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개화(1)
* * *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호동이한테 연락이 와있다. 대충 내가 알아달라 한 인물들의 정보를 다 수집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카톡을 보내준 뒤, 수고했다는 의미로 미리 사뒀던 기프티콘을 보내 주었다.
시선을 내려, 옷을 잠깐 점검했다. 셔츠에 먼지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확인하며 한 번 털어내고, 옷깃을 여몄다. 바지도 슬쩍 확인해서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확인했다.
핸드폰으로 거울 앱을 켜서 얼굴도 확인했다. 잡티 없는 깨끗한 피부에 오뚝한 코. 참 잘생겼다. 아니, 이게 아니지. 얼굴을 봐서 뭔가 묻은 게 없나 확인해 보았다.
'이상은 없네.'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여기에 오게 되면 긴장하게 된다. 그렇게 교무실에서 1분 즈음 서성이니 다른 애들이 오기 시작했다. 윤기 나는 금발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 적안을 가진 천마, 윤채린. 그리고 그의 동생 윤승하. 윤승하가 나랑 눈을 마주치자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가만있기 뭐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뭐야, 둘이 언제 그리 친해졌어."
"저번에 던전 실습하면서 친해졌지, 뭐."
윤승하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윤채린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나를 향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네."
불량하다기보다는 야한 느낌을 주는 차림의 은수아가 왔다. 이지아도 뒤에서 웃으며 오고 있었다. 김하린은 이지아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쟤낸 언제 저리 친해졌대. 의아해했지만 호출된 인원이 모두 모여서 나는 노크를 하였다.
똑똑.
들어 오렴.
가녀린 미성이 들렸다. 나는 문을 열었다. 끼익, 나무 문이 마찰 내는 소리가 들렸다. 싱그러운 풀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순금을 녹여 내린 듯한 황금빛의 머리카락. 무엇이든 꿰뚫어 볼 법한 연둣빛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거기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렴."
티타니아의 말에 우리는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으려 하기 전에 문이 저절로 닫혔다.
"다과라도 내어 줄까?"
"네. 녹차로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내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녹차를 부탁했다.
"저는 홍차요."
……은수아 빼고.
기왕이면 나는 커피가 좋지만, 티타니아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녹차. 우리는 소파에 앉았다. 회색빛의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이 어느새 우리 앞에 나타나 주전자를 꺼내, 차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찻잔에서 30cm 정도 위에서 액체를 떨어트림에도 어느 곳에도 튀지 않고, 일정량을 따라주었다. 우아한 모습. 언제 한번 써먹어 봐야지.
놀랐지만, 놀란 척을 하지 않았다. 슬쩍 옆을 보니 이지아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고, 김하린도 순간 동요한 게 느껴졌다. 은수아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정하는 척하지만,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체 멈추었다.
나는 그녀가 따라준 차를 입에 대었다. 살짝 씁쓸했지만, 향이 마음에 들었다.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란데힐.
요정 여왕을 모시는 충복. '공간'과 관련된 특성을 가진 그녀는 이동의 스페셜리스트이다. 그녀를 영입할 수 있냐 없냐에 따라 운신의 폭이 완전히 달라진다.
좋아하는 것은, 티타니아에게 도움이 되는 것과 그녀와 닮은 윤채린. 도대체 저 왈가닥하고 티타니아의 어디가 닮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너희들을 왜 불렀는지 알겠느냐?"
"보상 때문에요?"
티타니아의 물음에 윤채린이 답했다. 그녀의 모습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걱정스러운 조가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 이지아랑 김하린이 움찔거렸다.
"먼저 채린이와 승하. 어둠의 정령을 훌륭하게 소탕했구나."
윤채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윤승하가 머쓱해 했다. 어둠의 정령을 거의 피해 없이 소탕했지만, 굳이 요란하게 소탕한 걸 부끄러워해서 그렇다.
"수아 역시 훌륭하게 완수했다. 산맥에 나타난 변종 트롤을 일격에 퇴치했다지?"
티타니아의 칭찬에 은수아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를 씰룩거려서 보기 좋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잠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이정도야, 라는 듯이.
"다들 훌륭하게 완수했구나.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보물창고를 개방하기로 했단다."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홱 하고 돌아갔다.
요정족의 보물 창고. 요정족들이 자신들의 여왕에게 바치는 보물들이 가득한 창고.
요정족.
뭉뚱그렸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엘프와 드워프, 모두 요정족에 속한다. 희귀하기 그지없는 정령족부터 시작해서 손가락 크기만 한 페어리,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간직한 님프, 나무의 요정인 드라이어드까지.
하나같이 타고난 자연력과 속성력을 지니는 요정들이 만드는 물건은 그 자체로도 신비?? 를 내포한다.
"차근차근 골라보렴."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허공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었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우리가 모두 볼 수 있게 허공에 띄웠다. 그 일련의 과정이 하나같이 매끄러웠다. 이지아와 윤승하가 그 모습에 나지막이 감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물건을 보고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검이나 활따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설명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로크에 관해서 나름 청정수인 나로서도 필수 템들은 다 기억하고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하린이 넌 이거 골라."
"응, 이거?"
노란색의 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광의 보주. 빛과 관련된 힘을 강화해 주는 물건이다. 김하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물건.
"빛과 관련된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구슬이야."
"그래?"
김하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추천에 티타니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이거. 라플라스의 보주. 술식을 보조 해주는 건데……."
"응, 알았어."
이지아가 망설임 없이 보랏빛의 보주를 골랐다. 티타니아가 웃으며 손을 뻗어 보주를 소환하더니 이지아에게 주었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마석을 흑수정으로 감싼 형태의 둥근 보주. 이지아가 잠깐 마력을 불어 넣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우와 이거……."
"나는 어떤 게 좋을 것 같아?"
은수아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수아는 그녀의 특성을 강화하는 무기보다는 그녀를 보다 날뛸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갖춘 장비가 좋았다.
"수아, 넌 이게 좋겠다."
매가 음각된 검은색의 신발을 추천해 주었다.
"요거? 그럼 저는 이걸로 할게요."
은수아가 내 말에 바로 고르자 주변에서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골라도 돼?"
"네가 추천해 준거잖아. 그럼 나에게 가장 좋은 물건이겠지."
은수아가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설명을 이어갔다.
"섬광의 날개야. 너에게 부족한 기동성을 올려줄 거야."
"그래?"
은수아가 내 말에 역시, 라고 중얼거리며 슬리퍼를 슬쩍 벗고는 신발을 신었다. 몇 번 마나를 슬쩍 돌리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이왕 추천해주는 거 우리도 가능할까?"
윤승하가 내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윤채린도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승하는 어떤 것이든 좋았다. 윤승하 자체가 어디서든 만능적인 녀석이라 방어적인 부분을 올려도 좋았고, 공격적인 부분도 올려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얘가 무예를 배우지 않았지.'
던전 실습 때가 떠올랐다. 윤채린이 있어 무공을 배우지 않은 윤승하. 그만큼 정령을 사역하는 힘이나 마법적인 힘이 강해졌지만, 아마 수비력이 부족할 것이다. 윤승하에게는 적의 공격을 최소 한번 막을 수 있는 룬 쉴드를 추천해 주었다.
윤채린이 나를 바라보았다. 윤채린의 스펙을 떠올려 보았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마법이나 술법 등에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에게는 마법 저항력을 올려주는 반지를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적을 묶을 수 있는 바인드 마법이 내장돼있음을 알려주었다.
"오, 괜찮은데~"
윤채린의 표정이 밝았다.
나는 그녀의 두루마리를 보았다. 마력을 주입하면 수십 자루의 검으로 변환하는 환검, 엘르지엘. 화살 한 번 쏘는 것으로 폭풍을 부르는 템페스트.
하나같이 모두 탐나는 물건이었다. 여기서 어느 것을 고르든, 바로 전력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무기들. 그러나 나는 고개를 털며 두루마리를 살폈다.
하얀색의 구슬을 골랐다.
내 선택에 그녀가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란데힐."
"네, 여왕님."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인데……."
티타니아가 잠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란데힐이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두루마리를 훑어보았다.
"……저도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그란데힐이 처음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도 게임대로 되네.'
어떤 이유인지 모른다. 어떤 유저가 마우스 클릭을 미스 내서 순백의 단을 골랐는데 이것을 고르면은 수아에게 얻은 검은색 구슬과 쓸 수 있다.
다만, 굉장히 특별한 조건을 채운 사람만이 쓸 수 있단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게임 내에 존재하지 않아서 잊어버릴 뻔했었지.
"잠시 확인해 봐도 되겠느냐?"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속처럼 그녀들이 이견을 조율했다. 마나를 불어넣어 보기도 해보고 정령들을 불러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건…왜 여깄는 거지."
티타니아가 드물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관찰안으로도 살필 수 없다는 증거다.
"음, 시우야?"
"네."
"미안하지만 이건 나도 어떤 효과인지 모르겠구나. 평범한 구슬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제가 알고 있으니까요."
내 말에도 그녀는 찌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마 그녀의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본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 우연히 들어 있었고, 내가 그것을 택했다. 마치 누군가 바란 것처럼. 너무나도 작위적인 상황이다.
'솔직히 나도 이게 왜 여깄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 구슬은 원래 요정족 창고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란다."
대사가 끝나자마자 속으로 환호했다. 게임 속대로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구슬은 범상찮은 물건이기도 하다. 대신이라기 뭐하다만은."
그녀가 품속에서 반지를 꺼냈다.
붉은 꽃이 장식된 반지. 생명 꽃의 반지였다. 세계수의 정기를 받은 생명의 꽃.
"이것도 같이 내어 주겠다. 위급한 상황에만 쓰렴."
"감사합니다!"
나는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
기숙사의 방안.
나는 티타니아에게 받은 하얀색의 구슬을 꺼냈다.
'순백의 단.'
그리고 품속에서 작은 케이스에 잘 보관하고 있던 검은색의 구슬을 꺼냈다.
'흑암의 단.'
나는 그것들을 망설임 없이 끓는 물에 넣어버렸다.
퐁당.
물에 닿자마자 물감이 퍼지듯 녹아내렸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생명꽃의 반지를 꺼냈다. 반지의 윗 부분, 붉은색의 꽃 부분만을 따서 그것도 같이 넣어버렸다.
생명꽃의 색인 붉은 색이 사라지고, 백색과 흑색이 서로서로 섞일 듯 말듯, 하다가 이내 서로 절반씩을 차지하더니 갑자기 쑥, 하고 작아졌다.
냄비 안을 보니 반은 흑색, 반은 하얀색의 엄지손톱만 한 구슬로 변했다.
'음양단???.'
온갖 스텟을 15까지 올려주는 사기템이다. 최소 스텟이 8이 여야 된다는 단점과 고유 특성을 아직 개화하지 못한 사람만 복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은 영단.
'그만큼 효과는 좋아서.'
고유 특성을 강제적으로 개화시켜주며, 스텟을 올려준다. 또한, A등급의 특성을 한 개에서 최대 네 개까지 개방시켜준다.
'솔직히 난 두 개만 되어도 감지덕지한 데.'
세 개의 특전 때문에 특성이 개방되기 힘든 내 상태로는 한 개만 개화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집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도의 업을 모방한 가면을 쓰고 몇 개의 마법을 기숙사 내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옷을 벗었다. 팬티 차림으로 바닥에 반듯하게 앉은 다음 나는 마나 감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린의 가면을 착용했다.
그리고 단을 삼켰다.