상이 사라졌었다. 주인에게 보고하러 간 거겠지.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조만간 이곳으로 오겠지.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했다. 한종우가 푸르댕댕한 피부를 가지고 의연한 척 하며 파편 위에 거만하게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즉, 꼴값을 떨고 있었다.
"야."
"……뭐지."
한종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느릿하게 반응했다.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나는 목걸이를 벗어서 던졌다. 던져진 목걸가 한종우의 목에 그대로 안착했다. 반응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진짜 힘들었나 보네. 목걸이에 걸린 독 저항력 탓일까, 안색이 조금 편안해 보였다.
"……고맙군."
"주는 거 아니고 빌려주는 거다."
"……무, 물론. 알고 있다."
대답이 늦는 게 신경 쓰이는데.
나는 주섬주섬 일어났다. 뻥 뚫린 옆면에서 바람의 정령을 타고 오는 윤승하가 보였다. 눈빛이 좀 더 깊어졌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성공적으로 스킬을 얻었다는 증거다.
"다들 괜찮아?"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인가."
윤채린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애초에 그 말은 틀렸다. 더 위험했으면 다른 사람들이 개입했을 테니까. 그란데힐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기는 교장의 안마당. 아마도 지금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거다.
"뭘,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그러게. 너 다시 봤다."
"…나?"
"엉. 잘 싸우던데. 특히 마지막에 유능제강을 이용한 묘리가 대단했지. 그 개새끼 팔을 검으로 흘리면서 목 자르는 거 좀 쩔더라."
"시우의 기교가 좋긴 해."
윤채린의 말에 임나연이 받아쳤다. 말이 좀 묘한데. 은수아가 왠지 모르게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너희가 뿌듯해하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바라보았다.
나는 이 이후의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 마인들에 침입에 학교는 비상이 걸리고 일주일 동안 학교를 봉쇄하면서 주인공들은 수련하거나 어디론가 놀러 간다. 그러나 이제 곧 중간고사 기간. 중간고사까지 아직 시간은 2주 이상 남았지만, 중간고사 전에 일주일을 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아까 전 나한테 목을 베이고 잿더미가 된 애쉬한테 다가갔다. 근처의 반쯤 타다만, 봉 같은 걸 주워 잿더미를 쿡쿡 찔렀다. 잿더미를 손으로 만지는 것이 꺼림직했기 때문이다.
잿더미를 몇 번 뒤지자 무언가 걸렸다. 봉으로 살짝 쳐내 걸린 물건을 꺼냈다. 잿더미 속에 핸드폰이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흠."
나는 그것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웬 핸드폰?"
옆에서 윤승하가 물었다. 어느새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려 있었다.
"우리가 왜 싸웠는지 잊었어?"
"……아."
내 말에 윤승하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면어플. 이것이 깔린 핸드폰 때문에 싸웠다.
"최면 어플?"
윤채린이 내 쪽으로 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었다.
"뭐야, 그걸 왜 챙기는 거야. 혹시 쓸려고? 관심 있는 여자 있어? 그걸 쓰고 싶어서라도 강제로 가지고 싶은 여자라던가?"
윤채린이 팔꿈치로 내 허리를 꾹 찌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내뱉자 주변의 인물들이 반응했다. 임나연이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은수아와 윤승하가 순간 흠칫했다.
"제출해야지. 누가 쓸 수 있으니까 내가 보관하는 거야."
"쓰는 건 아니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최면 어플을 이용하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메리트가 있지만, 그보다 단점이 심하다. 잘못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쓸 생각 없어. 악마와 계약하는 함정일 수도 있잖아."
"…그것도 그러네."
윤채린이 흥미를 잃은 듯 털레털레 걸어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여기저기서 발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귀찮은 건 사양이다.
***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공간이 물결치듯 요동쳤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위로 튼 메이드 복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란데힐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폭발음에 놀랐지만 각자 무기를 챙겨 들며 폭발의 근원지로 향했다.
주변의 학생들은 바로 옆을 지나감에도 그녀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란데힐님?"
거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제일 처음, 보랏빛이 눈에 들어왔다. 상아탑에서 '파마'를 뜻하는 자색의 칭호를 받은 마녀, 송라희. 그녀의 얼굴과 비슷한 크기를 자랑하는 자색 빛의 보석이 박힌 길쭉한 스태프를 무장한 채, 말을 건넸다.
"조금 전 폭발음 들으셨죠? 강한자 교수를 습격한 마인이 출몰한 건가요?"
"네, 이미 해결했습니다."
"대체 어디에 있…해결했다고요? 도대체 누가요?"
멍한 목소리로 되묻자, 차분하게 답했다.
"학생들이 처리했습니다. 마침 자리에 있었나 봅니다. 윤승하, 윤채린, 은수아, 한종우, 임나연…."
"중격의 마인을 고작 1학년생 6명이서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송라희가 이내 앗, 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자색 빛의 광채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란데힐은 잠시 송라희를 떠올려 보았다. 척 봐도 강한자 교수에게 관심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강한자 교수는 결혼하지 않았나. 뭐, 상관할 바는 아닌가. 그란데힐은 조용히 그녀의 주인에게 걸어갔다.
끼익.
근처에 다가가자 문이 절로 열렸다. 중앙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광채가 이는 초록빛의 머리카락과 초록빛의 눈동자. 이능의 발현이었다. 세계수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요정 여왕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이능.
이치를 꿰뚫어 보는 고고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뇨, 당연한 일입니다."
그란데힐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티타니아는 슬쩍 웃었다.
"그 아이는 어땠나요?"
"모르겠습니다."
티타니아의 질문에 그란데힐은 답했다. 모르겠다. 처음엔 그냥 머리 좋은 학생처럼 보였는데, 오늘 다시 보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은 빠르게 성장한다지만 이시우라는 학생은 그 걸음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그가 쓰는 능력도 묘했다. 그것은 마치.
"그렇겠죠.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데."
티타니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떠올려 보았다.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존재가 몇몇 있기는 했다.
'다만 그 대상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전 세계를 뒤져도 한 손을 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마해 온 그녀의 이능.
처음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래서 주의 깊게 관찰했다. 몇 없는 장학생으로 두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더 알 수 없었다.
캄캄한 밤에 안개가 낀 광경처럼,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었다.
굉장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라. 정작 본인은 그 능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여왕님."
그란데힐이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티타니아는 상념에서 깼다. 이능을 이용하는 마력이 흩어지며 다시금 황금빛의 머리카락으로 되돌아갔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란데힐이 입을 열었다.
"재밌게 됐네."
보고를 들은 티타니아는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
기숙사로 가는 길. 나무가 줄지어 늘어진 가로수 길 아래에 벤치에 앉았다.
나는 애쉬의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니 배경화면이 보였다. 비밀번호는 없었다. 핸드폰에는 여러 가지 어플들이 있었다.
우웅. 핸드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카톡이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나는 슬쩍 카톡을 켰다.
죄짓는 기분이 들었다. 범죄행위지만, 카톡으로 마인을 더 잡을 수 있다면 괜찮은 게 아닐까?
호동이랑 강한자부터 시작해서 교수들만 모이는 단톡방. 톡방은 꽤 많았다. 나는 김호동과의 톡을 확인했다.
[김호동]
[교수님]
[교수님이 기억 안 나신다니까 다시 말할게요.]
[저 교수님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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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래……. 너 눈치 없는 애 아니잖아.]
[강한자]
[김 교수님. 제가 우연히 친구에게서 '그래도 살아간다.'라는 극장 티켓 두 장을 얻게 되었는데…….]
"……."
뭔가 엿보면 안 되는 심연을 본 것 같은데.
톡을 계속해서 내렸다. 이상하게 애쉬는 남자인데 꼬이는 남자가 많았다. 겉모습이 예쁘장해도 거의 다 남자인 걸 아는데 왜…….
톡을 내려도 얻을 건 없었다. 남은 건 문자인가. 문자는 여러 가지 스팸 문자가 있었다. 사적인 사람과의 대화는 없었다. 하긴 요즘 누가 문자를…….
[김우진]
[애쉬님 그 사람을 찾았습니다]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전에 김호동에게 의뢰했었던 남자가 눈에 보였다. 문자를 훑었다.
그 사람.
김시연을 벌써 찾은 건가. 근데 사건이 벌어지려면 아직 한 달 더 남았는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지금 내가 애쉬인척 하며 문자를 보낼까?
사건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학생 수의 10%가 죽고 교수 2명이 죽어 나갔으며 강당이 반파된 습격 사건보다 훨씬 조용하게 끝났다. 사상자는 마인 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측에서는 조용히 처리할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그곳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게시할 수도 있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우우웅.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확인해보니 다음 주 월, 화, 수는 쉬는 날로 바꾼다는 문자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